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기도]祈 禱

언약의 기도

好學 2011. 8. 1. 21:24

언약의 기도

  언약의 기도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갈망하는 마음속 깊은 외침이다. 

언약의 기도의 제단 앞에서 우리는 확고부동한 헌신을 맹세하고, 굳은 의지로 결단하고,

거룩한 순종을 약속한다.

 

약속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헌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거의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도 그 이유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헌신에도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헌신과 훈련과 고정된 습관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그리스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는 입에 자갈을 물고 노호하는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훈련을 겪었기 때문에 위해한 웅변가가 될수 있었다. 

조지 프리드리히 헨델은 작곡에 정진했기 때문에 ‘메시아’와 같은 대작을 작곡할 수 있었다.

플레너리 오코너는 강도 높은 개인 훈련을 통해 몸을 쇠약학 하는 질병을 이겨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자유는 훈련과 헌신의 산물이다. 

우리는 또한 헌신을 하게 되면 우리의 생활에서 자발성과 기쁨을 모두 빼앗기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우리는 의무적으로 기도하기보다 기도하고 싶은 때 하기를 원한다. 

헌신을 하게 되면, 기도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것이 되어

버릴까봐 걱정한다.

의무적인 일도 성령의 힘으로 할 때 그것은 커다란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

사실 의무는 드 꼬싸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대로 ‘지금 이 순간이 성례’이다.

우리가 헌신을 회피하는 데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약속을 완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서 나는 격려의 말을 하고 싶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도 자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맹세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의 본뜻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계신다. 

때때로 당신은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마음속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당신의 노력을 기뻐하신다. 마음속의 언약과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얼마나 원하는지 그 수준에 따라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소망을 일으키시는데, 결국 우리의 마음속에 그 열망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생명을 주는 언약

언약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이다. 언약의 요점은 헌신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이 세상에 복 주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갈보리의 희생은 하나님 편에서의 헌신이다.  그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다. 

헌신은 헌신을 요구한다.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그 대가가 마땅히 순종의 삶을 올려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거룩한 순종의 언약

  순종의 문제는 하나님은 일이고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에게 순종할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 한가지도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주시는데 만일 그 소원이 미리 마음속에서 끓어오르지 않았다면

당신을 이 글을 읽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면 반드시 순종할 힘까지도 주신다.

더구나 순종은 언뜻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영원한 사라의 하나님이 침투하고 강권하며, 초청하고 설득하는 부르심에 대해

순종이라는 유일한 방법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우리에게 달려 오신다. 

하나님은 사정없이 우리 뒤를 추적하는 하늘의 사냥개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꼐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굶주림을 주시는데 그것은

순전하고 참된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가 아니고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때때로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서 마음속 깊이 감동을 받는다. 

 

무디는 언젠가 뉴욕 거리를 지나가다가 엄청난 하나님 사랑에 실제로 압도되어 혼자 있을 만한 처소를 얻기 위하여 친구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두 시간 동안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물결이 자기를 향해 계속해서 밀어닥침을 경험하였다. 때로 우리는 불꽃같이 환한 환상을 보고 영원히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맹약하는 경우도 있다. 

 

블레즈 파스칼 놀라운 영적 체험의 순간을 단 한마디 ‘불!’이라는 말로 묘사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를 체험하고서는 설 때나 걸을 때나 앉을 때나 누을 때나 언제든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찬양하며 복종하며 경이와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우리는 영혼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경험을 통하여 영원히 변화된다.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민감하게 움직이게 된다.  결코 일상적인 선행만 가지고 충분하지

않으며, 어중간한 임시 변통의 수단으로는 마음의 욕구를 채울 수가 없다. 

공의로우시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기준, 즉 온전한 순종에 이르기까지 그분께 사로잡혀야

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프라이 기도를 드려보자.

