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주일예배]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好學 2012. 3. 13. 23:33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새천년 한국교회 예배

우리 시대에 복음 전도는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James White, The Worldliness of Worship.

I. 새 천년, 거대한 도전 앞에 서있는 교회

수 일전, 새 천년이 시작되는 시간, 광화문 네거리에 수만의 인파들이 모여 인간이 만든 불빛으로 온 밤하늘을 밝히며 새 천년을 맞았다. 한 천년이 지나가고 한 천년이 밝아오는 때, 광화문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는 어두움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수많은 불꽃들을 쏟아 놓으며, 새롭게 시작되는 한밤중을 밝혔다. 컴퓨터가 거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Y2K의 문제로 인해서 불안감과 함께 시작되어, 우리 앞에 새 천년이라는 전혀 새로운 장이 열렸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역사의 강가에 서서 도도하게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감지하게 된다. 사회 각 분야가 거대한 변화 속에 서있다. 그 변화의 가속도는 한층 빨라지고 있으며, 변화의 폭도 갈수록 커가며, 다양해지고 있다. 실로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한국 사회도 지난 40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40년 동안의 변화는 지난 400년 동안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큰 문화, 사회, 경제, 정치의 변화를 경험해 왔다.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는 교회의 위상과 영향력에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새롭게 시작된 새 천년은 교회 앞에 기회와 위험이 함께 공존하는 시대가 되어질 것이다.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해 가는 교회에게는 기회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는 교회는 자멸하는 위험의 시대가 되어지게 될 도전이다.

마르바 돈(Marva J. Dawn)이라는 예배학자는 최근의 그녀의 책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를 조명하면서 “오늘의 문화가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의 예배가 그러한 문화적인 특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했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문화 사회적인 변혁의 물결은 예배와 설교 사역을 무기력하게 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향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산업(the entertainment industry)과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중들의 관심과 혼을 앗아가 버리며, 전통적인 가치 체계를 벗어나 포스트모던 가치체계로 나아가는 문화는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며, 종교 다원주의와 해체주의적인 경향을 띠면서, 말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교회의 위상과 영향력도 달라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교회는 퇴락해 가고 있다. 데이빗 바레트(David Barrett)가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에 제출한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유럽과 북미의 교회에서 1년에 2,765,100의 예배 출석자들이 크리스천이기를 포기를 했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매일 7,600명의 사람들이, 매주 53,000 이상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며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한때 복음의 깊은 영향력을 가졌던 제 1세계 교회의 이야기라면, 제 3세계의 군에 속하는 한국 교회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엄청난 변화의 시간들이 되어질 새 천년에도 교회는 주어진 복음의 명령은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생명력 있는 예배를 계속할 것인가가 가장 커다란 과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예배가 침체되는 순간 교회는 침체되기 때문이고, 예배가 소중히 여겨지고, 예배가 바로 드려지는 곳에 교회는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귀중한 예배 본질과 유산을 따라, 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어떻게 예배의 역동성(dynamic)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인가? 현대인의 정신과 지성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며, 어떻게 좋은 예배자들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계속적인 예배 개혁과 교회 개혁에 대한 요구가 주어진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세기에도 좋은 예배를 위해 관심 해야 할 사항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II. 예배의 신학적 이해

