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아브라함

好學 2011. 2. 18. 20:59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참으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의 기록부입니다.

그렇게 많은 믿음의 사람중에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가요?
지금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을 분석하여 보려고 합니다.

1. 4분의 1 믿음
아브라함의 초기 믿음은 4분의 1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나님 성격도 급하신 것인지 4가지 명령을 한꺼번에 하셨습니다.
1. 본토를 떠나라.
2. 친척을 떠나라.
3. 아비를 떠나라.
4.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렇게 4가지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본토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친척은 떠나지 않고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아버지도 모시고 떠났습니다. 지시하신 땅으로 가지 않고 하란 땅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하란 땅을 통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 곳에서 아버지가 돌아 가시니까 그 곳에 아버지를 매장하고 그 때서야 비로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75세였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4)

아브라함은 4가지 명령중에 한 가지는 지키고 3 가지는 안 지키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지만 초기 아브라함의 믿음 그리 좋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친척을 떠나라고 하였는 데 롯을 데리고 갔다가 롯과 갈등과 싸움만 하였습니다. 롯 때문에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라고 하였는 데 아버지를 모시고 떠났다가 결국은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을 지시하셨는 데 하란 땅으로 갔다가 하란 땅에서 지체하였고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은 순조롭게 되었고 하나님을 불순종한 것은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처음부터 듣는 것이 신상에 좋다>

어느 사람이 양파를 100개 훔치다가 걸렸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10만원을 내던가? 매를 100대 맞던가? 앉은 자리에서 양파를 공짜로 100개 먹던가?>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돈 10만원은 아까웠습니다. 매는 아플 것같았습니다. 그래서 양파를 100개 공짜로 먹으면 간단할 것같았습니다. 그래서 양파를 100개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00개를 하나하나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23개를 먹고 났을 때 속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매를 맞겠다고 하였습니다. 빳다를 맞기 시작하였습니다. 몽둥이로 17대를 맞고 나니 궁둥이에서 피가 흐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100대를 맞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돈을 내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때 10만원 내고 말았습니다.
진작 10만원을 냈으면 고생도 하지 않고 아프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처음부터 듣는 것이 신상에 좋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욥은 동시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욥은 갈데아 우스에서 살았고,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성경을 연대 순으로 배열하였으면 <창세기, 욥기, 출애급기...>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욥기가 뒤에 나온 것은 성문서끼리 묶다가 보니까 뒤에 나온 것뿐입니다.
그런데 욥은 <동방에서 제일 의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4분의 1의 믿음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믿음 좋은 욥을 선택하시지 않고 믿음이 4분의 1 밖에 안 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가요?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있는 사람을 택하지 않으시고 택하신 후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사용하실 때마다 맞는 믿음을 주셔서 사용하십니다>

모세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믿음이 있어서 믿음을 보시고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4번이나 애급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하시는 명령을 거절한 모세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 주시면서 믿음을 주셔서 강제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이 있어서 수제자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기 잡이 하다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이 잡히는 기적을 보고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바울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서 선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쓰실 사람을 선택하셔서 믿음을 주셔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욥을 선택하시지 않으시고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을 가요?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른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아브라함이 선택받았을 때의 믿음은 4분의 1의 믿음입니다. 그리 좋지 않은 믿음입니다.

2. 2분의 1 믿음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왔을 때 믿음은 2분의 1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선의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선의 마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선만 있던 마음에 악이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선악이 섞이게 되었습니다.
알곡만 있던 땅에 가라지가 섞여졌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뽑아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을 뽑게 될가 두렵다고 추수때까지 두라고 하였습니다. 추수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선과 악이 같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판날에 알곡은 곡간에 가라지는 불속에 넣으실 것입니다.
선과 악이 같이 있는 세상에 살면서 믿음도 그네뛰기처럼 왔다 갔다 하기 쉽습니다. 널뛰기처럼 오르날 내리락 하기 쉽습니다.
아브라함에 가나안에서 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악으로 갔다가 야단을 맞고 나면 선으로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하니 아브라함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단을 치고 나니 믿었습니다. 먼저 악으로 갔다가 나중에 선으로 들어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기 쉽습니다. 선과 악사이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고민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악을 결론 내리는 것이 죄입니다. 선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선입니다.
십일조를 가지고 고민하다가도 결론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새벽기도도 고민하다가도 결론은 기도이어야 합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빠져 나와야 합니다.

3. 온전한 믿음
4분의 1로 시작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2분의 1의 믿음이 되었으나 아직도 온전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언제 온전한 믿음, 믿음의 조상이 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가요?
모리아 산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100살에 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사환을 데리고 이삭과 함께 3일 걸어 모리아 산까지 갔습니다. 산 밑에서 사환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아브라함은 이삭만 데리고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갑자기 물었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산에 올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아 번제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3-18)

이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 가요?

사실의 말을 하지 않고 믿음이 말을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실을 말을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을 오르면서 두 가지 믿음의 말을 하였습니다.

