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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

好學 2011. 1. 30. 22:51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을 다루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성과 더불어서 그분의 단일한 신격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성 - 격위(格位) - 의 관계 이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 신격 안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독립된 세 격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신앙고백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해하고서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니 삼위가 계시다!" 이것이 정통 기독교회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에서 발간하고 있는 학습. 세례 문답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1편 학습문답 제2장 하나님은 누구십니까?에서 3항에 "하나님은 몇 분이십니까"라고 질문하고 있으며, 그 대답으로 "오직 한 분 뿐이시나 삼위가 계십니다" 라고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과 답은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3항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는 데 따른 것입니다.

"단일한 신격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하나인 세 격위가 있으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으시고, 출생하지도 않으시고 발출하지도 않으시니,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출생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

개혁교회가 교리 표준의 하나로 삼고 있는 벨직 신앙고백서는 제8장에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나 세 인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되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본질에 있어서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동시에 그분은 곧 공유할 수 없는 바 인격적이시며 참되시며 진리되신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신 삼위(三位),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심을 믿는다. 성부는 원인과 근원이 되시고 모든 가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말씀과 지혜와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영원한 능력과 힘이 되시며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인하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구분에 의하여 나뉘어지는 분이 아니신데, 그 이유는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의 인격성을 가지시고 그 특성에 의하여 구별되기는 하나, 이 세 인격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신데,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부도 아니시며 성자도 아니심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구별된 인격은 나뉘어지거나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성부나 성령은 육체를 입지 않으셨고 다만 성자만이 육체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성부는 성자 없이는 계시지 않았고 또한 성령 없이 존재하지도 않으셨다. 이 삼위(三位)는 영원하심과 그 본질에 있어서 공유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분이 처음이고 어떤 분이 나중이 되시는 그러한 분들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삼위는 진리와 능력 그리고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성경에서 알게 해 주고 있으며, 또한 기독교회의 시작과 함께 신앙고백 하여 온 것입니다. 단지 그 신앙고백이 채택되고 문서화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 데에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입니다. 우리는 사도신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장 먼저 봅니다. 사실 이 사도신조는 가장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서인 사도신조는 5세기에 작성된 것입니다만 실은 훨씬 그 이전부터 신앙고백 되어져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신조들이 작성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다음의 세 신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보고자 합니다.

 

사도신조에서 본 삼위일체론

사도신조의 작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세례 받고자 하는 분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확인하는 질문을 한 것이 후에 신조문으로 작성되어서 사용되었는데 로마신조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신조를 근거로 해서 5세기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조가 사도신조입니다.

"나는 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오실 것이다. 나는 성령을 믿는다." 로,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언급하는 정도로 간단히 삼위일체론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니케아(니케아 콘스탄틴노플) 신조에서 본 삼위일체론