대양을 항해해 가는 배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그리 크지도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 놓여 있는 작은 키이다.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고, 바르게 나아가도록 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학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고, 교회를 세우며 바로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학문이다. 신학의 분야에서도 어떻게 예배드리며, 무엇을 예배하고, 왜 예배해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는 것은 예배신학이다.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신학의 표현 양식(a form of theology)”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신학적인 행위이며, 초대교회 이래 예배는 신학을 형성해 왔고, 신학은 예배의 형성에 영향을 주어왔다. 이러한 점에서 새 천년을 위한 예배의 틀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예배의 신학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A. 역사적 고찰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사건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 사건인 출애굽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구원하여 택한 백성들의 모임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와, 그 가운에 임재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응답의 사건이 바로 구약의 예배였다. 특별히 구약의 예배에는 “제사적인 요소”와 “예언적인 요소”가 잘 조화를 이루는데, 여기서 제사적이라 함은 축제, 제의, 거룩한 장소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을 의미하며, 예언적이라 함은 하나님께 대하여 개별적, 직접적, 인격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상호 연관되고, 병존하면서 구약시대의 예배의 특징을 이루어 갔다. 특별히 구약 시대에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고, 성령의 강림 사건을 지나면서 교회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모이기 시작했고, 주일은 기독교의 예배의 날이 되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 들어가 경험했던 말씀과 성만찬은 초기 기독교 예배에서 말씀예전과 성만찬 예전이라는 두 골격을 이루었다. 복음이 유대 지역을 넘어 이방지역으로 증거 되어지면서 기독교의 예배는 보다 질서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적어도 5세기 이전까지 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배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배는 이러한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여러 순서들이 추가되었고, 차츰 예배 의식이 복잡하게 발전되어갔으며, 이러한 것들이 예배 전통으로 굳어져 가게되었다. 기독교 예배의 두 기둥은 말씀과 성례전이었는데, 성례전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며, 새 언약의 공동체를 강조한다. 이 두 기둥 주위에 다른 요소들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의 예배는 갖가지 미신적이고 비성서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특별히 성만찬과 관련하여 예배는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하나의 신비(mystery)가 되었고, 미사는 희생제사의 성격을 취하면서 화체설과 같은 교리들은 예배의 본질을 혼란케 하고, 예배의 변질을 야기하면서 중세 교회는 예배에 있어서 긴 흑암의 터널을 지나게 되어진다.

그러나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수 백년동안 미신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교회의 예배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의 개혁의 첫 번째 관심은 교리에 대한 것이었으나, 그 근본에는 예배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예배 개혁이라는 관심으로부터 종교개혁은 기치는 높이 올려진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었다. 중세 교회의 예배에 대한 오해(misunderstanding)와 오용(misuse)이 예배의 생명을 상실케 했으며, 교회가 깊은 흑암 속에 빠지게 했다면 종교개혁은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예배의 개혁이었다.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이해하는 미사를 거부하였으며, 화체설을 거부하였다. 다소의 주장의 차이는 있었지만 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일치점은 예배는 말씀의 예전과 성만찬 예전의 이중 구조가 보존되어야 한다는 점, 특히 예배 가운데서 말씀의 예전이 그 위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과 예배는 모국어로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 등은 일치를 이루었다.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면서 개신교의 예배는 여러 분파로 발전 및 형성되었다. 특히 예배 규범서에 의존하여 예배를 드리던 것을 탈피하여 예배의 자율성과 직접성을 회복했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었으며,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바람직한 발전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래로 계속해서 유지해 왔고, 종교개혁자들도 예배의 이중 구조에는 일치된 의견을 가졌는데, 예배 개혁에 있어서 좌파의 계열은 예배의 소중한 요소인 성만찬 예전을 1년에 1-2회로 축소시킴으로서 예배의 소중한 보화를 상실한 결과를 가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의 경우, 부흥운동과 연결하여 야외예배와 미국 서부 개척시기의 프론티어 예배의 경향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선교사들로부터 예배를 배웠기 때문에 특별히 그러한 요소가 강하게 작용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보다는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는 일에 깊이 관심 하는 “집회”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듀크 대학 교수인 윌리암 윌리몬이 말한 대로,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보다 더 잘 볼 수 있기 위하여 기독교 예배에서 우리가 지금껏 어디에 서 있었느냐를 깊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예배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존재해 오셨으며, 우리와 계속해서 함께 계신 것에 대한 바로 그 이야기이다. 기독교의 예배의 역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더 좋은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계속해서 깨우쳐 준다.

