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自由/박장대소拍掌大笑

'폼생폼사' 장인어른과의 반나절 데이트

好學 2011. 10. 6. 21:08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폼생폼사' 장인어른과의 반나절 데이트

 
 
  김 과장이 월요일 아침부터 대학병원 안과 대기실에 앉아 있는 건 순전히 장인(丈人) 때문이다. 상반기 회계 결산하느라 주말까지 날밤을 새운 뒤 얻은 월차휴가였다. 할 수만 있다면 종일 도마뱀처럼 천장에라도 달라붙어 잠만 자면 좋으련만, 딱딱한 병원 의자에서 하품을 해대고 있자니 살짝 울분이 솟았다.

 

일이 이렇게 된 건 고집불통, 성미 급한 장인의 백내장 수술 부작용 탓이었다. "눈알 살짝 째는 게 수술 축에나 들더냐"고 큰소리칠 때부터 알아봤다며 아내는 울상을 지었다.

사색이 되어 수술실을 나서는 다른 노인들과는 딴판이었다고 했다. 해병대 출신으로 매사 폼에 죽고 폼에 사는 장인은, 수술한 눈에 간호사가 막 붙여준 안대를 홱 떼어 던지고는 군대 동기들과 약주 한잔 해야 한다며 그 길로 내뺐다고 했다.

머리는 물론, 최소 2주일간 세수도 하면 안된다고 아내가 통사정을 했지만, 장인은 듣지 않았다.

수술한 눈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 아프다며 장인이 전화를 걸어온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맞벌이 아내는 "미안하지만 당신이 마침 월차이니 아버지 모시고 병원 좀 다녀와줘" 했고, "혼자 가시면 안 돼?" 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날벼락이 떨어졌다.

"장인은 부모 아냐? 며느리는 시부모 병수발을 당연지사로 아는데 사위는 왜 장인장모라면 소 닭 보듯 하는 건데?" 지난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시어머니 간병에 여름휴가를 헌납한 아내의 일리 있는 외침이었다. 딸만 셋인 집안에 막내 사위로 들어간 운명이기도 했다.

 

장인 박봉수는 1945년 해방둥이다. 서류상으로는 충청도 태생이나 실제 태어난 곳은 만주벌판이라고, 장인은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돈 벌러 간 장인의 부친이 돌아오지 않자 억척 모친은 만주땅까지 찾아갔고, 극적으로 상봉한 남편과 만리장성을 쌓아 '순풍' 낳아온 떡두꺼비 아들이 장인이었다.

동네 점쟁이는, 대륙의 기(氣)를 받고 태어나 못해도 군수까지는 한다고 장담했지만, 장인의 출세는 읍내 시장통에서 포목점을 하는 것으로, 로타리클럽과 무슨 통일위원회 명예회원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허구한 날 지역구 국회의원들 꽁무니를 쫓아다녔지만, 군(郡)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포목점이 거덜나면서 사실상 정치 입문을 포기했다.

그래도 명절에 내려가면 '대중이' '영삼이'로 시작해 정치 얘기만 늘어놓는 장인을 사위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장인 또한 박근혜가 한나라당 전(前) 대표인지 현(現) 대표인지조차 헷갈리는 사위들이 못마땅했다.

"장부가 정치를 모르고 어찌 인생을 살았다 하누." 한번은 큰사위가 승진 스트레스로 조울증을 호소했다가 된통 무안을 당했다. "군대에서 제대로 안 맞아서 그래. 정신력이 약해 빠져서 그래." 보신주의자에 건강식품만 골라먹는 둘째 사위는 장인의 주적(主敵)이었다.

"짜다고 안 먹고, 맵다고 안 먹고, 살찐다고 안 먹는 것들이 인도 여행 갔다가 소에 치여서 다리가 부러지고 그러지. 날 봐. 말술에 골초여도 암(癌) 같은 거 안 걸리잖아?" 장인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장모뿐이었다. "대신 당신은 주변 사람덜을 암 걸리게 하잖어유."

 

입이 보살이라더니, 갑자기 병석에 누운 장모가 손쓸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나자 장인의 등등했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자기 아버지를 한국 가부장(家父長)의 전형이라며 투덜대던 아내가 혼자된 장인을 끔찍이 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공중목욕탕 갈 때 아버지가 무지 안돼 보였지. 딸들이 엄마따라 조르르 여탕 들어가면, 아버진 혼자 남탕 갔다가 30분 만에 나와서는 담배 피우며 우릴 기다리셨지. 날더러 '네가 고추만 달고 나왔어도 내가 이리 외롭진 않을 텐데' 하시는 소리가 그리도 듣기 싫더니…."

안과 대기실에서 장인은 말씀이 없으셨다. "눈은 좀 어떠세요?" "…." "종합병원은 이게 나빠요. 환자는 잔뜩 받아놓고 세월아 네월아 줄만 세우고 있으니." "…." "수술비보다 검사비가 더 비싸다고 아영 에미가 거품을 물더라고요." "…."

1시간쯤 기다린 뒤 장인은 새파랗게 젊은 의사에게 불려가 된통 혼이 나고 새로 눈을 소독한 뒤 지난번 것보다 세 배는 두꺼운 안대를 하고 나타났다. 느린 걸음으로 병원을 나서는 장인의 뒷모습에, 오로지 출세를 향해 내달렸고, 그래서 좌절도 깊은 그 세대 남성들의 고독이 묻어났다.

약국의 처방을 기다리는데 장인이 무거운 침묵을 깬다. "세상이 자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너무 서러워 말게. 출세? 끽해야 대통령이지. 뭘 하든 욕만 먹는 대통령…. 파랑새는 거기 있는 게 아니더라고." 장인의 눈이 회복되면 엊그제 새로 생긴 사우나부터 모시고 가야겠다고 김 과장은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