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기도]祈 禱

중보 기도자란 무엇인가?

好學 2012. 1. 20. 20:59

중보 기도자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중보 기도자를 찾으시지만 이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당신의 가슴 아픈 선포의 말씀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사람이 없음을 보고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또한 에스겔을 통해서 주신 실망에 찬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대체로 신자들은 중보 기도라 하면 기도를 평소보다 좀 더 간절하게 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간절하게’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그것도 맞는 생각이다.

그러나 보통 평범한 기도에는 꼭 필요하지 않지만 중보 기도자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동화(同化, 하나 되는 것), 고통, 권위이다.


중보 기도자는 자기가 중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동화시킨다.

즉 그들과 같아지는 것이다.

중보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자기가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품으며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려면 바로 그 사람처럼 살아야만 한다.

또한 자신이 직접 고통을 겪어 보면서 그는 자기가 기도로 짐을 져 주고 있는 그 고난 받는 자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울부짖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 주셨다.

그분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셨으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셨다.

또한 그분은 많은 사람의 죄를 지셨으며 범죄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시는 거룩한 중보 기도자가 되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분은 최대한 우리와 같이 되셨다.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 와서 앉으신 것이다.

친히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모양을 입으심으로, 받으신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심으로, 우리와 똑같이 매사에 시험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심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죄인이 되심으로, 그분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중보 기도)하실 수 있는 지위를 얻으셨다.

 

이제 그분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 구원의 머리가 되사 그 온전하신 권세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또한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당신이 친히 겪으셨기에 온전히 이해하시며 기도하신다.

그분이 아버지께 드리는 이 기도는 능히 효험이 있어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동화는 중보 기도자의 제1법칙이다. 주님의 기도가 효험이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진정 우리의 대리자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유익을 모두 내버리시고 오직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가난만을 생각하셨다.

그리고 말 그대로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셨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중보 기도자가 계신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이 사역의 고통을 보게 된다.

그분, 즉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중보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중보 기도자이시다.

그분이 거처로 삼으신 신자들의 심령과 몸을 제외하고는, 그분의 짐을 맡아서 질 수 있는 심령은 하나도 없으며 그분의 고난과 사역의 통로가 될 수 있는 몸은 하나도 없다.

그들이 중보 기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참 중보 기도자이신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도록 나 자신을 내어 드린 만큼만,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일하시도록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은 삶의 모든 문제에 다 적용되는 중보 기도의 법칙이다.

즉 우리는 먼저 자신이 주님께 시험을 받아서 과연 기꺼이 자신을 내어 드리는 자로 인정받은 만큼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의 삶이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님 자신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과 똑같은 종류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은 당신이 택하신 그릇을 그런 중보자의 삶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있는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밑바닥까지 깨끗이 처리하셔야만 한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개인적인 야망,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인간적인 애정, 육신의 욕구들, 인생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 회심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안락이나 자기의 이익이나 자기 발전이나 자기와 교분이 있는 모임을 위해서살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십자가 아래 놓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론적인 죽음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히는 삶이 계속될 때 비로소 중보 기도는 시작된다.

내적인 부담감을 통하여, 그리고 외적인 순종에의 부르심을 통하여 성령은 당신께서 깨끗게 하신 통로 속에서 당신이 직접 당신의 삶을 살기 시작하신다.

그 삶은 잃어버린 바 된 세상을 향한 사랑과 희생의 삶이다. 리즈 하월즈의 삶이 그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그러한 삶들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모세를 보라. 이 젊은 중보 기도자는 스스로 왕궁을 버리고나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그들을 인도하며 ‘적막하고 황량한 광야’를 통과하는 그의 모습을 보라. 우상 숭배를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이제는 진멸을 눈앞에 두었을 때, 중보 기도자로서 모세가 그들을 대신하여 내놓은 것은 비단 몸뿐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영원한 영혼을 내놓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것은 그야말로 ‘대속의’ 부르짖음이었다.

 

사도 바울을 보라. 그의 몸은 성령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산 제물이 되었다. 나중에는 그도 자신의 불멸의 영혼까지 제단에 제물로 드리고 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장)”. 이것이 살아 있는 중보 기도자의 모습이다.

이사야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벌거벗은 채 맨발로’ 다녀야만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잘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호세아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남편 여호와께서 당신의 음란한 신부를 다시 취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창녀와 결혼해야만 했다.