B. 예배 신학적 고찰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피이터 부르너(Peter Bruner)는 적절한 독일어 단어를 사용하여 예배를 정의하는데, 예배는 “하나님의 봉사”(Gottesdienst)라고 정의했다.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섬김. 기독교의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나아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전부를 주신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구속의 대 드라마를 완성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심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 예배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배설하신 잔치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부를, 가장 귀한 것들을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부터 예배는 시작된다. 이것을 에모리 대학 교수 돈 샐리어스(Don E. Saliers)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에토스”(ethos)라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전부를 희생하신 “하나님의 자기주심,” 그리고 은혜와 사랑 가운데 계속해서 인간과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이것이 기독교의 예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자들은 시편 기자가 드렸던 고백을 감격 속에서 함께 드리게 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섬김으로부터 예배가 시작된다면 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격하여 드리는 인간의 섬김으로 예배는 완성되어진다. 부르너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헌신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여기에서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자가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 앞에서 갖게 되는 감격이다. 감격은 하나님께 대한 섬김으로 이어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의 이토스가 인간의 파토스(pathos)를 불러일으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게 해 준다. 기독교 예배는 인간 파토스가 가지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vulnerability)이 설교와 성만찬을 통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함이라는 이토스와 만나게 될 때, 변화와 능력의 예배가 되어진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의 자기 주심과 창조의 은총 앞에 감격으로 응답하여, 자기 드림의 행위가 예배인 것이다.

C. 기독교의 예배가 갖는 특수성

모든 종교가 예배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는 타종교가 모방할 수 없는 몇 가지의 특수성을 가진다. 그 첫 번째는 예배의 구심점을 이루는 말씀의 선포이다. 예배의 다른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에 대한 응답으로 드리는 순서라면, 말씀의 선포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시고 하늘의 뜻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노출의 사건이다. 이와 같이 설교는 오늘도 계속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계시 사건(the event of revelation by the Triune God)이며, 그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자들과 청중은 그 하나님의 사역 앞에 놓여 있다. 그들은 함께 말씀의 “청취자들”(listeners)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떠나는 여정(the homiletical journey)을 함께 가는 “동반자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에 관해서(about) 설교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도 말씀하시고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대한 증언자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God who speaks)“이시라는 고백으로부터 설교 사역은 시작된다. 또한 설교자가 이 사실을 확실하게 고백할 때, 그는 온전한 설교자가 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자는 “성언 운반 일념”에 사로잡혀 있게 되며,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청중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서 겸허하게 무릎을 꿇게 할 것인지에 깊이 관심 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 설교자들을 통해서 과거에도 계속해서 말씀해 오신 하나님께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그 말씀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이 말씀이 바로 들려질 수 있기 위하여 시대와 삶의 자리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아니할 것이다. 문화 사회적인 변화를 포함해서 청중들의 의식과 삶의 정황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설교자는 말씀의 역동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청중들의 삶과의 관련성(relevance)이 없는 설교는 허공에 맴돌다 사라지는 말씀이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그들의 삶의 연관성이 없고 의미를 주지 못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의 설교들은 청중들의 삶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으며(relevant), 깊은 의미를 부여해 주는 말씀이었고(meaningful), 또한 흥미를 유발시켜주는 말씀(interesting)이었다.