<이삭과 함께 내려오리라>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사실은 아닙니다. 이삭을 죽이러 가는 것입니다. 사실의 말을 하지 않고 이삭을 죽이러 가면서도 이삭과 함께 내려 올 것이라고 믿음의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근거였을 가요? 이 때 믿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죽여도 도로 살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은 사실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민수기 4장에 유명한 정탐군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가나안 땅이 어떤 땅인지 정탐하고 오라고 한 지파에서 한 명씩 대표를 뽑아 모두 12명 정탐군을 보냈습니다.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은 10;2로 갈라졌습니다. 10명이 먼저 보고하였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27-33)

조금도 거짓이 없는 사실의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의 보고를 들어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8-9)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이같이 사실의 말을 하는 사람과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의 말을 하는 사람을 쓰시지 않고 믿음의 말을 하시는 사람을 쓰십니다.

모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자 바로가 군사를 데리고 도로 잡아 가려고 따라왔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확하게 사실의 말을 하였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1-12)

백성들은 사실의 말을 하였습니다. 건너지 못 할 홍해와 막강한 무기를 가진 애급 군대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틀림없이 죽음만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사실앞에서 사실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믿음을 말했습니다. 사람 입장에서 말하지 않고 하나님 입장에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14;13)

모세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믿음을 말했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실이 이루어지지 않고 믿음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벳세다 들판에서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허기지도록 말씀을 증거하셨고 사람들은 허기지도록 떠나지 않았습니다. 빈 들이었습니다. 해가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돌아가다가 허기져서 쓰러질 것같으니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여기는 빈들입니다. 5,000명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저녁입니다. 5,000명이 먹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200 데나리온, 약 2,000만원도 부족할 것입니다. 돈도 없습니다>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모두가 사실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들고 있는 어린아이 손목을 잡고 예수님 앞에 와서 말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니이까?>

(요6;9)

사실로만 말하는 제자들과 달리 안드레는 기가막힌 오병이어지만 가지고 와서 주님 손에 붙잡히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같은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안드레를 통하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 배물리 먹고 부스러기를 주웠습니다. 부스러기가 12 광주리였습니다. 기적의 언어는 기적을 끌어 드립니다.
사실을 말을 하지 말고 기적의 말을 하는 것이 기적을 창조하는 근원입니다.


지난 주간 나는 뉴질란드 해밀톤에 다녀 왔습니다. 동기 친구 안 성옥 목사가 나에게 자기 매제가 뉴질란드 해밀톤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는 데 소원이 강 목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한번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너무 작으니 자비량으로 비행기표도 내가 끊고 강사비도 없지만 소원 한번 들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교인은 네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두 가지 면에서 허락하였습니다. 하나는 친한 친구 부탁입니다. 다른 하나는 큰 교회도 좋지만 그런 교회도 부흥되어야 하니 아골골짝 빈들에도 가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표도 내가 사고 떠났습니다. 부흥회 약속을 하여 놓고 1년만에 60명 가량으로 부흥하였습니다. 전도사라 아직 세례 줄 수 있는 자격이 안 되기에 내가 세례 예식을 거행하고 왔습니다. 20명 세례를 주었습니다. 부흥회를 약속하여 놓고 일년간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였습니다. 이제 자립교회로 크게 부흥된 것입니다.
<하나님! 강 문호 목사님 모시고 부흥회 약속을 하여 놓았는 데 챙피하지 않게 하여 주세요>
늘 이런 기도였습니다. 해밀턴에 한국 사람은 영주권자 500여명, 유학생과 유학생 가족 1,500여명 모두 2,000여명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교회를 부흥시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더니 전도하여 들어 온 사람보다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민 온 가족이 예배드리러 약도를 보고 한 교회를 찾아가는 데 길을 잘못 들어서 찾아 와서 예배드리고 은혜받고 등록하여 이 교회 성도가 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나를 운전하여 주던 고 영길 성도는 이민 와서 외롭게 지내던중 주보를 길거리에서 주웠습니다. 주보에 있는 글이 마음에 와 닿아서 찾아 나와 예수님을 영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새 성도 20명을 세례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사실을 말하지 말고 믿음을 말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도단성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와 아람이 싸울 때였습니다. 아람이 작전 계획을 은밀하게 세우고 나면 탄로가 났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할 때마다 허를 찔리는 것같이 졌습니다 아람 왕은 우리 중에 간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골방에서 세운 비밀이 탄로가 나느냐고 신하들에게 따지고 물었습니다. 어느 곳을 치자고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몰래 쳐들어 가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알고 그 곳에 철통같은 수비를 하고 있어서 치지 못 하고 돌아 오곤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화가 난 아람왕이 누가 내통하였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 때 한 신하가 말했습니다.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6;12)

아람 왕은 이 말을 듣고 전쟁을 하기 전에 엘리사를 잡아야겠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엘리사가 어디 있는 지 찾아 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도단성에 있다는 정보가 들어 왔습니다.  아람 왕은 밤에 몰래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도단성을 둘러 쌓습니다. 엘리사 종이 새벽에 성벽에 올라가 보니 수많은 군사들이 도단성을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종이 엘리사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큰 일났습니다. 엄청난 아람 군대가 우리를 둘러 싸고 있습니다>
사실의 말을 하였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사실의 언어입니다. 보이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6;16)

