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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의 제자들

好學 2012. 3. 15. 21:15

孔子의 제자들

 

 

자로(子路, 기원전 542년~기원전 480년)는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정치가이자 무인이다. 계로(季路)라고도 부른다.

자로는 공자(孔子)의 핵심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자의 천하유세 동안 고난을 끝까지 함께 하였다. 자로는 공자가 살아 있을 때 염구와 함께 노나라의 유력한 정치가였다.

공자와 14년의 천하주유,망명생활을 함께 했으며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갈때 위나라에 남아서 공씨의 가신이 되었으나 왕실 계승 분쟁에 휘말려 괴외의 난 때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발효되어 젓으로 담가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크게 슬퍼하여 집안에 있는 젓갈을 모두 내다 버렸으며, 이후에도 젓갈과 같은 종류의 음식만 보면 "젓으로 담가지다니!" 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 중 최연장자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제자라기 보다 가장 친한 친구요 가장 엄격한 비판자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공자가 문란한 진후(陳后) 남자(南子)와 회견하였을 때 분개하였으며, 공자가 두 번이나 읍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섬기려고 생각하였을 때도 항의하였다.

자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되며 논어의 안연편에는 그는 약속을 다음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맹자에 의하면 자로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는 용맹스러웠고 직선적이고 성급한 성격 때문에 예의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제자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의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안회(顔回: 521?~491?)는 중국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자연(子淵)이다. 자를 따서 안연이라고도 부른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나 공자의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그러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빈곤하고 불우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성내거나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졌다. 그래서 안자(顔子)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염유(閻柔, ? ~ ?)는 중국 후한 말 ~ (魏)의 정치가로, 유주(幽州) 광양군(廣陽郡) 사람이다.염유의 생애

 

어릴 때 북방의 이민족에게 납치당하였으나, 염유는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훗날 염유는 오환도위(烏丸都尉) 형거(邢舉)를 죽이고 그 작위를 빼앗았다.

초평(初平) 4년(193년), 공손찬(公孫瓚)이 대사마(大司馬) 유우(劉虞)를 죽였다. 유우의 종사(從事) 선우보(鮮于輔) 등은 원수를 갚기 위하여 염유를 오환사마(烏丸司馬)로 추대하였다. 염유는 한족과 북방민족들을 규합하여 수만 명의 군세를 모았고, 곧이어 공손찬 휘하의 어양태수(漁陽太守) 추단(鄒丹)을 죽였다. 이후에도 하북을 점거하고 있던 기주목(冀州牧) 원소(袁紹)와 연합하여 공손찬의 세력을 멸망시켰다. 공손찬 멸망 후, 염유는 상곡(上谷)의 영성(寧城)을 거점으로 하여 원소를 위해 이민족과의 교섭 등을 하였다.

건안(建安) 5년(200년), 원소가 조조(曹操)와 교전하자 염유는 사자를 조조에게 보내 복종의 뜻을 전하였다. 조조는 염유를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에 임명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하였다.

건안 10년(205년), 조조가 남피(南皮)에서 원담(袁譚)을 무찌르고 그를 죽이자 염유는 선비(鮮卑)와 오환(烏丸)을 이끌고 조조에게 명마를 헌상하였다. 그 후, 답돈(蹋頓) 토벌에 종군하였고 이후에도 계속 영성에서 이민족과의 교섭에 나섰다. 건안 연간에는 선비의 대인(大人) 가비능(軻比能)이 염유를 통하여 공물을 바쳤다.

조조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비(曹丕) 또한 염유를 중용하였다. 염유는 도료장군(度遼將軍)에 임명되었고, 현후(縣侯)의 작위를 받았다.

평소 조조와 조비는 염유를 식구를 대하듯이 총애하였다고 한다.

 

 

유약(釉藥 / 泑藥)은 도자기 등의 세라믹스 제조 과정에서 광택, 색 및 질감 개선을 위해 세라믹 표면에 바르는 물질을 말한다. 유약을 바른 세라믹이 소결 과정을 거치면 유약의 성분과 공기 중의 산소가 만나 산화과정으로 인한 안정화가 이루어진다. 특히 소결 과정이 이루어지는 가마 속 공기의 산소 농도습도에 따라 이러한 산화 과정의 정도가 달라지는데, 이것은 유약 속의 전이금속산화수를 결정하면서 독특한 을 띠게 만든다.

