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사람)인생 이야기

[사람이야기]FIFA 17세 이하 여자월드컵 우승 주역 여민지

好學 2011. 9. 1. 20:51

[사람이야기]FIFA 17세 이하 여자월드컵 우승 주역 여민지

 

 

2일 경남 함안 대산고등학교에서 만난 여민지 선수. 현재 고교 2년생인 그는 귀국하자마자 바로 전국체전 훈련에 돌입했다.이날 운동장에서는 토요일 늦은 오후까지 그와 이정은 선수(한일 결승전 선제골의 주인공)의 사인을 받기 위해 이웃 초등생,중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안

 

경남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40여 분, 함안대산고등학교에 내리니 해가 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5시간이 걸린 먼 길이었다. 논둑길을 걸으며 ‘이런 오지에서 어떻게 세계 최고 선수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문으로 들어서자 바뀌었다.

붉은 트랙이 깔린 넓은 인조잔디 구장은 토요일 늦은 오후인데도 축구 소녀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그중에 한국 축구 사상 처음 국제축구연맹(FIFA) 주최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17세 이하(U-17)팀 주역이자 대회 우승컵, 골든볼(최우수선수상), 골든부트(득점왕) 등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여민지 선수가 있었다.

여 선수는 지난달 28일 귀국하자마자 각종 행사를 마치고 30일 금의환향한 뒤 곧장 전국체전(6일 개막) 훈련에 돌입했다. 여 선수 어머니와 약속을 하고 오긴 했지만 막상 여 선수를 만나긴 쉽지 않았다. 이날 훈련 뒤에도 회식, 행사 참석 등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인터뷰는 오후 9시가 되어서야 서울행, 여 선수 아버지가 모는 승용차 안에서 이뤄졌다(여 선수는 지소연 선수와 함께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FC 서울과 인천 유나이티드 경기 시축행사에 참여했다).

결승전땐 허벅지 끊어질 듯 아파 빼줬으면 했지만 이 악물고 뛰어

실제 만난 여 선수는 그라운드의 사나운 공격수의 모습과는 달리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도 웃는다는 천진한 10대 소녀였다. 그러나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목소리에 어른스러움이 묻어났다. 대화를 나눌수록 목소리보다 생각이 더 어른스러웠다.

―일본과의 결승전 때 아쉬움이 많았다고 했는데….

“뛸 때마다, 볼을 찰 때마다 허벅지 근육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빼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악물고 뛰었다. ‘나라’를 위해서.”

공주, 왕자로 자라 자기밖에 모른다는 10대로부터 ‘나라’라는 단어를 들으니 대견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전에 읽었던 책에 ‘인간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정신을 집중하면 스위치를 오프(off)에서 온(on)으로 바꿀 수 있다’는 대목이 있었다. 힘들 때 그 구절을 떠올리면서 뛰었다. 정신이 강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게 이번 대회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다.”

“여 선수를 포함해 17세 소녀들을 그렇게 강한 정신력으로 이끈 힘이 뭐냐”고 물었더니 뜻밖에 ‘오기’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릴 때 어른들이 ‘무슨 운동 하느냐’고 물을 때 ‘축구 한다’고 하면 모든 분이 ‘여자가 무슨 축구냐’고 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 경험을 했다. 또 모두 남자축구에만 관심이 있으니 그쪽만 지원해 속이 많이 상했다. 이참에 우리도 뭔가 보여주자, 먼저 세계를 놀라게 하자 이런 생각들을 했다. 잘하면 훈련복 유니폼도 새것으로 바꿔 줄 거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거고(웃음).”

―남자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은 없었나.

“한 번도 없었다. 여자와 남자는 엄연히 다른데 사람들은 왜 여자를 남자랑 똑같이 비교할까. 오히려 여자라서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남자야 워낙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 주목받기 어렵다. 여자는 조금만 잘해도 눈에 띈다.”

잠자리 들때도 골넣는 모습 상상 남자 부러웠던 적은 한번도 없어

여 선수는 “남자와 여자는 비교 대상이 아닌 것 같다. 각자 잘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르니까 즐겁게 같이 하면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자축구의 매력은 뭔가.

“남자 선수들 중에 잘생긴 사람 보는 재미가 있듯이 여자들은 예쁜 선수들 보는 장점이 우선 있고(웃음), 남자축구보다 덜 완벽하고 어설픈 대목이 오히려 색다른 재미를 줄 수도 있는 것 같다. 여자들이 남자에 비해 부드러운 경기를 하는 것도 좋다. 거칠 때도 있지만 여자다 보니 마음이 여려 반칙도 적고. 모든 걸 남자랑 똑같이 하란 법은 없잖은가.”

