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깊이 사람의 깊이/최일남 지음/296쪽/1만3000원/문학의문학
“힘은 부치고 노화한 다리를 그냥 놓아먹일 수도 없어 오래전부터 나는 자전거를 탄다.걷다가 달리는 맛이 색다르다”고 최일남 씨는 말한다. 노작가의 자전거 타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자 절실하게 사색하는 행위다. 화가 송영방 씨가 그렸다. 그림 제공 문학의문학
‘앞동산인들 없었으랴만 뒷동산처럼 만만하고 친숙하지 않았다. 멀리 바라보는 존재로 어쩐지 뜨악하여 정을 주기 어려웠다. 뒷동산에 올라 전쟁놀이, 칡 캐먹기 등으로 실컷 시간을 죽이다가 노래라도 부르면 한나절의 끝이 근사하거늘, 앞동산에서 그랬다는 얘기는 두고두고 못 들었다.’
어른의 유머가 여간 유쾌하지 않다. ‘뒷동산’이라는 정겨운 단어에서 이렇게 재미난 얘기를 풀어낸다. ‘이 땅에 사는 우리네 중에는 태생지의 멀고 가까움을 떠나 어슷비슷 죽이 맞는 ‘뒷동산 출신’이 참 많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 거지반이 뒷동산을 일상에 끼고 산 덕에 정서적 소통이 이심전심 빠르다’는 구절에선 무릎을 절로 치게 된다. 작가는 이렇게 뒷동산에 담긴 의미를 독자들에게 새롭게 일깨워준다.
소설가 최일남 씨(78)는 산문집 ‘풍경의 깊이 사람의 깊이’를 묶어내면서 “애초에 작심한 건 아닌데 이번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역사가 공공의 재산이라면 개개인의 삶은 필경 사람에 대한 기억과 사연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닐까”라며 사람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곳곳에서 작가가 만나는 풍경에는 엄연히 사람이 있다. 뒷동산에는 동무들과 놀았던 추억이 있고, 한낮의 지하철에는 오수를 즐기는 할아버지가 있다. 바느질의 달인이셨던 어머니를 떠올리니, “본을 따라 혼 두 짝의 무명천을 박음질하다가 순식간에 버선목을 확 뒤집는 솜씨가 기막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어머니의 매운 손끝을 본받아서도 내 글쓰기가 좀 칼칼하고 야무졌으면 싶은 헛된 소망”이라고 말한다.
노작가의 고백은 겸허하다. 왜냐하면 산문집은 맛깔스러운 문장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빤한 코스를 오르내리는 당일치기 등산에서는 드디어 촌스럽게 비칠 공산이 크다. 풍경에 새삼 고개를 돌리지 않고 경보 선수처럼 모두들 잰걸음 치기에 바쁜 동네 산에서는 하물며다’ ‘누추한 상식에의 도전이 그답다. 소운의 마지막은 마침내 적적했다’ 등의 문장들은 깔끔하면서도 멋스럽다.
역시 사람에 대한 애틋함이 무엇보다 도드라진다. 50여 년 사귀어온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의 도수 높은 안경을 떠올리고, 그 안경이 “그만의 통찰력을 증폭시키고 남다른 레토릭을 가다듬는” 기능을 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으로 벗을 치하한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김소운의 수필집 ‘목근통신’을 통해 그의 일본살이 30년 삶을 회고하면서 고단한 인생을 버티게 한 것이 모국을 향한 열정과 의지였으리라고 가늠해 본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의 남다른 평문에서 평론가의 부지런한 공부와 노력의 흔적을 찾아낸다.
“소설가는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진득하게 방을 지키다가도 수틀리면 바깥으로 나돌라는 따위 희떠운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길을 나서면 슬며시 떠오르는 탈각의 느낌이 무엇보다 좋다. 집에 벗어두고 온 허물을 객관화시켜 멀리 바라보는 계기로 다시없다”는 말로, 길을 나서고 그 길을 글로 옮기는 글쟁이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산문집은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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