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사람)인생 이야기

독약 같은 아름다움의 상징, 클레오파트라.

好學 2011. 9. 26. 20:49

 
    독약 같은 아름다움의 상징, 클레오파트라.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 로마 공화정 말기의 위대한 두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 우스를 죽음으로 이끈 희대의 "팜 파탈" 2000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전기 작가이자 뉴욕타임스의 객원 칼럼니스트인 스테이시 시프는 ‘클레오파트라가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남성을 유혹한 미인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기 위해 탁월한 선택을 거듭했던 정치가는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이를 풀기 위해 사료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한 "클레오파트라: 어느 인생(Cleopatra: A Life)"은 이런 그의 노력이 낳은 결과물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당대의 영웅을 차례로 홀리고 비극적인 운명에 몰아 넣을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부터 그녀는 요부로서의 이미지가 확고 해진다. 그러나 사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이를 부강하게 만드는데 한평생을 고심하며 보낸 정치가이자 지략 가였다. 물론 그녀 인생에서 만난 두 명의 로마 영웅들은 그녀에게 매우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그녀 또한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7세, 이 총명한 이집트의 여왕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의 나라뿐이었다.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평생 고심한 총명한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69년,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인들에게 자주 애용된 이름이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는데 이들의 기원은 마케도니아에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스스로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그를 파라오로 인정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약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통치 당시 이집트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였고 왕가는 이집트의 전통과 함께 그리스의 문화도 유지해가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사후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고 함께 왕위에 올랐다. 이집트 왕실은 라지드법으로 근친혼을 법으로 정해, 왕실의 피가 다른 피와 섞이는 것을 막고 있었다. 즉위 당시 클레오파트라 7세의 나이는 18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10세였다. 처음에는 성년에 가까운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집트의 정치를 모두 관장하다 시피 하였다. 당시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와 이집트문명이 혼재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워가고 있었으며 세계의 도서관이라고 불리는 방대한 자료를 가진 왕실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 도서관에서 어려서부터 방대한 양의 독서를 통해 당대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다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보여 무역도시 알렉산드리아를 통교하던 수많은 나라의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하여 이집트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클레오파트라 7세는 강성한 로마에 맞서 자신의 왕가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외교술과 지략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계획적인 카이사르와의 만남 외부적으로 가까스로 이집트를 지켜내 가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내부에서부터 위기가 커가기 시작했다.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성장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잠시 몸을 피한 클레오파트라 7세는 더 큰 위협이자 기회를 만나게 된다. 정적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까지 내려온 로마의 장군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죽음으로 내 몬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대해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의 왕좌와 이집트의 운명을 위해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의 의중을 떠보아야만 했다.
    카이사르와의 만남



    내부적으로 정치적 궁지에 몰리고 외부적으로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신의 지혜와 미모를 이용해 난국을 타개해 갈 것을 결심한다. 일설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방바닥에 까는 깔개로 몸을 감아 카이사르의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깔개가 펼쳐지고 나타난 미모의 이집트 여왕을 호색한이었던 카이사르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클레오파트라 7세의 나이 21세였고 카이사르는 52세였다. 카이사르와 다소 극적인 만남 이후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의 독립과 왕좌를 보장받는 대신에 카이사르의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무찌를 군대를 얻는다. 결과적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의 군대로 내부의 적들을 일소하고 이집트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 받게 된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카이사리온(카이사르의 아들 이라는 뜻)을 낳고 카이사르가 로마에 개선할 때 함께 빈객으로 따라 갔다. 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소국이었던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때 연인 카이사르와 아들 카이사리온을 통해 새로운 야망을 꿈꾸게 되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가 닦아놓은 발판을 딛고 아들 카이사리온이 로마의 황제가 되어 이집트와 로마 전체를 통치하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와의 사랑 그러나 그녀의 야망은 카이사르의 죽음과 함께 부질없는 희망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카이사르가 로마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후 공개된 그의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뿐만 아니라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리라고 확신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모독과 같은 것이었다.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 7세는 철저히 정부였을 뿐, 그 어떤 법적인 보장이나 배려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 사후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로마에서 쓰디쓴 배신감을 안고 아들과 함께 이집트로 귀국하였다. 로마의 권력이 누구에게 가게 될지 한치 앞도 예상치 못하는 상황 속에서 이집트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안위는 다시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카이사르 사후 로마는 안토니우스파와 옥타비아누스파로 나뉘어 졌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이겨야만 끝날 갈등의 시기였다. 두 세력의 다툼을 지켜보던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신의 나라 이집트를 위해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도 이기는 쪽의 편을 들고 그 대신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당시에는 비록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던 옥타비아누스보다 오랫동안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며 그와 함께 동고동락을 한 안토니우스가 더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를 유혹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꺼이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불러들이고 그를 유혹했다. 처음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멀리 하던 안토니우스도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나라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매력에 끌린 클레오파트라 7세도 곧 이어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카이사르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안토니우스에게 결혼을 요구했다. 영웅의 정부라는 자리는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정당한 결혼을 통해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의 후계권을 보장받았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고 기꺼이 클레오파트라 7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로마와 이집트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주인을 꿈꾸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와의 만남



    악티움 해전의 패배와 자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1인자 자리를 둔 마지막 한판 승부는 악티움 해전에서 결정이 났다.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이집트의 운명까지 쥐고 있던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비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악티움에서 후퇴하여 이집트까지 쫓겨 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 안겨 최후를 맞이하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 죽음과 이집트로 진격해 들어온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린다. 대제국을 꿈꾸던 야망도, 가까스로 지켜온 이집트의 독립도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을 깨달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살을 선택한다.
    맹독성을 시험하는 장면



    그것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개선행렬에 포로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모욕을 당하지 않을 마지막 방법이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옷으로 성장하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다음 꽃 속에 누운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일부러 놓아둔 독뱀에 가슴을 물려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끝이 나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아름다움이 전부인 여성은 아니었다. 엄청난 노력가 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고, 개인보다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호쾌한 위정자이기도 하였다.
    잠자는듯한 클레오파트라





    ~흐르는 곡은~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Gli aranci olezz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