두 번째로는 기독교의 예배가 다른 종교의 예배와 다르게 하는 특수성은 성만찬에서 찾을 수 있다.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예전이며, 갈보리 산상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찢어 나누어주심으로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 놀라운 역사를 다시 회상(recapitulation)케 하는 예전이다. 우리는 성만찬 예전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접하게 되며, 부활의 소망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이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 되심을 새롭게 확인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신앙을 되찾게 된다. 또한 성체를 받으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연합을 경험하게 되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된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동참하게 하시는 예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중요한 예전을 일년에 한 두번 행하는 한국 교회 예배 전통에 만족하지 않고 그 횟수를 늘여 가는 최근의 경향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터넷이나 케이블 방송을 통해 집에서 간편하게 예배하려는 재택 예배가 위협이 되어질 새 천년에도, 사이버 교인들이나 사이버 교회가 결코 맛볼 수 없는 예전이 있다면 그것은 성만찬 예전이다. 성만찬 예전은 성도들에게 “보이는 말씀”(visible word)으로서, 예배자들로 보게 하고, 느끼게 하며, 감격하게 하는 예전이기 때문에 새 천년 한국교회가 되찾아야 할 소중한 예배 예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기독교의 예배를 특별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는 성령님의 역사이다. 다른 종교는 사람의 노력과 방법을 통해 의식의 장엄함과 효과성을 가져오게 하려는 노력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이러한 노력을 초월하여 예배자들의 심성을 찾아주고 그들의 가슴에서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깊이 의존하고 관심 한다. 예배를 예배되게 하고, 그 예배의 역동성을 갖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시다. 예배의 완성은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창조시 혼돈의 세계 위에 운행하시던 성령께서,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셔서 권능을 덧입혀 주셨던 성령님께서 오늘 예배 가운데 임하셔서 예배자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며, 권능을 덧입혀 주시고, 넘치는 은혜의 강물을 맛보게 하신다. 성령님은 예배 가운데 역사 하셔서 예배의 역동성을 부여해 주시는 분이시며, 예배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행위들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예배와 성령님의 역사와의 관계성에 있어서 기독교회는 양극화 현상을 보여왔다. 인간의 지성을 강조하며, 고정된 형식이나 예배 습관에 얽매여 있으며, 인간의 감성적인 표현이나 순서는 도외시하는 지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예배 경향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정적인 기능만을 활용하여 예배의 질서를 혼돈 시키고 감정적인 면을 자극하여 예배의 역기능적인 면이 많이 드러나는 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예배 경향도 있다. 전인으로서의 인간은 지정의가 잘 조화를 이룸으로 가능해지는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인간의 지, 정, 의 모든 것들을 활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III. 새천년 한국 교회 예배 갱신의 방향

지난 한 세기동안 한국 교회 예배는 세계 어느 교회보다도 열심히 예배했고, 실로 예배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던 순교자들의 예배 정신 위에 교회를 세워왔다. 새 천년,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면서 지난 세기와 같이 새로운 세기에도 한국 교회는 동일한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다. 시대적인 급격한 변화는 한국 교회가 새 천년에도 좋은 예배를 들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낙관하기 어렵게 만든다. 급변하는 예배 상황에도 불구하고 좋은 예배를 찾는 것은 현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고 예배의 주관자가 되시는 성령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에,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 일에 깊이 관심 한다면 오늘의 시대 속에서도 감격적이며, 살아있는 예배가 계속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원하면 가장 먼저 예배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예배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있게 할 것인가? 예배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목회자들이나 교인들 모두가 원하는 바이지만, “어떻게?”라는 질문은 한 두 가지로 대답되어질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구도자 예배나, 경배와 찬양의 스타일인 “현대적인 예배” (contemporary worship)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예배 신학적인 점검과 문화 사회적인 고려 없이 무분별한 도입은 그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방법론이 문제가 아니고,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고, 예배자가 가져야할 근본적인 자세를 회복할 때 가능해질 것이다. 여기에서는 예배 신학적인 논의나 어떤 방법론적인 고찰보다는 예배와 예배자의 본질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를 주안점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A. 좋은 예배자가 좋은 예배를 만든다.

예배 개혁 중심에는 예배자 개혁을 필요로 한다. 예배의 개혁은 순서를 달리하거나, 어떤 방법이나 예배 도구를 달리 함으로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 개혁의 그 중심에는 좋은 예배자가 있다. 즉 좋은 예배는 좋은 예배자가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오늘도 좋은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 (요 4:23). 좋은 예배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나의 교인들이 어떻게 좋은 예배자가 되게 할 것인지에 깊이 관심 해야 한다. 예배에 참석하도록 교인들을 권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예배자들이 되도록 하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갈증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 앞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성도는 좋은 예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좋은 예배자를 만들기 위하여 예배자 교육과 영성 훈련이 겸하여 주어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예배 가운데서 찬송을 하는 성도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찬송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것은 목회자의 직무 유기가 될 것이다. 어떻게 찬송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적절한 안내와 교육이 필요하며, 예배의 한 부분, 부분 속에서 예배자들이 자기의 전부를 올려드리는 산 제물이 되어지도록 부단한 예배자 교육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심령이 뜨거움과 간절함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들은 좋은 예배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예배자 교육은 영성 훈련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B. 예배의 중심: 드려지는 예배