니케아 신조는 니케아 콘스탄틴노플 신조라고도 불립니다. 이 니케아 신조는 이단, 특별히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초대기독교회의 정통신앙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 이단은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정통교회와 달리 생각했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논박 당했습니다(325A.D.). 그러나 이 니케아 신조가 채택된 것은 니케아 공의회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입니다(381A.D.) 이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공의회의 여러 가지 결정들과 성령에 관한 폭넓은 고백을 넣어 니케아 신조를 작성하였습니다. 니케아 신조는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사용되었던 전형적인 것입니다. 비록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지만, 로마제국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다 이 신경을 영예롭게 지지했습니다.
이 신조의 특징은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주이시며 수여자이신 성령을 믿는다"는 것을 고백한 후에 다시 한번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 관한 신앙고백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시었고,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됩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동방교회에서 거부한 성령의 항목에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시었고"에서 "와 아들"(and the Son"=Filioque)이란 구절을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리우스의 이단성을 논박하면서 삼위일체론을 더욱 두각시켰으며 이로 인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삼위일체론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에서 본 삼위일체론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은 계속됩니다. 이에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자가 있는데 아타나시우스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425년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타나시우스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이름이 붙여져 불려졌을 뿐입니다. 이 신조의 특징은 보편적인 신앙을 강조하면서 크게 두 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단락에서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하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교리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보편적인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손상됨 없이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 받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보편적인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1. 우리는 삼위로 한 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 하나님,
2. 삼위가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이 없는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3. 왜냐하면 성부가 한 위로 계시고, 성자가 다른 위로 계시고, 성령이 또 다른 위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4.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합니다.
5. 성부께서 계심같이, 성자께서도 그렇게 계시고, 성령께서도 그렇게 계십니다.
6. 성부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자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7. 성부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8. 성부께서도 영원하시고. 성자께서도 영원하시고, 성령께서도 영원하십니다.
9. 그러나 세 영원하신 분이 아니고 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10. 또한 세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 아니시고 세 측량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고, 한 분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고, 한 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11. 동일한 방식으로, 성부께서도 전능하시고, 성자께서도 전능하시고, 성령께서도 전능하십니다.
12. 그러나 세 전능하신 분이 아니시고 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13. 이와 같이 성부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자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십니다.
14.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시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15. 이와 같이 또한 성부께서도 주님이시고, 성자께서도 주님이시며, 성령께서도 주님이십니다.
16. 그러나 세 분의 주님이 아니시고 한 주님이십니다.
17.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각 위가 각기 하나님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과 같이,
18. 보편적인 신앙은 우리가 세 하나님이나 세 주님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19. 그래서 성부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거나 누군가로부터 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20.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21.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
22. 그러므로 한 성부이시지 세 성부가 아니시고 한 성자이시지 세 성자가 아니시고 한 성령이시지 세 성령이 아니십니다.
23. 그리고 이 삼위 안에 먼저 되시거나 나중 되신 분이 없으시고, 더 큰 자나 더 작은 자도 없으십니다.
24. 그러나 삼위는 세 위가 영원히 서로 공존하시고, 동등하십니다.
25. 그래서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든 것 가운데서 일체 안에서 삼위이시고 삼위 안에서 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께 예배해야만 합니다.
26. 따라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에서 삼위일체론의 기술은 이렇게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이것을 간략히 종합해 보면, 크게 두 단원으로 나누어서 1-8항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기술하고 있고, 9-26항에서는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삼위로 한 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 하나님 한 분을 예배한다는 것인데, 삼위가 독립된 그래서 서로가 구분된다는 것이며, 그렇지만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이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합니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성부께서도 창조 받지 않으셨고 그렇듯이 성자와 성령께서도 동일하며, 또한 동일하게 측량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영원합니다.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시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각 위가 각기 하나님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하는 것과 같이 보편적인 신앙은 우리가 세 하나님이나 세 주님으로 말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래서 성부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거나 누군가로부터 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라는 표현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이에 이해를 갖기 위하여 먼저 유해무가 쓴 글인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에서 니케아 회의 전후에 있었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견해와 함께 삼위일체의 의미를 말한 부분을 보고자 합니다.


『 … 니케아회의 이전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님을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심지어 정통적인 교부라 할지라도 이런 종속설의 흔적을 다 떨쳐버리지 못했다. 다만 니케아회의 이전에 이 종속설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으며, 만약 문제로 지적되었다면, 그들은 겸허하게 올바른 입장을 수용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정통과 이단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선신(善神)이라는 주장을 펼쳤다(말시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神聖)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헬라교회가 정착되자 헬라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헬라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서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일성을 강조하는 君主論의 반격을 촉발하였다. 군주론은 성부의 단일성을 고수하려고 성자의 신성을 파생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성부의 外現 방식으로 보았다. 전자는 2세기에 강했는데, 인간 예수 안에 비위격적인 신적 능력이 역사하여 그를 세례나 부활 시에 성자로 입양시켰다는 입장인데 이는 예수를 ‘半神半人’으로 만들었다(동력적 군주론). 후자는 200년경 유행했는데, 성부만이 독자적인 위격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외현 방식으로 보면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 주장의 대표자는 사벨리우스인데, 그는 ‘성자-성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양태론적 군주론). 군주론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키려는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이 단일성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개진했다. 이레네우스(140-202)도 단일성을 고수하되 양태론적 경향을 지녔다. 영원 전에 성부는 말씀과 지혜를 가졌고, 그들은 동등한 위격이라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에서 출발하여 성부의 위격이 동시에 말씀과 지혜(곧 성자와 성령)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이는 1-2세기 삼위일체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 좋은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교부가 새로운 기여를 한다. 서방의 터툴리안(160-220년 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단일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속사를 위하여 단일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나, 동일하지는 않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군주론과 노스틱 이단들을 잘 대처했다. 그럼에도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시키는 흔적은 그에게도 남아 있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했지만, 이보다는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위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휘포스타시스’(uJpovstasi")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는 위격적으로는 성부와 다르다는 구별성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그는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다는 ‘호모우시오스’(oJmoouvsio")라는 말을 썼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정립을 위한 용어를 창제한 인물이지만, 그의 설명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즉 그는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약과는 달리 성자께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성자가 성부 밑에 있듯이, 성령도 성자 아래 있다는 위계적인 신론은 그가 신플라톤 사상을 원용하여 신론을 전개한 代價이다. 이 때문에 ‘호모우시오스’는 니케아회의 이전까지 사용이 금지당했었다. 그렇지만 오리게네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니케아 회의 전과 당시와 후에도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의 해석이 논의를 지배하고 향방을 정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에 의하여 로고스 기독론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니케아 회의

