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

好學 2012. 2. 19. 20:31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

 

 

"하나님 앞에 설 염치가 없다. 번잡하고 무질서한 생활,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마음, 미움과 죄책감과 갈등으로 뒤범벅인 내 안, 제대로 굴러가는 것 하나 없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것 같은 하루, 한 달, 일 년,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과연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 이 말은「필립 얀시」고백이지만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하다.

「필립 얀시」는 모태신앙인일 뿐 아니라, 혀를 내두를 정도의 다양한 학문적인- 신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문학, 의학 등등- 검증을 거치며 자신의 존재가치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 확신이 얼마나 견고한지 만약 거기에 섣불리 시비를 걸었다가는 본전은커녕, 뼈도 못 추리고 죽사발이 될 판이다.「필립 얀시」는 인생의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결론을 낸다. 문제는 우리 변덕스런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인간의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실망을 하나님 편에서- 어거스틴과 칼빈의 전통적인 신학방법-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 편에서 파헤친 친절한 안내자가 바로「필립 얀시」다. 아, 그렇다고 해서「필립 얀시」가 위에서 아래로의 신학방법을 거부한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뭐랄까.「필립 얀시」는 복음의 눈높이를 최대한 낮췄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는「필립 얀시」의 최고 걸작은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걸작들이 나오기까지 얀시는 인생의 불가해인 고통의 문제와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하나님이 계시는 세상에 왜 고통이 존재하느냐는 문제는 얀시에게 가장 큰 화두였던 것이다. 그래서 얀시가 쓴 첫 번째 책의 제목도 <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얀시로 하여금 한센씨(문둥병)의 전문 외과의사이며 2대째 오지(奧地) 선교사인「폴 브랜드」박사를 만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깨닫게 하신다. 이로서 하나님에 대한 피해의식과 경계심을 무장해제 하게 된 얀시는 그때부터 게걸들린 듯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연구에 몰입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관찰하는 얀시의 렌즈는 너무도 다양해서 나처럼 틀에 박힌 신앙인은 웬지 신상에 위협을 느낄 정도다. 그는 신학자와 과학자, 천문학자와 의사, 시인과 광대, 부랑자와 창녀, 동성애자와 에이즈 환자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관찰한다. 그런데 참으로 희안한 것은 그 다양한 렌즈를 통하여 관찰된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영원을 사모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진 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진리의 냄새를 맡는 얀시 특유의 예민한 후각은 구태의연한 우리 의식의 급소를 찌른다. 우리는 그의 글을 읽으며 의표를 찔린 듯, 또는 치부를 들킨 듯, 아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통쾌하게 웃는다. 얀시는 엄청난 양의 고급정보를 소유하고 있지만 지적인 우월감은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박학다식을 아주 드라이하고 용이하게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얀시가 쓴 책들은 거의 대부분「미국 기독교 도서 최우수 저서상」을 받았다.

나는 얀시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교도적인 칼빈주의자로서 내 안에 숨겨져 있던 파시즘적인 요소에 대한 진지한 각성을 하게 되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의 주류가 되고 대세가 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 세상 임금은 마귀이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받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그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찌끼요, 벌레같은 존재로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증되는 것이다.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이 없으며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패한 본성에 의하여 세상의 주류가 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부조화의 괴리에서 파생되는 것이 불순종이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바로 고통인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죄악에 눈먼 인생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확성기인 셈이다.    

아마도 얀시 최고의 걸작으로 기록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그동안 특별은총에만 길들여졌던 신앙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자칫 도덕폐기론의 위험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그동안 죄에 대하여 갖고 있던 긴장과 경계심을 완전히 풀어버리는 오류를 범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 이유는 악을 대적하고 죄와 싸우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가장 든든한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속에는 자체적으로 악과 싸울 수 있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불의와 악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며 사망의 위협 속에서도 안식과 생동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얀시의 걸작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 인식- 인간의 악이 투사된 왜곡된 하나님-을 벗겨 내면서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또한 그 진짜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볼 것을 권고하고 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주눅이 들어있는 우리들에게 어린아이 같은 당돌함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준다.

죄를 추궁하는 마귀에게 얀시는 뻔뻔스럽게도 "죄? 그게 내 18번이야. 너 그거 몰랐어? 저리 비켜 임마!" 하고 호통을 친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을 때 절대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7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오뚜기처럼 말이다. 반대로 자신이 잘했을 때는 그것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높이지 않는다. 왜?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제임스 팩커」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읽고 "은혜의 삶에 대한 얀시의 글은 가히 그의 최고의 작품이다. 이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라는 서평을 썼다. 또한 이 시대 최고의 기독교 심리학자인「래리 클랩」은 "나는 이보다 더 중요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지 생각해 내려고 애쓰고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꼭 책을 들고 가는데 십중팔구는 얀시의 책이다. 치질이 걱정되지만 그 버릇을 끊지는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