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교육 3/[신학용어]神學用語

신학용어 사전

好學 2012. 1. 21. 07:28

신학용어 사전 

 

신정론 [영] theodicy [독] Theodizee [불] theodicee

'신성'(deity) '정의'를 의미하는 두 개의 희랍어 단어에서 유래 되었으며, 세상에 있는 많은 악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변호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인정하려는 어떠한 유신론에게도 이 문제는 발생한다. 다음의 유명한 딜렘마(dilemma)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은 악을 방지할 수 있으나 하지 않는 것인가, 혹은 하나님은 악을 방지하려고 하는데 할 수 없는 것인가? 만일 전자라면 하나님은 자비하지 않은 것이고, 만일 후자라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못한 것이 된다. 옛날 플라톤(주전427-347)의 철학에서도 발생했던 악을 설명 하는 문제는 기독교에서 특별히 역설적인 형태를 취한다. 왜냐하면 후자는 창조가 보기에 좋았으나 하나님은 '악한' 사건인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특별히 계시하셨음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해결책의 하나는 복잡한 철학적 문제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면

[가능성] [불가능성] [자유] [자연법]과 같은 용어의 의미와 그리고 계시와 이성의 관계에 관한 광범위한 고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대안들의 어떠한 단순한 설명도 피상적으로 보였다. 이런 조건을 생각하며 모두 특성을 가지고 있는 고전적 해결책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1) 이 세상의 악은 다른 신이거나 천사 혹은 사람 같은 피조물로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죄를 짓게 하거나 반역하게 한다.

2) 악은 어떤 무질서의 필요한 면이며, 그 안에는 자유로운 존재와 상대적 으로 안정된 물질의 질서가 있다.

3)악은 한정적 이거나 일시적인 경험의 환상이며,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4) 악의 신비에 대하여 이론적인 대답은 없으며, 악의 현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할 때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린아이와 같이 믿을 때에만 깨달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대답은 딜렘마의 한 뿔(horn)인 전능(omnipotence)을 공격한 것이거나 신비에 호소한 것이다. 대안 3)과 4)는 하나님의 전능에 대하여 뚜렷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나 결코 이론적인 해답을 주지 못한다.
3)은 미래에 호소해야 하고, 4)는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대안 1)은 근본적인 악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2)의 경우로 약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안 2)는 피조물의 자유를 전제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심지어 사탄을' 타락한 천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반역은 이러한 피조물의 근본적인 가능성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 이론적인 정당화의 시도로 대개 2)의 형태를 취한다. 이 대안에는 다음과 같이 강조점이 다른 세 개의 형태가 있다.
창조에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을 강조하는 것,

추상적인 전능은 의미가 없는 용어이며 재고할 필요가 없다는 것,

따 하나님은 제한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 등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기 제한을 강조하는 까은 이 세상에 악이 많으므로 특별히 문제가 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과된 제한을 제거할 수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자비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

그러므로 이 해결책이 신비와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 호소하는 대안 4) 를 자주 이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제한된 본질을 강조한 것은 제한된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그런 존재는 경배할 가치가 없다는 근거로 자주 비평을 받았다. 이 비평은 철학적인 것이라기보다 이해결책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는 반대이다.

 

이것에 대한 응답은 이성 이 맹목적인 정통신앙보다 더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신앙 자체가 전능의 재정의를 요구하며, 성서적 증거는 고독 사랑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게하며, 이러한 요구는 전능의 전통적 이해에 대한 엄격한 조건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어떤 신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고전적 유신론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을 반대하며, 악은 자유로운 존재를 창조할 때 포함된 필요한 위험(risk) 이라고 암시했다. 그러나 이 신학은 "자연적인 악"의 문제, '가능성'과 '능력'의 의미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취급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 성서적 증거나 기독론에 호소했다. 그러므로 고전적 유신론의 철학적 비평은 종교철학자들, 특히 알브레드 황트헤드(1861-1947)의 과정철학의 영향을 받은 찰스 하트손(1897- )에 의해서 발전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이 입장 주장하기를, 악의 문제를 전능하시며 수난 불능(impassible)하나 자비로운 존재라는 고전적 하나님 개념을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전능은 의미가 없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딜렘마에서 제시한 대로 자비와 비교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활동적인 능력과 수용성을 정당화시키는 더욱 적절한 존재론(ontology)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하트손은 주장하기를, 전능은 유한한 피조물이 바람직 하게 결정하기 위한 기회를 극대화시켜 주는 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만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수반하는데, 기쁨과 창조력과 행복을 위한 기회가 크면 클수록 비극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과거에도 자주 있었지만 하트손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고통의 개념을 가지고 주장했기 때문에 다른 변신론과 근본적으로 상이했다. 존재의 비극은 스스로 알려지고 신적 생활에서 비극으로 느껴진다. 그의 주장은 이 항목의 앞에서 언급한 딜렘마의 힘이 피조물의 고통을 흥미 없이 보고 있는 신의 사상과 전능의 개념의 수용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는 둘다 배척했다.