옆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 임수영 씨(43)가 “한 살 위 오빠가 하나 있는데 딸이라서 봐주거나 더 야단을 치지 않고 똑같이 키웠다”고 부연했다. 여 선수는 한마디로 남녀평등교육의 산물인 셈. 결혼 후에도 직장을 다니며 일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는 임 씨 역시 “딸한테 무슨 축구를 시키느냐”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밀고 나갔다. 17세 한국 소녀대표팀이 낸 결실은 이처럼 당찬 엄마들과 딸들의 합작품이 아니었을까.

―여 선수를 기다리면서 그 유명한 ‘여민지 일기’를 보았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축구를 시작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하루도 안 빼먹고 썼다. 그날 훈련한 것, 반성할 것, 앞으로 고칠 것, 배울 것을 생각하며 썼다.”

―만 14세의 나이로 19세 이하 국가대표로 발탁됐던 2007년 일기엔 ‘너무 부담되고 눈치 보인다. 일단 됐으니 자만하지 말고 더 노력하자’고 썼다. 이 밖에도 ‘칭찬에는 긴장하고 비난은 기쁘게’ ‘인생이란 원래 불공평하다. 불평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등등 어른도 새겨들어야 할 구절이 많던데….

“그때그때 내 생각도 적고 책에서 인용한 것도 많다. 중학교 때부터 소설책보다 성공학 책을 많이 봤다. ‘이기는 습관’ ‘사람을 얻는 기술’, 다른 사람들의 성공담이 담긴 책들 말이다. 홍명보 박지성 김연아 선수 자서전도 다 봤다.”

실제 그의 일기에는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사자가 잠에서 깬다. 사자는 가젤을 앞지르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해 달린다. 네가 사자이든 가젤이든 마찬가지다. 해가 떠오르면 달려야 한다’(2006년 12월)거나 ‘공을 차다가 잠이 오면 두 사람을 생각하라. 너의 아버지와 라이벌을…. 훈련하다 포기하고 싶으면 소중한 친구들과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라…. 나를 가능케 하는 건 생각이다’(2009년 9월)처럼 ‘치열한 노력의 흔적’이 담겨 있다.

―왜 성공하고 싶은가.

“대충대충은 싫다. 지고는 못 산다(웃음).”

그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자기가 다양한 모습으로 골 넣는 모습을 상상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고 한다.

―여 선수에게 축구는 무엇인가.

“정말 재미있고 즐겁다. 축구를 통해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다. 축구 없는 인생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헝그리(hungry) 세대’를 넘은 ‘엔조이(enjoy) 세대’답게 세계무대를 대하는 눈도 달랐다.

―키 큰 외국 선수들 보면 주눅 들지 않던가.

“서양 애들이 머리통 하나 더 크다고 우리를 좀 무시하기는 한다. 1월에 미국에 전지훈련 갔는데 수비수 한 명이 너무 ‘싸가지’가 없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팔꿈치로 툭 치고 지나가고. 속상하다는 생각보다는 ‘쟤는 사람이 덜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번 FIFA 대회 때에도 독일 애들이 노골적으로 우리를 무시하는 게 느껴졌다. 절대 지고 싶지 않았는데…(한국은 독일에 0-3으로 패했다). 결국 북한한테 지고 새벽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꼬시던지(고소하던지).”

여 선수는 “이번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팀은 매너도 좋고 실력도 좋았던 일본팀이었다”면서 “서양 애들은 키는 크지만 순발력이 부족하다. 우리는 그들에 비해 빠르기 때문에 스피드를 이용해 골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했다.

매사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중3 때인 2008년 무릎인대 파열로 10개월을 쉬어야 했던 것. “병원을 오가며 볼이 차고 싶어 죽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라운드에 다시 서기 위해 재활에 몰두했다. 당시 그녀의 일기에는 꼼꼼한 재활 메모는 물론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며 마음을 다잡는 글귀가 많다.

어린 나이에 세계를 제패했다고들 하지만 그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한국 여자축구 역시 마찬가지다. 등록선수도 태부족이고 초중고교나 대학, 실업팀 수도 독일 일본과 비교가 안 된다. ‘어린 영웅’들이 좌절하거나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2의 지소연, 여민지 발굴을 위한 종합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체계적인 지도와 과학적인 리더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여 선수는 “외국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도 말이 안 통하니 답답했다. 앞으로 영어 공부에 주력하고 싶다”며 “기회가 된다면 미국이든 독일이든 해외 유학을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U-17 여자월드컵 대표팀이 귀국하던 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여자축구 대학팀, 실업팀을 더 만들어 선수들이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을 확실히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소녀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는 일은 이제 어른들의 몫이다.

오전 1시 반, 서울에 도착하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피로해소제가 담긴 링거 주머니 바늘을 팔에 꽂고 좁은 차 안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여 선수가 깨어나 밝은 미소로 웃으며 인사했다. 맑았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듯 어린 나이에 큰 성취를 이룬 여 선수의 앞길도 변화무쌍할 것이다. 그를 포함한 축구 소녀들의 꿈이 오래 이어지기를, 그들에 대한 관심과 환호 역시 오래 이어지기를…. 기자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