아리우스(256-336)와 그의 스승 루시안( -312)도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잘못된 한 측면만 강조하는 우를 범했다.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단일성과 종속설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무(無)에서 피조되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인데 이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 다만 완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일 뿐이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되었을 뿐이다. 다른 편으로 아리우스도 위격이라는 말을 쓰고, 성자와 성령의 독특성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인 군주론은 그리스도를 ‘반신’(半神)으로 만들었고, 성령도 참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아닌 그리스도는 결국 성부를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부를 완전하게 계시할 수 없다는 망언을 하였다. 만약 하나님을 알려면, 성부 하나님 외에 그를 아는 다른 신을 상정하는 다신론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다. 이와 같이 그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잘못 주장한 결과는 엄청나게 클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이런 주장을 방관할 수 없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에는 필요 없는 사변이 지배한다고 판단하고 상호 사랑과 포용을 촉구했다. 여기에는 이런 논쟁으로 자신의 제국의 통일이 손상받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었다. 그는 최초의 공의회를 자기의 궁정 니케아에 소집했다. 그리고 그는 고백의 본문에 ‘호모우시오스’를 삽입토록 했다. 이는 터툴리안이 쓴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이라는 라틴어의 헬라 역어이기도 하다. 니케아 고백은 시리아-팔레스틴 고백, 아마 예루살렘 고백을 기초로 삼았다. 아리우스와 두 친구만이 고백 서명을 거부했다. 이 고백은 논쟁의 핵심에 해당되는 기독론에서 예수는 피조되지 않았고, 출생되었고, 성부와 동등하다고 했다. 이로써 성부는 성부가 아닌 적이 있었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거부되었다.

니케아 신조는 철학적 신개념을 거부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신약의 교훈을 무시하고 종속설적으로 그를 半神半人으로 만든 아리우스의 이단을 막는데는 성공했다. 사실 아리우스의 체계는 신플라톤적으로 채색된 위계적인 철학적 신론이었다. 니케아는 이에 맞서는 철학적 신개념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의 고백은 ‘위격’과 같은 용어로 신앙을 개념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고백에는 필시 역리(逆理)가 있기 때문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역리 말이다.

그러면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의 뜻은 무엇인가? 이 용어는 군주론에 대항하여 성부/성자의 數的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을 뜻한다. 작성 당시에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니케아회의 이전과 이후 상당 기간동안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본질의 (수적) 동일성으로 이해(오해)되었다. 나아가 본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의 관계 또한 고려되지 않았고, 양태론의 오해를 받았다.
니케아의 영웅 아타나시우스(295-373)는 ‘호모우시오스’가 성자의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동시에 신성의 단일성까지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초기에는 성부와 성자의 단일성은 고려하지 않고 로고스의 신성만 강조했지만, 후기에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위격들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派가 비난하듯이 그가 양태론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양 위격 간의 구별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위격’이라는 용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이 삼위일체론 자체가 아니라 구원론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 안에 피조된 반신반인(半神半人)적인 본질만 있다면, 그를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께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우리를 ‘신품화’(divinisation)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니케아회의 이후

아타나시우스가 남겨놓은 문제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되었고, 이는 성령의 신성 문제 해명으로 연결되었다. 니케아 수용자들 중에도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불확실했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마케도니우스(342-360)와 같은 성령否認派들까지 있었다. 그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가운데서 일하려고 창조한 도구요 능력일 뿐,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했다. 다만 위격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단일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을 각각 사용하였다. 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부성(父性), 성자의 자성(子性), 성령의 성력(聖力) 또는 성화(聖化)를 말하였다.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329-390)는 성부께는 태어나지 않음, 성자께는 태어남, 성령께는 발출이라는 고유성을 부여했다. 그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성과 군주권(君主權)을 성부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군주론이 지닌 최대 약점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닛사의 그레고리(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독생하심,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고,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이들은 계시에서 전개되는 행위의 단일성에서 본질의 단일성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나아가 그들은 ‘호모우시오스’를 ‘호모이우시오스’로 해석하는 것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호모우시오스’를 단일성으로만 이해하다 보니 사벨리우스派적(양태론적)인 오해의 소지가 많았는데, 이런 식의 선언으로 그런 오해도 제거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회의(381)는 성령의 ‘호모우시오스’를 문자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식으로 성령의 신성을 고백했다. 1년 뒤의 또 다른 회의는 ‘호모우시오스’를 성령께도 돌려드렸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 교회는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가 성경의 모든 말들을 자기 식으로 변형했기 때문에 ‘호모우시오스’가 효과적으로 방어선(防禦線)을 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는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벗겨버리거나 본질을 정의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진짜로 오셨고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성경적 교훈을 고수하려고 했다.

