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예화·자료]

예화모음

好學 2010. 12. 5. 21:23

 

바늘 없는 시계

치들리(HOWARD J.CHIDLEY)가 친구 집에서 큰 벽시계를 구경했다.
삼대째 내려오는 가보라면서 친구는 그 시계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조부께서 75년간이나 그 시계 소리를 들으시면서 주무시고 일어나셨으며,
부친께서 75년을 더 사용하셨고,
자기 자신도 어려서 그 시계를 보고 학교에 다녔다면서
정확해서 믿을 만한 시계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런데 그 벽시계에는 바늘이 빠지고 없었다.

태엽을 감아주니 똑딱거리는 소리는 나는데
바늘이 없으니 시간을 알려주지 못했다.
금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은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래 되었으면 어떻고 과거에 잘 맞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이 몇 시인가를 알려주지 못하는 벽시계!

바늘이 없는 벽시계, 너는 어쩌면 그렇게도 어떤 교인과 같으냐.
똑딱거리기는 하면서 시간은 못 알리는 너는,
주장만 하고 믿음을 못 보여주는 사람과 흡사하구나.
삼대가 아니라 오대를 믿어 왔어도
보여줄 수 없는 네 믿음을 어디다 쓰겠느냐?
네가 얼마나 아느냐, 좀 보여 봐라. 얼마나 거룩하냐, 어디 좀 보자.
네가 성도냐, 사탄이냐? 아니면 무엇의 둔갑이냐?
그러나 볼 수 없는 믿음은 고칠 수도 없다.
네가 보여 줄 수 없는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없어서 못 보여주는지 누가 알겠느냐?
적게 믿고 짧게 믿었으나 행함으로 보여 주는 성도 앞에서
너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4)

대왕의 보물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동서의 세계를 하나로 만들겠다는 큰 꿈이 있었다.
그 실현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희랍을 떠나기에 앞서,
그는 자기가 아껴오던 보물들을 모두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를 보고 한 신하가 물었다.
“폐하는 왜 보물을 모두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시면 폐하의 보고(寶庫)가 텅 비지않습니까?”
알렉산더는 대답하기를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보물들을 전부 나눠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있는 보물만은 어떤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보물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희망’이다.
내게 희망이 있어 비로서 오늘의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알렉산더를 대왕(大王)으로 만든것은 명예욕도, 권력욕도, 물욕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희망뿐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를 대왕답게 만든것은,
그가 국민 모두에게까지 희망을 안겨준데 있었다.
그가 건설한 새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그와 그의 신하들의 희망의 결정이나 다름 없었다.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나라도 구석 구석이 희망으로 가득차 있을 때 흥한다.
훌륭한 정치가는 또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처칠이 위대한 정치가인 것은,
그가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영국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준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국인으로 하여금
전쟁의 어려움을 이겨내게 만든 것도 바로 희망이었다.
아직도 미국민이 케네디를 아쉬워하는 것은,
그가 온 나라에 희망을 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당신은,
지금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오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감추인 보화
1971년 아폴로 15호로 달에 다녀온 제임스 어윈의 간증을 들어본다.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하얀 돌이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 패트릭 모어(Dr.Patrick More)에 의해 오래전에 ‘창세기 돌’로도 명명되어 있던 그 돌이 왜 그토록 중요했길래 우리에게 그돌은 찾아 오도록 시켰을까요? 저는 그 돌을 발견한 것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진짜 돌’을 찾으시길 기도합니다. 저는 감추인 보화 비유를 말할 때 곧잘 이 하얀 돌의 모형을 보여드리곤 합니다. 이 돌을 구하기 위해 왜 그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였을까요? 과학자들에 의하면 그 돌은 달의 산과 표면의 성질을 모두 알아낼 수 있는 표본이기 때문에 귀할 수 밖에 없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돌-감추인 보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야말로 내인생에 진정한 의미를 가져다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터
오래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였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이리 뛰고 저리 피하고 야단법석이었는데 나이많은 한 부인성도는 자기 집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진이 끝난 후 사람들은 그 노부인에게 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소동 속에서도 의자에 기쁜 얼굴로 앉아 계실 수가 있습니까?”부인은 대답했다.“나는 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그토록 흔드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그러는 가운데서도 나를 그의 손안에 안전하게 붙들어 주신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잠겨 무서워 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미어즈 성경핸드북)