 

 

인식론 [영] epistemology [독] Erkenntnislehre [불] pist mologie

희랍어 (지식)와 (말씀)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인간의 인식과 지식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수없이 많은 문제를 취급하는 철학의 한 분야가

되었다. 플라톤(주전 427년경-347년)이 처음으로 지식을 신념과 의견으로부터 구별한 이래 모든 참된 지식은 지성인들에 의해서 어떤 영원한 구조(형태)들의 이해력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철학자들은 지식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나는 안다"라고 말할 때 그 전제조건이 무었인지, 지식은 감각경험에서 유출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순수한 이성의 생성물인가, 아니면 이 두가지의 합성물인가를 추구했다. 현대에 와서 인식론은 과학적 지식과 과학과 수학의 수많은 언어에 몰두하고 있다. 과학의 "법칙들"은 무엇인가? 그 법칙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어느 정도 확실한가? 그것들은 "자연의 불변성"을 전제하는가? 수학과 기하학은 확실성을 가질 수 있고, 역사나 화학이나 생물학은 확실성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러한 광범위한 질문들은 또한 그것들과 관계되는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각 분야의 거의 모든 철학자들의 인식론적 질문과 대답은 신학에 긍정적이든지 혹은 부정적이든지 하여튼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신학은 서양의 철학과 항상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의 신학자들은 플라톤의 인식론을 크게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이다. "계시된" 지식과 "자연적" 지식의 문제는 초기부터 가장 큰 문제였고, 계속해서 가장 큰 신학적 체계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형태는 현대의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급진적으로 변화되었다.

만일 모든 지식이 전부 확인을 요구하고 과학이 확인된 원리를 사용한다고 가장 뛰어난 지식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어떤 의미의 지식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신학이 확인될 수 없다면 신학은 정교한 추측이나 신념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합리적 추측은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신학자들은 그들의 기업의 핵심을 찌르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다.

 

 

1) 헬라주의-플라톤 주의

바울이 속해있던 유대교는 디아스포라의 유대교로써 헬라적인 관심들과 표현양식들의 영향이 전체적으로 침투되어 있었다. 바울은 헬라주의적 기반에서 장성해서 히브리적 사상을 이루어 기독교적인 인간으로 변화했다. 바울의 교훈에는 분명히 헬라주의적인 근원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불트만도 바울이 헬라문화와 접촉하였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개념에 있어서 헬라사상의 개념을 거부한다. 니그렌에 의하면 신비가 플라톤 신비의 중심이다. 플라톤의 개념은 소유욕적 사랑,인간의 하나님께 향하는길,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다.

 

플라톤의 사상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기독교에 들어왔다. 그리고 기독교의 적인 사랑과 일치하지 못하였다.
바울이 당시 헬라철학의 주요 도시중의 하나인 다소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의 메세지에서 s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모든것을 배설물로 여겼기' 때문이다.(빌3:17-18) 즉 바울은 자기중심적인 헬라철학의 s를 버리고 이타적인 하나님 사랑인 를 강조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3:5에서 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그당시 교회에 좋지않은 영향을 끼쳤던 개념을 거부 한것이다.

이 는 소유욕적이 아니라 희생과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빌 2:6-8)이 아가페는 '십자가의 아가페'이다. 바울은 이런 아가페가 교회를

지배하는 원리가 되기를 원하였다.