어거스틴(354-430)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증거했다. 그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종개념(種槪念)으로 보고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했다. 이 비교는 단일성보다는 구별을 너무 부각시켰다. 이에 근거하여 아리안파들은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어거스틴은 삼위란 삼신(三神)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단일성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이 본질은 곧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성부께만, 또는 오직 성자나 오직 성령께만 돌려지는 사역이란 없다.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과 삼위는 한 원리를 제시한다. 가령 성육신에도 성부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공히 능동적 기여를 하셨다고 설명한다. 삼위의 외적 사역들은 불가분리인고로 삼위는 항상 함께 사역하신다. 어거스틴은 ‘위격’도 새롭게 해석한다. 이 말은 라틴어로 번역할 때, ‘본질’로 번역되어야만 했다. 동방신학에서는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persona’로 번역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사용하지만, 의도하는 바를 바로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 용어를 관계(relatio)로 번역했다. 이 점에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와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입장을 따르며, 이는 서방 전통도 되었다. 삼‘위’란 그 자체로는 무엇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들이다. 모든 속성들은 ‘일체’에 귀속되지만, 관계로서의 위격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나 피조계와 연관되어 의미를 지닌다. 삼위는 거룩하다, 선하다, 영원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삼위는 성부이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삼위를 성자이라 할 수는 없는데, 子性을 다른 위격에다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성자,성령 간에 본체론적이나 또는 질적, 양적인 여하한 구분을 적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원한 관계성을 도입했다. 나아가 이 관계성은 본질에 부가적인 우연이 아니다. 부가적 우연은 신성의 가변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한 하나님이 오직 성부이거나 오직 성자이거나 오직 성령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셨고, 또 그러하실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삼신론(三神論)의 위험을 극복했다. 용어의 제한성이 있으나 그는 삼위 고백에서 침묵만이 능사가 아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um)는 삼위의 한 하나님과 단일성 가운데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며, 위격들을 혼돈하지 않고 본체를 분리하지 않는 고백을 언명한다. 성부의 위격과 성자의 위격 그리고 성령의 위격이 각각 다르나 성부,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다. 영광과 위엄도 동일하며, 영원하다. 삼위는 공히 피조되지 않았고, 공히 불가해하며, 공히 영원한데, 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나, 삼신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각각 주님이시나, 세 주님들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주님만이 계신다. 성부는 출생되지 않았고, 성자는 피조되지 않고 출생되었고, 성령은 피조되지도 출생되지도 않았으나 발출하신다. 세 성부들이 아니라 한 성부만 계시고, 세 성자들이 아니라 한 성자가 계시고,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만이 계신다. 삼위 간에는 전과 후가 없으며, 크고 작음도 없다. 함께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론에 공재(共在;또는 共座) 개념을 도입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간에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며,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칼빈(1509-1564)은 먼저 삼위께서 참되신 한 하나님이시요, 이 삼위를 떠나서 하나님은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분을 바로 삼위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성자,성령께 공히 적용되며, 위격이란 비공유적 속성이며, 상호 연관 중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을 말한다. 위격은 상관적인 이름이고, 본질은 절대적인 이름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자의 이름은 명목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서 시작하여 삼위일체론을 언급한다. 하나님 내에서의 위격 구분은 성자께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계시됨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각 위격에서 全 신성을 이해한다. 그는 요한복음 14:10을 인용하면서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고 다메섹 요한式의 공재를 말한다. 각 위는 본질의 상이성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을 통한 상호 관계성으로 구별되며 동시에 그 관계성을 통하여 단일성을 이룬다. 그는 에베소서 4:5과 마태복음 28:19의 세례의 단일성을 근거로 하여, 삼위께서 함께 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시다. 이 측면에서는 자기 원인자이다. 그러나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이다. 이 측면에서는 성부가 성자의 원인자이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순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시작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全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쓴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인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인이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 원인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로 이해한다.” 이렇게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주’, 또는 ‘영’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