이는 믿음의 말입니다.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입니다. 엘리사는 종의 눈이 열리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고 보니 아람 군대수보다 더 많은 천사들이 도단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남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저는 탈무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율법 학자중에 한 명을 들라고 하면 힐렐 랍비입니다. 정말 그는 탁월한 율법 랍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율법 공부를 할 때에는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결혼하고도 노동을 하여 가면서 그 날 벌어 그 날 먹고 그 날 벌어 그 날 공부하면서도 율법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랍비였습니다. 미래에 훌륭한 율법 학자가 되려고 분투 노력한 결과 그는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있었던 한 가지 일화입니다.
하루에 보통 10,000원 정도 벌었습니다. 그러면 매일 5,000원은 아내에게 주어 생활하게 하였고 5,000원은 율법 수업료를 냈습니다. 어느 날 운이 없어서 한 푼도 벌지 못 하였습니다. 힐렐은 집안 식구가 그 날 굶는 것은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율법 공부를 잊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라 학교에 갔습니다. 수업료를 내지 못 하였기에 교실에는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빛이 들어 가게 만든 창이 지붕에 하나 있었습니다. 지붕에 올라가 그 창에 얼굴을 대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날 몹시 추웠습니다. 눈이 내렸습니다. 몸에 눈이 쌓이고 있는 것도 잊어 버렸습니다. 한 참 공부에 빠져 있었습니다. 온 종일 그랬습니다. 그 날 밤새도록 공부가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눈도 그쳤습니다. 아침 고부를 하다가 토라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왜 이 방이 어두우냐? 오늘은 눈도 안 오고 밖에 날씨는 좋은 데 왜 햇빛이 들어오지 않느냐?>
채광창을 보니 사람 얼굴이 보였습니다. 제자 한 명이 올라 가 보았습니다. 눈이 1 미터가 쌓여 있었습니다. 눈을 헤치고 보니 그 속에 힐렐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얼어 붙어 있었습니다.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달걀 하나 이상의 무게를 들수도 나를 수도 없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힐렐을 들었습니다. 불 가까이에 눞혔습니다. 그리고 몸을 녹힌 후 기름을 발라 주었습니다. 힐렐은 깨어 났습니다. 토라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안식일 법을 어겨도 좋다>
이렇게 율법 공부를 열심히 한 힐렐은 당시 최고 율법 학자가 되었습니다. 남다른 생각, 남다른 행동, 남이 보지 못 하는 미래를 보고 전진 또 전진하였던 힐렐이었습니다. 사실의 언어가 아닌 믿음의 말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4분의 1의 믿음에서 2분의 1의 믿음으로, 2분의 1의 믿음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되었습니다.

항상 믿음의 말을 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기독교가 다른 여러 종교와 뚜렷이 구별되는 것을 하나 들라고 하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신득의(Justification by Faith·믿음으로 의로워짐)’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먼저 이 진리를 믿고 실천한 선구자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이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 마태복음에서 그 첫 구절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됨을 암시한다.

얼마 전 K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에서 티베트의 한 불승이 극락장생하기 위해 1600㎞의 먼 거리를 ‘5보1배’(다섯 걸음마다 한 번씩 엎드려 절하는 것)하며 무릎이 뭉개지도록 고행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가 만약 아브라함처럼(창 15:6) ‘이신득의’의 진리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요 3:16∼17), 즉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代行) 고난과 죽음을 믿음으로써 죄 용서와 의롭다하심과 영생을 얻는 것을 알기에 불교처럼 그토록 엄청난 고생을 하지 않는다.

지구상의 68억 인구 전체가 이 원리를 믿음으로써 구원과 영생을 얻는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은 그 어떤 위대한 발명가들보다 더 위대한 개척자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복의 근원’이 된 셈이다.

창세기 1∼2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 여정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에 집중돼 있다.

그는 “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의역)고 말씀하시는 야웨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동, 오늘까지도 그 땅이 인류 문화사의 중심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귀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다.

그의 믿음을 인정하신 야웨께서 숫양을 보내어 대신 바치게 하심으로써(창 22장) 약 2000년 뒤에 일어날 사건 즉 독생자 예수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리아산 사건에 반영된 아브라함식 신앙의 핵심은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히 11:19)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곧 생명과 역사의 주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다.

이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협소한 땅을 놓고 조카 롯과 타협할 때 풍요의 땅(지금의 사해지역)을 롯에게 기꺼이 양보할 수 있었다(창 13:1∼13).

아브라함의 믿음과 관련된 유대인 전승들은 장사꾼이었던 그의 아버지 데라가 그에게 팔도록 맡긴 우상들의 위장된 능력과 지혜를 폭로하고 나아가 그 우상들을 타파하는 이야기를 대서특필한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오늘의 성도들에게 축복의 길을 가로막는 현대판 우상들(재산, 명예, 권세, 쾌락, 자녀, 시간, 건강 등)을 아브라함처럼 기꺼이 포기하고 오직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섬길 수 있는지 물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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