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대한민국第一號)

[대한민국 제1호] 지하상가

好學 2011. 1. 29. 20:06

 

[대한민국 제1호] 지하상가

 

1967년 을지로 1가에 처음 문열어…

 


우리나라에 지하상가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7년 12월 20일이다. 이날 서울시청 앞 을지로 1가에 '새서울 지하상가'가 문을 열었다. 서울 한복판에 길이 480m, 폭 9m 규모로 들어선 지하상가는 멋쟁이들이 한 번씩 들르는 '첨단 상가'로 부상했다. 이어 1970년 9월 4일 중구 인현동 2가 인현 지하상가, 1971년 9월 29일 왕십리 중앙시장 지하상가가 속속 문을 열었다.

겨우 40여년 전 일이지만 지하상가와 관련된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이는 1970년대 초기 건설된 지하상가들은 서울시가 체계적인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만든 것이 아니라 민간 기업들이 사업비를 투입해 지하상가를 건립하고 20년 넘게 그 시설을 무상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때 들어선 지하상가들은 민간 기업들이 서울시에 지하상가를 기부채납한 1990년대 후반에야 서울시가 나서 개보수 공사를 하고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활발하게 서울 도심에 지하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 이후 지하상가는 비상시 '벙커용'으로도 구상됐다. 북한과 대치 상황이 사회적으로 부각되던 시절이었다. 서울·부산·마산 등지에 대형 지하상가 체인을 관리하는 '대현실업'<사진>(1977년 대현실업의 방산지하상가 준공식.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구자춘 서울시장)이 탄생한 것도 '지하상가=벙커' 논리가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중반 장교 출신인 구자춘 서울시장의 가장 큰 고민은 '공산화의 도미노 이론'에 따른 북한군의 남침이었다. 그는 만약 서울 외곽에서 전쟁이 발생하고 장기화했을 때, 서울 시민을 안전하게 대피시킬 수 있는 대형 '벙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현실업 창업주인 손현수씨가 무작정 구 시장을 찾아가 "나에게 지하상가 건립을 허가해주면 국토이용의 효율화, 교통난의 해소, 민방위 대피시설의 활용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 시장은 '민방위 대피시설의 활용' 부분에서 환하게 웃으며 '지하상가 조성 10개년 계획'을 세웠다. 시민들에게는 '도심부의 교통체증 해소를 위한 보행자 공간의 확보'를 위해 지하상가를 건립한다고 했다. 도심에서 대규모 땅파기 공사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9개의 지하상가 건설공사가 동시에 진행되자 을지로·퇴계로 등의 도심은 교통 체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당시 신문보도를 보면, '낮에도 이 지역을 통과하려면 1시간 가까이 걸린다'고 적었다. 1980년대 이후 지하상가는 최신 판매시설에 밀려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최근 서울시는 이 지하공간을 재정비하겠다고 나섰다. 서울시청 인근에 따로 떨어져 있는 새서울·을지로입구·남대문·회현·소공·명동지하 상가를 지하로 서로 연결할 계획이다. 도심에 단절돼 있는 지하 보행공간을 연결하고 각종 문화시설이나 시민 휴게시설을 넣어 도심을 활성화하겠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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