 

 

1. 헬라어권에서의 제자(마떼테스; ; disciple) 개념마떼테스란 용어의 근본적인 의미와 활용상의 뜻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헬라어권에서의 사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헬라어 고전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개념들을 보여준다.

⑴ 일반적인 용례

먼저 기초적인 의미에서 마떼테스는 자신의 마음을 어떤 것에 두는 자를 가리킨다. 즉 배움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가 받는 교육이 어떤 지식이나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일이며, 이 목적을 위해 계획을 세워 부지런히 전진하는 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승이 없는 제자는 없는 셈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술적인 의미에서 마떼테스는 자기보다 우월한 지식을 소유한 자가 권위를 가지고 지시를 내리는 이와 직접적인 의존관계를 가진 자이며 이 관계는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해체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플루트 연주를 배우는 자나 전문의 밑에서 의사 수련을 하는 자, 수사학자나 소피스트(변론자; sophist) 또는 어떤 학파의 철학자 밑에서 수학하는

자를 가리킨다. 나아가 마떼테스는 시공을 초월하여 지적인 연관을 가진 자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크세노파네스(Xeno-phanes)가 말하였듯이 호머(Homer)는 모든 그리이스인의 스승이며 소크라테스는 호머의 찬양자를 이렇게 불렀다.

⑵ 생도와 제자의 구별

마떼테스의 일반적인 용례에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 단어의 기술적이며 논리적인 요소는 내적인 교제의 발전을 함축한다. 즉 이 단어가 언급되는 문장들은 단순히 한 숙련가의 지도 및에서 어떤 정보나 태도를 얻기 위한 목표에 대한 외적인 관련뿐 아니라, 한 개인이 지향하는 목표에서 발생하는 물질적인 교통도 수반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최초의 소피스트이자 학습료를 받기 위하여 마떼테스를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관계를 경시하고 회피하기 위해 자신을(디다스칼로스=선생)라고 부르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마떼테스라고 부르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마떼테스는 제자라기 보다는 생도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마찬가지 이유로 크세노폰은 마떼테스를 피하고 만따논테스( ; 학습자)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플라톤 철학

플라톤 (Platon)은 "사람의 삶의 내적 목표는 될 수 있는대로 신을 닮으려고 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신이란 정신적 영역을 지키는 존재이다. 이 정신적, 신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내적인 목적이다". 특히 그의 초월의 관념, 곧 경험적 현실을 초월한 그 무엇이 존재 한다는 사상은 플라톤적 전통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판이 되었다. 그는 본질적인 실재인 '이데아'(Idea), 곧 사물의 참된 본질에 관하여 말했다. 플라톤은 물질적인 세계는 본질적인 세계에 비해서 전혀 궁극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하여 현실 세계를 무가치하게 보는데, 이런 경향은 후기 플라톤 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또한 그의 초월 사상과 함께 영혼의 타락에 관한 사상을 들 수가 있는데, 영혼이란 본래 그것이 참여하고 있었던 본질적이고,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서 죄를 범함으로 떨어져 나와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어 땅위에 존재하게 되었으나, 마침내 영혼은 이 감옥에서 해방되어 물질적 세계를 단계적으로 초월해 간다는 사상이다. 여기서 자기 구원의 완성을 위한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신 중심적 명상과 신비적 금욕주의의 실천이 곧 그것이다.
영혼은 본래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 것이므로 불멸적이며, 비물질성, 단순성, 생명력, 영원한 이데아를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영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진리를 파악하여 정당하게 인간의 삶 전체를 인도하는 고차적인 이성적(rational) 요소와, 더 고상한 자리인 영혼적(spirited) 요소와, 육체적 욕망을 망라하는 욕구적 (appectitive) 요소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고대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철학이 종교적 태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종교 철학이 바로 신플라톤주의(Neo - Platonism)인데 이는 플라톤 사상이나, 스토아적인 사상이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상 따위를 서로 융합시킨 하나의 체계였다. 신플라톤주의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고전적 그리스도교 신학의 많은 형태, 특히 신, 세계혼에 관한 교설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중심적인 대표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 인데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절대적으로 초월해 있는 '하나'(One)이다. 그의 전 체계는 세계와 세계의 모든 형태가 존재의 궁극적 근거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생겨나는가를 기술한다. 마치 태양빛이 방사되듯이, 궁극적 근거로부터 맨 처음에 '누스'(nous)가 방사되어 나온다.

