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패니 재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好學 2012. 2. 6. 20:13

패니 재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의 위대한 생애

 

 

한평생 맹인으로 은혜로운 영혼의 찬송가 10,000여편의 찬송시를 쓴
세계 최고의 찬양 전도자이자 찬송가 시인 패니 재인 크로스비

미국인이 뽑은 미국 대통령보다 더 존경하는 금세기 최고의 인물
한국인이 뽑은 가장 은혜로운 베스트 찬송가의 주인공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찬송가 204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찬송가 21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찬송가 337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찬송가 434장)
"오 놀라운 구세주"(찬송가 446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찬송가 492장)
"예수 나를 위하여"(찬송가 144장)
"나의 생명 되신 주"(찬송가 424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찬송가 231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찬송가 46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찬송가 43장)

 

패니 크로스비는 1820년 3월 24일 미국 뉴욕 주의 작은 마을 푸트남에서 태어났는데 생후 6주부터 맹인이 되었습니다.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 치료로 패니 크로스비는 생후 6주부터 95세까지 맹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불행했습니다.

패니의 엄마 머시 크로스비는 어린 딸이 맹인이 된 사실을 알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패니가 돌팔이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된 사실을 알고 교회와 동네 사람들은 그 돌팔이 의사를 찾아가 그를 처벌하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마을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눈이 멀게 된 이후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패니가 한 살 되었을 때 그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버지 존 크로스비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패니의 엄마가 늘 생활고로 바빴기 때문에 패니는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으며 할머니는 패니의 어린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할머니는 패니의 좋은 친구이자 선생님이었으며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패니는 할머니에게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힘, 부드러움을 배웠다. 할머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패니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성경말씀과 접목시켰다. 패니의 할머니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을 가르치며 손으로 만져보고 코에 대고 향긋한 향기를 맡도록 했다. 그리고 그 꽃의 색깔과 향기, 생김새 등을 일러주었다.

패니가 그 이름을 잘 익힐 수 있도록 자세히 묘사했다. 할머니는 모든 자연을 성경말씀과 연관 지어 설명해 주었으며 성경말씀을 암송하도록 지도하는 훌륭한 성경교사 역할을 했다.

패니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시편과 잠언, 룻기 등과 신약의 대부분을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패니는 후에 성경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곤 했다. 할머니는 성경 뿐 아니라 문학작품도 많이 읽어주었는데 패니는 거의 외울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어느 날 문득 패니는 자신의 삶을 커다란 목적을 위해 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을 볼 수 없었고 막막하고 답답했다. 이대로 앞을 전혀 보지 못한 채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때마나 그녀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나와서 그녀가 기도하는 큰 바위로 가서 하나님께 위로를 구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패니에게 위로를 주었고 소망을 주었다. 그런데, 패니가 11살 되었을 때 패니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패니의 할머니 유니스 크로스비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패니는 가난과 슬픔에 버려진 불행한 아이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향방이 또한 달라질 수 있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패니 크로스비의 생애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개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는 곳 마다 준비된 사람들을 붙여 주셨다. 지식의 배고픔으로 늘 허기진 어린 영혼의 긴긴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곧 현실로 그 길을 열어 주었다.

그 안타까움이 배움의 기쁨으로 바뀌어 시간이 갈수록 더해가는 배움의 갈증은 그녀로 하여금 밤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그녀가 시를 지을 때면 골방에 가서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습관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1834년에 뉴욕 입법부와 맨해튼에 새로 생긴 맹인학교에 전액장학생으로 등록했다.


패니 크로스비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패니 크로스비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충만한 은혜를 경험했다.

패니는 각계각층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시인, 소설가, 작가 뿐 아니라 정치인, 경제인, 대통령,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 거리의 사람들 등 그들과 교류하면서 더욱 충만한 열정을 보였다.

특히 그녀의 찬양시에 곡을 붙여 주었던 소중한 동역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직접적인 만남을 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찬송가에대한 깊은 이해를 만들어준 미국음악의 개척자 ‘로웰 메이슨’, 패니의 서정시가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던 조지 루트,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에서의 진정한 동역자가 되어 준 윌리엄 브래드베리, 실베스터 메인, 로버트 로우리 박사, 윌리엄 하워드론, 무디와 생키 등 그녀에게는 소중한 동역자들이 있었다.

 

패니 크로스비는 성장해서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던 맹인 교수 밴 앨스틴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38세 되던 해인 1858년 3월 8일이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깊은 헌신과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은 두 사람에게 그윽한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도시를 떠나 시골에 와서 자연을 즐기며 조용히 살았는데 시골의 공기는 그녀의 영혼을 더욱 아름답게 소생시켰고 그윽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결혼 후 곧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고 귀여운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곧 아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일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1859년에 일어났습니다. 패니 크로시비는 몇 달 동안을 아기를 잃은 슬픔에 잠겨 힘들게 보냈습니다.

이웃들로부터 받는 위로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아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내려와서 우리의 아기를 데리고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기를 하나님과 그 분의 왕좌에 맡겼습니다.”

 

패니와 밴 부부는 다시 뉴욕의 맨하튼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다시 모든 열정을 다 쏟아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패니에게 찬송시를 써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습니다. 패니는 일 주일에 6,7편의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곡에 붙일 가사를 그녀에게 부탁했습니다.

패니와 밴은 부부이자 서로를 돕는 배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패니와 밴은 많은 일을 했지만 허름한 집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불평하거나 서로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주신 것에 항상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를 떠나 먼저 하늘로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한 평생 수 많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거듭해서 경험한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었지만 그녀에게 그 대신 끝 없는 에너지와 열정을 부어주셨습니다.

60세가 넘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려고 했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더 많은 찬송시를 썼고 새로운 일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에너지와 열정이 그녀의 심장을 끊임없이 고동치게 만들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90세가 되었을 때 영적인 삶에 있어서 최고의 해였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포도주가 넘치는 풍부한 시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 많은 청중들이 교회당을 꽉 메웠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15년 2월 12일 금요일 아침에 금세기의 가장 뛰어난 찬송가 작사가인 패니 크로스비는 95세를 일기로 조용히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