 

 

자공(子貢,기원전 520년경 ~ 기원전 456년경)은 중국 춘추 시대 위나라의 유학자이다. 본명은 단목사 (端木賜)이다. 공자가 아끼는 제자로서 언어에 뛰어났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노나라·위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공자를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증자(曾子, 기원전 505년~기원전 435년)는 중국 전국 시대유가(儒家) 사상가이다.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이며, 증자는 존칭이다. 남무성(南武城, 지금의 산둥 성) 출신이다.

공자의 만년의 제자로서 공자보다도 46세 연하이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여 공자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의 언행은 《논어》에 몇 조목이 보이며, 또 《대대례기(大戴禮記)》의 증자 10편 및 《효경(孝經)》은 그의 저작이라고 인정된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봉건제의 붕괴를 제지하기 위하여 씨족제로부터 비롯된‘효(孝)’라는 덕목을 강조하였다. 또, “하루에 세 번 내 몸을 살펴본다[주 1]”라고 하여 공자 사상의 근본을 충서(忠恕)라는 말로 표현했다. 공자 사상의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후에 증자의 학통은 자사, 맹자로 이어져 유가의 도통을 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자사(子思, 기원전 483년?~기원전 402년?)는 노나라(魯)의 유학자이다. 공자의 손자이자 공리(孔鯉)의 외아들이다. 할아버지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제자가 되어 유교의 학맥을 이어갔다. 보통 자사와 그의 학파에서 나온 맹자의 학맥을 유학의 정통 노선으로 간주한다.

자사의 생애

공자의 손자이며 사서(四書) 중 하나인 《중용(中庸)》의 저자로 전한다. 이름은 급(伋), 자는 자사(子思)이며 공리(孔鯉)의 아들이다.

3세에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 양육되었으나 할아버지 공자 역시 기원전 479년에 사망하였다. 공리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고, 출처한 전처 외에 후처에게서 자사를 보았으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예기의 단궁편에 서씨(庶氏)의 어머니 라고 언급되어 서씨 집안으로 재혼하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있었던 것 정도만이 확인된다.

장성한 뒤에는 공자의 애제자 중 생존자였던 증자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고, 학맥을 계승하였다. 뒤에 그의 제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에게서 나온 문하생이 맹자로, 이로부터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유교의 정통 학파가 구성되었다.

자사의 사상

증자의 유심주의 철학(唯心主義哲學)을 이어받았고, 그것이 맹자에게 이어져서 선진 유가(先秦儒家)의 유력한 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뒤에 주자학에서 공자, 증자, 자사, 맹자의 학통을 도통으로 존숭했다.

《중용》에 의하면 그는 ‘천(天)’이라는 주대 이래의 종교적 관념을 이어 발전시켰다. 특히 ‘성(誠)’이라는 생각을 도입해 그 체계의 중심을 두고 유심주의 철학을 구성하여 유가사상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자사의 저서

《중용》은 그 자신 혹은 그의 학파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그 밖에 《자사자(子思子)》 23편이 그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나 산실(散失)되어 현재는 그것이 어떠한 책인지 분명하지 않다.

기타

아버지 공리의 두 부인 역시 이름과 성씨, 친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백어의 가정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여 첫 며느리를 출처하였고, 그 뒤에 얻은 며느리에게서 손자 공급을 본다. 그러나 백어가 사망하면서 새 며느리 역시 어린 손자를 그에게 남겨두고 서씨(庶氏) 집안으로 재혼하였다. 뒤에 위나라에서 자사의 생모가 사망하여 자사에게 부고 소식을 전하자 그는 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 이후 자사의 한 제자가 그를 찾아와 서씨의 어머니가 사망했는데, 왜 공씨가 곡을 하느냐 라고 항의하자, 그는 공식 석상에서는 곡하지 않고 별실을 만들고 곡을 하였다 한다.

자사는 역시 이혼 후 재혼하였다. 본처에게서 아들 자상(공백)을 두었다. 자상의 생모가 사망하였으나 자상은 복상하지 않았고, 이를 이상하게 본 자사의 문인들이 자사에게 물었다. "옛날에 선생님의 아버님께서는 쫒겨난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선생님께서 흰둥이(=자상)한테는 상을 치르지 못하게 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자 자사는 "옛날에 우리 아버지께서는 도리를 잃지 않으셨네. 도가 성하면 예도 함께 흥하고 도가 더러워지면 덩달아 더러워진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할 수 있는가? 내 부인의 자상의 어머니이지 내 부인이 아닌 여자는 자상의 어머니가 될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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