오 하나님! 주님을 섬기는 일에 홀로, 그리고 더욱더 단순하고 순수하게 복종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만일 우리가 넘어지면 분명 넘어질 테지만 우리는 일어나 다시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순종의 습관을 형성해 가고 있다.  모든 습관은 수많은 실패와 오류와 잘못된 출발로

점철되어 있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처음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가슴에 절대적인 순결을 원하는 불타는 열망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깨닫게 된다. 

A.W.토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 그런 마음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시간의 언약

  언약의 기도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리차드 백스터는 그의 저서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에서 우리에게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 적합한 장소, 그리고 가장 적절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라고 권면한다.

시간의 언약이란 규칙적인 기도 생활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실현 불가능한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시골 사람들은 생활 주기가 하루 단위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고,

도시 사람들은 생활주기가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시골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다. 

예를 들면 소젖도 짜야 하고 닭모이도 주어야 한다. 

따라서 매일의 기도 훈련이 시골에서는 효과가 있다. 

반대로 도시에서는 모든 일이 금요일까지 집중되어 있고 주말에는 휠씬 더 자유 재량권이 있다. 

그래서 “금요일이어서 하나님께 감사해요”라는 말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기도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매일매일 기도 시간을 따로 내지 못하여 죄의식을 갖는 대신에, 예를 들면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시간을 내어 더욱 넓은 기도를 하고 경건서적을 읽는 것이 낫다. 

유아를 둔 부모들에게 젖먹이의 요구는 생각보다 휠씬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환상적인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 기도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 아이로 인해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더 실제적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아이와는 노는 시간이 기도 시간이 되게 먹이는 동안에 기도할 수도 있다. 

이것은 특히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해당된다.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라.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더 규칙적인 기도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한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에 대해서 단도해야 한다. 

예를 들면,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라는 마로 기도하지 않는 삶을 위장해서는

안된다. 

존달림플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적절히 묘사했다. 

우리가 특정한 때, 특정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구체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하기를 배울 수 없다.”

 

장소의 언약

  시간의 언약이 계속성을 부여한다면 장소의 언약은 안정성을 보장한다.

장소의 언약은 우리에게 집중의 은사를 준다.

그저 일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면 되고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으면 된다.

장소의 언약에 공동체의 헌신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하나의 은사이다. 

장소의 언약을 통해서 우리는 늘 공동체를 찾아내고 언제든지 그것의 출현을 기뻐하며

그 발전을 위해 늘 자양분을 공급하게 된다.

 

마음의 준비를 위한 언약

  아무런 제약 없이 가장 깊은 감정까지도 자연스럽게 나타내며 하나님을 만나 보라고 했다. 

우리는 달릴 수도 있고 뛸 수도 있으며, 걸을 수도 있고 설 수도  있으며, 무릎을 꿇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다. 

경외와 존경으로 눈을 감고 머릴 숙일 수도 있고,  찬양과 헌신하는 마음으로 눈을 들어

바라 볼 수도 있다. 

손을 들 수도 있고 박수를 칠 수도 있으며 깍지를 낄 수도 있다. 

울거나 웃을 수도 있고, 노래하거나 소리지를 수도 있다. 

우리는 경이와 찬양으로 조용히 무릎을 꿇을 수도 있다.

우리는 또한 ‘거룩한 기대감’을 키움으로써 마음을 준비할 수 있다. 

마음의 눈을 가지고 바깥뜰과 안뜰을 드나든다. 

마음의 베일이 벗겨지고 우리는 지성소로 들어간다. 

마침내 마음속이 기대감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된다.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기 위한 마음을 준비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혀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비뚤어진 마음과 가득한 말로 달려 나오는 것보다 아무 말 없이 침묵 속에서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옳은 일인가!. 

당신만의 작은 성소를 준비하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 

“이 천상의 대화에 익숙한 사람들만큼 기쁘고 복된 생활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과의 밀회

  밀회의 기도란 하나님과 특별한 데이트를 하는 것이다. 

그 기도는 우리를 마음의 본향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편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으로서 우리가 기대와 기쁨으로 그 앞에 규칙적으로

나아 오기를 기다리신다. 

이 규칙적인 만남의 시간을 지키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기쁘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면 즐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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