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그리스도의교회 초기 인물 자료 - 사회개혁가로써(As Social Reformer)캠벨 12

好學 2011. 7. 16. 17:24

 

사회개혁가로써(As Social Reformer)

 

알렉산더 캠벨은 사회개혁을 교회개혁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실제로 그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필수적인 선결조건으로 신약성경의 기초 위에서 교회들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교회를 통해서만이 사회불의의 뿌리를 뽑는 것이 가능할 것이며, 그 일의 성공은 연합된 교회를 이루기까지 지연될 것이라고 믿었다. 요약하면, 연합된 교회는 신약성경 기독교에로 환원할 때 가능할 것이고, 연합된 교회는 사회질서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나 캠벨은 그러한 변화가 오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연합된 교회가 언제 이루어질지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이슈들 가운데서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금주, 사형, 공립학교, 노예 제도와 전쟁에 관해서 피력할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당대에 가장 첨예한 이슈들이었던 노예제도의 불의와 전쟁의 사악함에 대해서 가장 많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캠벨은 개인의 자유와 도덕적 선택이 침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주단체들의 문제와 술 판매금지에 관해서 처음에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캠벨은 입장을 바꿔 술 판매금지를 적극 후원하였다. 그는 오직 살인자에 한해서만 사형시키는 것이 주(州)에게 맡겨진 신성한 권위라고 믿었다. 그는 공립학교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후원자였다. 공립학교는 번영하는 국가를 만들고, 도덕적으로 강하고, 배움을 통해서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시민을 키워내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1840년대까지 많은 미국사람들은 노예제도에 관한 이슈가 국민의 삶에서 점점 더 불화를 일으키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주제가 너무 폭발적이어서 친구들과 가족들이 나뉘어졌고, 교회들이 찢어졌으며, 주요 교단들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다. 이런 긴장들과 더불어 무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위협이 있었다. 캠벨은 감정적으로 매우 민감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념들을 용감히 선포하였다.

캠벨은 그가 참석했던 1829년과 1849년 버지니아주 헌법제정의회 때에 그리고 켄터키주에 넓게 배포된 소책자에서 점진적인 노예해방 방안을 제안하였다. {밀레니얼 하빈저}지에서도 캠벨은 노예제도에 관한 주제로 여러 차례 사설과 평론을 실었다.

그의 저술들로 볼 때, 캠벨은 신약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도덕성을 동일시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는 이 문제를 놓고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한 끝에 구약에서나 신약성경에서도 노예제도를 직접적으로 단죄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캠벨 부자는 노예제도는 부도덕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그가 개인적으로 노예제도를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캠벨은 그리스도인들이 노예제도를 도덕적으로 나쁜 것으로 선언할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동시에 캠벨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노예들을 소유물이 아닌 동료 인간들로 다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실행된 노예제도가 심한 인권침해라고 선포하였다.

캠벨은 또한 노예제도가 미국인이 이해하고 있는 자유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게다가 그의 의견에 따르면 노예노동은 남부의 경제에도 이롭지 못한 것이었다. 캠벨은 자신의 금전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소유했거나 다루었던 모든 노예들을 풀어줌으로써 노예제도에 관한 확신들을 자신의 사생활에서 실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벨은 자신의 모범적인 행동을 따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점진적 노예해방 방안을 제안하였다.

기독교 공동체가 포용적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캠벨은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이 교회징계의 문제나 친교의 시금석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확고히 지켰다. 결국 캠벨은 그 유명한 사설에서 "노예제도는 견해의 문제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노예를 소유하고 안하고는 믿음의 본질이 아님을 밝혔다.

노예제도 문제로 긴장들이 고조되면서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들은 남과 북이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해결을 위해서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예측불허의 사태를 내다보면서 알렉산더 캠벨은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취하였다. 그는 멕시코 전쟁에 반대했었고, {밀레니얼 하빈저}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기사를 많이 실었다.

캠벨이 전쟁에 관한 입장을 충분히 밝힌 것은 멕시코 전쟁이 끝난 지 3개월이 된 1848년 5월 버지니아주(현재 웨스트버지니아주) 라이시엄(=문화회관), 휠링(Wheeling) 앞에서였다. 반전에 대한 그의 논쟁이 매우 힘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몇몇 지도자들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돌이킬 수 없이 말려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미주리주 출신 하원의원 조셉 B. 샤논(Joseph B. Shannon)은 1937년 11월 22일자 하원 의사록에 캠벨의 이 연설문이 기록되도록 하였다.

이 연설에서 캠벨은 전쟁은 비록 구약성경에서 허락되었고 또 실시되었지만, 신약성경의 문자와 정신 모두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금지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양심적으로 전쟁을 허락하거나 종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방어전쟁과 공격전쟁 사이에 구분이 있어야한다면서 전쟁을 합리화시키는 사람들을 캠벨은 궤변가들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는 전쟁이 정의를 세우는 수단일 수 없으며, 전쟁은 논쟁을 종식시키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결국 전쟁이 종식되는 것은 전쟁터에서가 아니라 평화회담장에서이므로, 평화회담은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비극적으로 잃고 나서 열릴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열려야한다고 믿었다. 캠벨은 오늘날의 국제연합이나 세계재판소가 하는 것과 비슷한 국제분쟁을 해결할
국제연맹과 세계재판소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알렉산더 캠벨은 진실로 타협을 모르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전쟁을 거부해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들이 함께 모여 앉아 그들의 난제들을 해결하도록 모든 노력과 모든 설득력을 사용해야 한다.

기독교 복음을 오늘날의 사회이슈들에 적용하려고 하는 제자들은 그들이 알렉산더 캠벨의 정신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서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발견한 것을, 그가 그것을 보았을 때, 자기 시대의 도덕과 정의에 관한 주요 이슈들에 과감히 적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