한국 교회의 예배에는 드리려는 욕구보다는 받고자하는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은혜 받기를 원하고, 말씀으로 위로 받기를 원하며, 복을 받기를 원하고, 문제의 해결함 받기를 원하고, 병 고침 받기를 원하는, 예배의 중심이 “받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감정주의 예배 경향은 이러한 예배의 경향을 부추겼고, 기복주의 신앙형태는 이러한 경향을 양산하는 배양토가 되었다. 물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축복 주시기를 원하시고,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며, 앞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이 이미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 은혜와 구속 사건 앞에 감격하여 자신의 전부를 드리려는 것이 기독교 예배의 중심을 이룬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은 받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워 예배에 참석할 것이 아니라, 은혜와 구속의 은총 앞에서 자신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아니 생애 전부를 드리려는 자세를 가지고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와 삶의 양식들은 그 목표를 즐거움의 추구(entertainment)에 두고 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추구하는 바를 잘 대변해 주는 내용이다. 뉴욕 대학의 교수였던 닐 포스트만은 텔레비전이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형성한 현대 문화의 형태는 “쇼 비즈니스(show business)이며,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즐거움“(entertainment)임을 갈파하였다. 현대 설교나 기독교의 예배도 이러한 경향을 받아들이면서 청중들의 욕구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채널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효과의 측면(effectiveness)에서 필요한 일이며,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예배의 신학적인 내용에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측면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도 예배의 효과적인 측면을 위해 성육신 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예배의 신학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지만 예배의 중심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서 예배자들이 기쁨을 얻는 것이지,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얻기 위한 예배는 근본적으로 예배의 중심이 잘못되어 있는 예배가 되어진다.

C. 예배의 목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예배

새천년 한국 교회가 지향해야 할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in the presence of God) 예배여야 한다. 오늘도 성도들의 예배 가운데 영으로 임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임재를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그 예배는 목표(goal)에 도달한 예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좋은 예배는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터치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위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떨림을 경험하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받고, 기쁨과 감격으로 돌아가는 예배였다. 이사야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에스겔이 그랬고, 하박국이 그랬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은 성령님을 깊이 의뢰해야 하며, 온 중심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가능해지는 일이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진종일 걸어가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의 영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해준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앞에 서있고, 아니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면서 그들의 고민과 아픔을 듣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 앞에 말씀 성찬이 베풀어지고, 일상의 식탁을 바꾸어서 성만찬이 되게 하시는 은혜의 성찬 앞에 서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사실이 되고 마는가?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성찬을 받고서야 그들의 눈을 열려지고,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예배자들이 되어진다. 새 천년 한국교회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되도록 하나님의 역사 앞에 민감하며, 영의 눈을 열어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D. 예배의 역동성: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예배

예배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예배의 화석화(ossification of worship)이다. 대부분 예배의 갱신과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지금까지 가져온 예배 순서나 예배의 습관적인 내용에 대한 경직화 때문이다. 예배의 경직화는 예배의 지루함을 야기 시키며, 예배의 역동성(dynamic)을 상실하게 만든다. 역동성이 상실된 예배는 지루하게 만들고, 예배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화석이 되게 만든다. 화석이 된 공룡보다도 오늘도 부지런히 겨울 먹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일하는 개미에 생명이 있고, 역동적이다. 그러므로 화석화된 것을 통해서는 그 어떤 생명의 역사를 기대할 수가 없다. 생명의 역사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화석화된 예배는 지루한 예배가 되어질 수밖에 없다. 혹자는 “지루한 예배는 죄악”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지루한 예배는 교인들을 쫓아 보내고 교회를 침체의 늪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오늘도 계속해서 진정한 부흥을 일으키는 교회 속에는 살아있는 예배가 있고, 역동적인 예배가 있음을 보게된다.

