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시사 칼럼]

5일과 8일 사이는 ?

好學 2011. 5. 7. 21:40

5일과 8일 사이는 ?

 

 

# 난센스 퀴즈 하나. ‘1, 2, 3, 4, 5, 6, 7, 8’을 네 자로 줄이면? ‘일삼육팔’? 아니다! 그럼 정답은?… ‘영구(09) 없다!’ 좀 썰렁한가? 그럼 두 번째 퀴즈. 어린이날인 5월 5일과 어버이날인 8일 사이는? ‘6일과 7일’?… 아니다! 정답은 지금부터 풀어보자. 지난 5일 새벽 100개의 풍선을 밤새도록 불었다. 막내딸을 놀라게 또 즐겁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방송출연을 거의 하지 않던 동갑내기 가수 임재범이 딸을 위해 방송에 나와 감동 어린 열창을 한 것도 같은 마음이리라. 그의 딸과 마찬가지로 내 딸 역시 이제 초등학교 3학년! 2002년 11월생이니 만으론 아홉 살도 채 안 됐다. 길쭉한 풍선, 동그란 풍선, 하트 모양의 풍선, 빨간 풍선, 노란 풍선, 파란 풍선… 아이는 그 풍선 속에 파묻혀 즐거워했다. 나도 함께 뒹굴며 웃었다. 한 컷의 사진이 마음에 찍혔다.

 # 40년도 훨씬 더 지났건만 내게는 눈감으면 떠오르는 사진 속 장면이 하나 있다. 60년대 후반 유치원 다니던 시절 동구릉에 소풍 갔을 때 찍은 나와 어머니의 모습이다. 사진 속 어머니는 간신히 허리춤에 닿는 어린 아들을 뒤에서 감싸 안은 채 서 계셨다. 그때 어머니는 늦둥이 막내를 둔 40대 초반이었지만 여전히 고왔다. 그런 어머니가 일흔네 해 세상을 사신 후 돌아가신 지 이미 10년! 그새 막내였던 나는 이렇게 머리에 서리가 내렸고 다시 내 딸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인생의 순간들을 사진처럼 찍는다.

 # 인생은 그런 순간들을 모아놓은 사진집과 다름없다. 토목공학과 교수로 성균관대 부총장까지 지낸 전몽각 선생은 딸이 태어나서 시집갈 때까지의 26년 세월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았다. 근 반세기 전인 1964년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카메라에 담긴 한 아이의 성장과정은 실로 경이롭다.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던 갓난아이가 어느새 몸을 뒤척이며 엄마와 눈을 맞춘다. 그러곤 이내 엄마의 손길마저 뿌리치며 걷기 시작하고 엄마를 따라 시장에도 함께 간다. 엄마를 흉내 내 얼굴에 로션을 바를 만큼 커버린 딸은 어느새 단발머리 여학생이 돼 수예와 뜨개질도 익힌다. 거울 앞에서 교복 맵시를 내느라 여념이 없는 여고생 딸과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순간 거울에 비친 희끗해진 머리의 아버지… 마침내 한층 성숙한 숙녀가 된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식장으로 들어서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는 한결같이 딸의 순간순간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포착했던 것이다.

 # 딸이 시집간 후 그 허전한 마음을 메우려 26년간 찍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 인화해 낸 아버지 전몽각은 90년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란 부제가 붙은 사진집 『윤미네 집』을 딱 1000부만 찍었다. 그 사진집은 결혼 직후 남편을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오른 딸을 향한 아버지의 또 다른 응원이었다. 아버지 전몽각은 2006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랑의 카메라와 마음의 렌즈로 담아냈던 딸 윤미는 이제 열아홉 살 난 아들과 열다섯 난 딸의 엄마가 됐다.

 # 아이가 자라 다시 자기의 아이를 키우며 자기 아비와 어미의 처지와 입장이 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철이 들고 사람이 된다. 물론 어린 자식이 자라나 다시 그만 한 자식을 낳아 키우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세월은 쏜살같다. 40여 년 전 엄마의 치마폭에 감싸여 있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 자신의 딸을 위해 꿈을 담은 풍선을 만들듯이, 아버지의 카메라 렌즈에 담겼던 윤미가 자라 그 사진 속의 자기보다 더 큰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가 된 것처럼 그 세월은 긴 듯하나 실은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의 날인 5일과 어버이들의 날인 8일 사이에는 ‘순간’이 놓여 있다. 아마도 그 순간의 의미를 아는 것이 인생일 게다. 그 순간을 위해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의 사진을 찍고 있는가.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