누스는 '정신'(Geist, Spirit)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이 둘째 원리이고 누스를 유출하는 존재의 근거가 첫째 원리가 된다. 그리고 세째 원리가 '혼'(psyche)이라고 불리는 삶의 원리이다. 모든 개체는 혼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개체적인 혼들은 모두 '세계혼'(the world - soul)안에 자신 들의 공통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혼은 바로 전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요, 운동의 원리요, 현실화의 원리인 것이다.
근원적인 하나(the one)에서 계층적 질서에 따라 누출된 누스(nous)와 혼(psyche)은 물질의 세계 곧 비존재의 세계로전락하는데 이렇게 떨어져 내려온 단계를 밟아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최고자(the one)에게로 고양된다. 혼은 황홀경에서 이 최고자와 다시 결합한다.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도교와 신비주의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비존재의 문제에 있어서도 플로티누스는 "비존재를 '메온'(me on) 곧 존재가 될 가능성을 갖는 물질이라고 불렀을 때, 근본적으로는 그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메온이란 절대적 비존재인 '우크온'(ouk on)이 아니고 상대적인 비존재이다. 그러나 메온은 존재를 가지지 않고, 존재를 가지는 것에 저항한다. 그 때문에 플로티누스는 메온을 도량이나, 한계나, 형식이 결여된 것, 순수한 박탈, 절대적인 결핍이라고 부른다.

악이란 우리의 신체적인 실존에 이러한 비존재가 현존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악이란 선의 힘의 결여이며, 존재의 힘의 부재이다 라고 한다." 그러면 이제 플라톤 철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어거스틴의 사상, 그중에서도 타락과 죄문제에 관하여 살펴보자. 어거스틴은 아담이 가지고 있던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뜻에서의 자유였다고 말한다. 아담의 의지는 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하게 된 것은 그의 피조물성 때문이라고 한다. 본성상 주인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스스로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 이것이 곧 교만인데 이러한 교만이 유혹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원죄의 실재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한사람 아담의 선택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 까닭은 모두가 그 사람에게서 죄를 물려 받았는데, 죄란 곧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처럼 아담의 반항의 결과로 우리의 본성은 몹시 결함이 생기고 손상되었는데 가장 명확한 타락의 징후는 인간 존재의 일반적인 비참 말고도 인간이 무지와 탐욕(concupiscence)과 죽음에 노예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사용한 탐욕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본래 소멸되어 버릴 물질적 사물에서 만족을 찾고자 하는 온갖 성향을 지칭하고 있다. 이런것 가운데서 가장 난폭하고, 지속적이고, 널리 퍼진 것은 그의 견해에 의하면 '성적욕구'(sexual appetite)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영혼을 제압하고 있는 몸의 타락은 최초의 죄를 가져오게 한 원인이 아니라 최초의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본다. 또한 타락하기 쉬운 육체가 영혼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죄된 영혼이 육체를 타락하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죄가 정신적인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곧 최고선, 존재자체에게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로 돌아서는 것이 죄이며, 그러기에 죄는 죄들(sins) 이라는 복수로서 말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죄의 개념은 도덕주의적인 것이 되고 말것이라고 틸리히는 말한다.

이처럼 플라톤 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구성하는데 그 발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틸리히 신학을 구성하는데 존재와 비존재 문제, 타락의 원인과 결과문제, 신비적인 문제등 신학 구석구석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수 있다.