예배가 경직되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배 인도자들이나 예배 기획자들이 성령의 역사 하심에 깊이 의뢰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는 고착화되어진다. 예배 기획에서도, 예배의 진행에서도, 그리고 예배의 결과에서도 성령의 역사 하심과 인도하심에 민감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 성령님의 역사에 외면하는 것은 예배의 경직화의 가장 커다란 이유가 되어진다. 또한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할 수 있도록, 또한 그분의 인도하심 앞에 순종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예배가 경직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앞서 역사적인 고찰에서 살펴 본대로 초대교회 이래로 기독교 예배는 “말씀의 예전”과 “성만찬 예전”을 골격으로 해왔다. 그러한 골격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예배는 예배 신학적으로 찬양, 간구, 봉헌, 그리고 파송이라는 예배의 중심 요소들을 가진다. 이러한 예배의 골격과 예배 신학적인 면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변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성령의 원하시는 바이다. 생명의 세계는 얼마나 다이내믹한 변화를 전제로 하는가? 10년이 가도, 20년이 가도 아무런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예배는 근본적인 생명의 세계가 가지는 특징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만찬을 집례할 때만 하더라도 언제나 동일한 내용으로 진행하는 것보다는 변화를 시도한다면 참신성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만찬을 집례할 때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순서들, 즉 성만찬 제정사, 성령초대의 기도,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anamnesis), 성만찬 기도, 그리고 성만찬에의 참여 등의 순서들을 중심으로 하되 얼마든지 변화 있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진행과 표현 방법의 변화를 시도해 볼 수 있겠고, 예배당의 조명, 배치, 분위기, 예배 음악에 사용되는 악기, 예배 순서지 등, 개 교회의 상황과 목회자의 목회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성과 변화를 추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 예배의 자세: 찬양과 경배

앞서 “예배의 중심”에 대해 기술하면서도 언급하였지만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자가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이다. 그 무엇보다도 예배자들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최고의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심을 깨닫고 마치 영적 전쟁을 치르는 전사와 같이 온 마음으로 이 일에 쏟아야 할 것이다. 한 생명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죄의 결박들과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그의 새롭게 하시며 위로하시는 역사를 체험하고, 오늘도 살아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고 돌아가느냐 빈손으로 되돌아가느냐가 판가름나는 영적 전쟁이라는 관념을 가질 때, 예배 위원들과 예배 준비자들은 이러한 긴박성과 절박성을 가지고 준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순서를 바꾸거나 예배에서 사용되는 어떤 악기를 바꾸는 것으로 예배가 새로워지고 좋은 예배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배자들의 예배 자세가 바뀌어 질 때, 예배 인도자들의 의식이 바뀌어질 때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배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가르쳐주시는데, “네 마음을 다하고 (with all your heart),, 목숨을 다하고 (with all your soul), 뜻을 다하고 (with all your mind), 힘을 다하여 (with all your strength)"라고 가르쳐 주신다 (막 12:30). 여기에서 주님은 마음 전부, 목숨 전부, 뜻 전부, 힘 전부를 요구하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전존재이다. 최고의 정성과 최고의 노력을 요구하신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이러한 전존재를 드리는 자세가 경주되어 그분을 섬기는 자세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순서, 순서에 예배자들이 이러한 자세를 갖도록 함은 예배 교육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다.

F. 예배의 원동력: 영성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영성이란 “사람들의 삶을 생기 있게 해주며,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믿음의 실천과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영성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겠지만 특별히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살아가려는 삶의 자세,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 자세가 바로 영성이다. 좋은 예배는 예배자의 깊은 영성, 예배 인도자 혹은 설교자의 깊은 영성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으로 충만해 있는 예배자야말로 좋은 예배를 만드는 모든 조건과 요소에 선행한다. 이러한 영성은 은혜에 대한 감격 없이 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갚을 수 없는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서만 살아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노래한다.

나의 심령에 부어주신 이 은혜,
온 인류의 가슴 가슴마다에 부어주신 이 놀라운 은혜,
그 은혜에 대해 어떻게 다 감사할 수 있을지요.
나의 모든 호흡이 찬양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심장이 주님으로 충만해 지게 하옵소서.
나의 심장이 주님의 사랑으로 흘러 넘치게 하옵소서.
나의 모든 삶이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게 해 주옵소서.