예레미야는 포로 생활의 공포와 비극에 대하여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말아야만 했다.

에스겔은 ‘그 눈에 기뻐하는 것’인 아내가 죽었을 때에도 눈물을 흘려서는 안되었다.

이렇게 다 나열을 하자면 한이 없다.

웨슬리는 타락해 가는 영국을 위한 중재자였고, 부스(Booth)는 사회의 버려진 자들을 위한 중재자였으며,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을 위한 중재자였고, 스터드(Studd)는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세상을 위한 중재자였다.


성령은 중보 기도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탄식하시며 우리 속에서 세상을 위한 당신 자신의 희생의 삶을 사신다.

그러나 중보 기도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즉 성령은 당신의 충만한 은혜를 좇아 결국 중보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목표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동화와 고통을 알고 있는 중보 기도자는 동시에 권위도 알고 있다.

이것은 밀알의 수확의 법칙과도 같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중보 기도는 죄를 대속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역사는 오직 한 번뿐이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다. 중보 기도란 중보 기도자가 자신을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과 동화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유력한 자리를 확보하는 것을 뜻한다.

중보 기도자는 하나님을 움직인다. 심지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시게 할 수도 있다.

중보 기도자는 구하는 바를 반드시 얻는다. 아니면 성령께서 그를 통하여 구하는 바를 얻으신다.

 

단순한 기도의 전사란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되 그것이 반드시 자기를 통해서 응답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말한다.

또한 그는 기도가 응답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의무도 없다.

그러나 중보 기도자는 자기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는 결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 기도가 자신을 통하여 응답이 될 때까지 그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기도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단 중보 기도의 자리를 얻어 주님의 시험과 인정을 받은 중보 기도자는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축복들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만 하다면 언제고 그 축복을 갖다 쓸 수가 있는 것이다.

 

하월즈는 종종 ‘중보 기도가 가져다주는 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이것은 그가 삶의 많은 경험들을 통하여 얻은 분명한 진리이다.

첫째 중보 기도에는 값지불이 있다. 또한 온전한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내적인 씨름과 신음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의 말씀은 임하신다.’

연약한 그릇이 성령의 권세로 옷을 입고 구원의 말을 선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큰 일들’이 일어난다.

그뿐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새로운 자리를 얻게 되고 또 지키게 된다.

 

하월즈는 조지 뮬러 목사의 표현을 빌어 그것을 믿음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믿음의 은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믿음의 선물’을 받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하는 기도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주실 것을 소망하는 기도이다.

 과연 그분이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기뻐한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 기도해도 그와 똑같은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나 권세가 없다.

이것이 믿음의 선물의 개념이다. 그와는 달리, 어느 특정 영역에 대한 중보 기도의 자리를 얻게 된 중보 기도자가 있다면 그는 ‘믿음의 은혜’의 차원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차원으로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중보 기도가 가져다주는 자리이다.

 

하월즈는 조지 뮬러의 체험을 인용했다. 뮬러 목사는 병을 고치는 중보 기도의 자리는 얻은 일이 없다.

그러나 딱 한 번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도한 사람의 병을 낫게 해주셨다.

다른 때 다른 병자를 위해서 기도했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그러나 뮬러 목사는 이것은 기도의 실패가 아니라 자기에게 병을 고치는 중보 기도의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맨 처음 기도가 응답되어 병이 나았던 것은 단지 ‘믿음의 선물’이었고, 그것이 반드시 되풀이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얻은 중보 기도의 자리는 고아들을 위한 중보 기도의 자리였다.

그는 언제나 고아들을 위하여 앞장서서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공급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책임지고 그의 필요를 언제나 채워 주셨다.

그에게 그분의 창고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으며, 그는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원하는 대로 갖다 쓸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독일의 블룸하르트(Blummhardt) 목사는 병 든 자를 위한 중보 기도의 자리를 받은 사람이었다.

처음 악령과 싸울 때에는 18개월도 넘는 기간을 기도와 금식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기도했고 드디어 하나님은 문을 열어 주셨다.

첫 번 싸움에서 최종 승리를 얻은 후 그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자주자주 아주 쉽게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의 편지들이 줄을 이었는데, 그는 편지를 한 번만 딱 보고서도 그 사람이 나을 것인지 낫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대번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병든 자들의 아픔이 곧 자신의 고통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처럼 그들을 위해서 간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중보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