 

< 신학과 과학 대립인가 공존인가? > 과학과 종교의 알력사
세계는 지금 초고속도로로 과학기술시대라는 슈러 하이웨이를 달리고 있다. 인간의 모든 생활이 과학기술의 제품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으며 인간의 생명도 과학기술에 의하여 좌우될 정도로 과학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지배하고 있다.
본래 종교는 인간의 생명의 안녕과 영생을 밝혀주고 보장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종교가 하는 일을 과학이 탈취해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는 마당에 기독교 상태에 놓여있는 마당에 기독교 신학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성서에는 과학적인 내용과 초과학적인 내용이 함께 담겨져 있다. 창세기의 기록이나 홍해의 도해사건이나 예수의 탄생과 부활사건이 초과학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도마의 주장인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매 내 손가락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요20:25)는 말은 바로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초과학적인 면에 더 중요성을 두었기 때문에 과학과의 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결코 반 과학적인 종교는 아니다. 오히려 과학 발전의 모체이기도 했다. 이번 심포지움을 통하여 그 점이 밝혀질 줄 믿는다. 먼저 종교와 과학의 알력사를 알아보고자 한다.

과학과 종교는 다같이 우주의 신비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고대에는 현재와 같이 종교와 과학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한쪽은 경험적 인식에 의존하고 다른 한쪽은 직관적 인식에 의존한다.
그러나 고대에 있어 이 두가지는 미분리 상태에서 인간을 이해했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나일강변의 문명,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변의 문

명, 인더스 강변의 문명, 그리고 황하강변의 문명은 순전히 경험적 인식에 의한 문명이 아니라 직관적 인식과의 합작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종교와 과학이 미분리 상태에서 그러한 위대한 문명이 발전되

었다.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

희랍인들은 철학을 발전시키기 전에 신화를 통하여 자연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자연을 인격화하고 신격화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현상의 배후에는 그것을 주관하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세계 기원을 처음 설명한 사람은 헤시오도스(HESIDOS,8세기)였다. 그에 의하면 태초에 대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땅이 생기고 에로스(생산력)가 생겨서 그 힘에 의하여 모든 신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고대 희랍인들은 신들이 자연계 뒤에 있는 불변의 존재로 믿었다. 서기 전 600년경에 이르러 많은 희랍의 지성인들은 세계의 원질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으로 생각했던 세계의 원동력을 600년 후부터는 그것을 어떤 물질적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소위 희랍의 자연철학자들이 나타나서 그 원질을 물(THALES),공기(ANAXIME-NES) 일신(一神,Xenopjanes),물(Herakleitos), 또는 로고스,지수풍화(地水風火,Empedokles),누스(理性,Anaxagoras), 그리고 가장 혁명적인 생각은 만물의 근저에 더 분할할 수 없는 불변의 원질로서 원자(原子,Atoma,Leukippos)등이라고 했다. 로이킷포스를 현대 원자론의 선구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에 관심을 가졌다. 인식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감각적 인식과 개념적 인식이다. 전자는 인식자의 감각의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참다운 인식이 되기 어렵다.그래서 플라톤은 개념적 인식의 방법을 중요시했다. 그리고 인식의 방법으로서는 귀납법적 방법 대신에 분류법(연연적)을 사용했다.

이러한 방밥으로 인식된 것을 그는 이데아(에이도스라고도 함) 라고 했다. 그 이데아가 모든 물체의 상주 불변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이데아의 최고자를 지고선이라고 했다. 곧 신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강하게 비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대신에 우시아(Ousia)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리고 그 실체는 현 실체와 유리되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데아론) 현 실체안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현 실체 안에 있는 실체를 형상(에이도스) 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존재는 두가지 요소 즉 질료(휼레.현 실체)와 형상의 상하관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하고 그 이상 더 상승할 수 없는 형상을 순수형상, 제일형상, 부동의 동자라고 불렀다. 유신론자들이 말하는 신과 같은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고대 희랍철학의 자연관과 신관을 간략하게 고찰해 보았으나 그들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을 이해할 때 그 배후의 신들이 존재 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으며 따라서 과학과 종교간의 대립이나 알력이 있거나 상호배타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터툴리아누스와 아구스티누스

아테네와 예루살렘과 무관계성을 말하므로써 이성주의와 인본주의와 기독교 복음과의 공존성을 부인한 터툴리아누스는 복음이 온 후에는 과학연구는 필요없다고 했다. 교회사가로 잘 알려진 유세비유스 (260-340)도 당시의 자연과학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감탄하는 대사에 대한 무지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별 소득이 없는 일에 노력하는 것을 경멸하는 뜻에서 우리는 그들이 대상으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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