영성은 이러한 터질 듯한 감격의 자세를 가지고 날마다의 삶 속에서 그분으로 충만해지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 깊은 영성의 사람이며, 그러한 영성만이 예배를 좋은 예배가 되게 할 것이다.

IV. 결어

우리 앞에 열려져 있는 새 천년은 엄청난 변화의 시대가 될 것이다. 사회가 변화고, 문화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며, 사람들의 관심 하는 바가 달라지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다면 개인도, 사회도, 교회도 영향력을 가지고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변화는 인간 삶의 피할 수 없는 부분임이다. 기독교의 예배 역시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다면 그 영향력을 계속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이 넘쳐 날 것이며, 물질주의와 과학문명은 인간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 편리하게 하면서 쾌락과 즐거움(entertainment)을 추구하는 군상들의 발걸음은 하나님에게서 갈수록 멀어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신적인 퇴락과 함께 진리를 추구하고,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갈증도 더해갈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 속에 어떻게 살아있는 예배, 보다 좋은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서갈 것인가? 좋은 예배가 있는 교회는 21세기에도 더욱 힘있게 서갈 것이며, 더욱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질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생명력 있는 말씀과 은혜와 감격을 맛본 성도들은 21세기에도 세상을 변화시켜 가는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가 문제이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전할 것이며, 여전히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가 되게 할 것인가? 우리는 예배의 본질의 회복을 위해 원론적인 측면을 살펴보았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교회가 힘있게 서갈 수 있기 위해서 예배가 살아야 한다. 좋은 예배, 생명력이 있는 예배를 위한 노력은 본질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이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새 천년의 출발점에 서있는 우리는 좋은 예배, 생명력 있는 다이내믹한 예배를 관심 하면서 우리는 특별히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가장 위대한 예배자로, 그리고 그 좋은 예배를 함께 공유하도록 만든 한 믿음의 선배를 생각한다. 그의 삶의 환경은 실로 절망적이었다. 비관적이었다. 차가운 지중해의 바람에 흰 수염을 흩날리면서, 오늘도 힘든 노역을 감당해야 하는 죄수의 몸으로 서있었던 노사도, 요한. 그 절망적인 삶의 상황 가운데서, 함께 예배할 그 누구도 없는 텅빈 빈들에 서있던 날, 그날도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던 주의 날을 기억하며 터질 듯한 가슴을 가지고 그는 채석장 한 가운데서 홀로 서서 주님을 예배하고 있었다. 동료 제자들은 모두 순교의 제물이 되어졌고, 홀로 남아 외로움 가운데서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던 그는 그 예배를 통해 일곱 촛대 일곱 별 사이를 거니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고 계시는 주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며,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보좌에 높이 계신 주님께 천군 천사들과 함께 면류관 벗어 드리며, 참으로 놀라운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천상의 예배도 경험하게 된다(계 1-4장). 새 천년의 출발점에 서서 우리에게도 사도 요한과 같이 터질 듯한 감격과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선다면 우리의 예배도 하늘에 잇대어지는 생명력 있는 예배가 되어질 것이다.

새천년 준비위원장이었던 이어령씨는 “우리 앞에 문이 열려있는 것도 아니고, 닫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깨어 있는 사람, 준비하는 사람,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는 사람에게는 문이 닫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준비하지 않는 사람, 변화에 대처해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문은 닫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욕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전후(戰後), 공허함과 허무주의가 팽배해져갈 때, 간절한 간구를 잊지 않았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의 기도문을 가슴에 새기면서 결론을 대신한다.

영광과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능을 덧입혀 주옵소서
옛날 교회들의 능력과 그 스토리들로 관을 씌우시고
나무들마다 영광스런 꽃봉오리들이 피어오르도록 하시고
이 시대를 극복해 갈 수 있도록
변화하는 이 세대를 감당해 갈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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