굴뚝이 아니야 (국민일보 1994.6.2)
여러사람들이 모여 흡연에 대해 찬반토론을 벌였다. 열띤 토론이 벌어지면서 금연론자가 몰리는 판국이었다. 이때 참관인으로 듣고만 있던 한교인이 나서서 말을 꺼냈다. “저는 사람이 담배 피우는 동물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만약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게 하실 작정이라면 연기가 나오는 콧구멍을 밑을 향하게 붙이지 않고 머리 꼭대기에 붙이셨을 겁니다.”그리고선 집을 예로 들어 다시 설명했다. “어느 집이든 현관 정문에,게다가 구멍이 밑을 향하게 굴뚝을 설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로 구조학적으로도 사람은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고 봅니다.”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단순하지만 명쾌한 노리에 박장대소하며 <금연>으로 의견을 통일했다. 창조의 섭리에 따른 설명이라면 다소 거창하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성인남자의 흡연률이 73.2%로 세계 최고인 현실에 비추어 우리의 금연운동은 때 늦은 감이있다.
담배라는 단어가 성경에 있을 리는 물론없다. 사람이 만들어낸 고약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직결된 생명에 관한 언급은 수 없이 많다.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을 경건과 절제의 삶으로 살것도 말씀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린도전서 6:19-20)

그리스도인의 삶
몇 년 전 제가 약 3주간의 미주여행을 하면서 어느 분으로부터 들었던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는 어느 미국 공과대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은 미국 동부에 있는 어느 공과대 학생인데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한국에서 20여년 간 선교사로 일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국을 언제나 동경하며 특별히 한국에성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공과대학에서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중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던 중 한국 여학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중국 선교에 대한 소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마치고는 다시 전에 다니던 공과대학으로 들아와서 남은 기간을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중국에 목사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에 기술자로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저에게 그분에 대해 말씀을 전해준 분은 그와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고 그가 결혼한 후에는 그들과 이웃해서 살던 부부인데 그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 미국인 대학생 부부는 여름에도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고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베개를 베지 않고 그냥 바닥에 누워 자고, 그리고 슈퍼마켓에 식품을 사러 가서도 꼭 낱개로 헤아려서 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장차선교하러 갈 중국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쉽고 안일하게 살아가도 되는 그러한 값싼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자기 훈련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값비싼 것입니다.
(삶,그리고 성령, 임영수)

기도의 능력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렇게도 중요한 설교하는 법은 안가르쳐 주셨으나 기도하는 법은 여러차례 가르쳐 주셨고 그리고도 부족할까봐 기도의 Sample이라고 할 ‘주기도’까지 가르쳐 주셨으며, 성경에는 교회를 가르켜 ‘말씀이 집’이라 한 곳보다 ‘기도하는 집’이라 한 데가 더 많다. 사도바울은 쉬지말고 찬송하라거나 쉬지말고 성경보라는 말은 안했으나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기독교역사는 기도의 역사’라고 말한 이도 있다. 아무리 신학박사라 해도 이론과 학문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세상에서 기도하지 않는 인간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받을 때는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으니, 누구나 예수를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요14:13,14),믿고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다.
(김홍도)

깊고도 철저한 기도속에서
기도의 사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요, 참하나님이시면서도 세상에서는 이와같이 열렬하고 끊임없이 처절한 기도속에서 그의 영성을 지켰다.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중 하나인 성베네딕트는 로마근처 수비아코산 동굴속에서 3년을 엎드려 기도하고 영성이 무르익은 영의 사람이 되어 카시노산에 수도원을 세우고 유럽교회를 영성으로 살렸다. 성프란치스코는 아씨시 스바시오산 계곡에 있는 동굴 속에서 기도를 계속하다가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의 사랑의 물결을 느낀 후 울며 다니면서 당시 유럽의 타락한 기독교를 건졌다. 예수님이 신인이면서도 기도,또 기도속에 영성을 기르신 것처럼 오늘 우리 크리스챤들도 다른것을 의뢰하지 말고 철저히 기도에 의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엄두섭)

나를 따르라 (국민일보 1994.6.3.)
67년 6월 일어난 6일간의 중동전쟁은 절대적 열세인 것처럼 보이던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거의 파죽지세로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요르단강 주변등등 아랍쪽 지역을 점령, 세계를 놀라게 했다. 후에 군사전략가들이 그 비결을 찾아 보고는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데 모두 동감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전쟁에 임할 때 아랍군 지휘관들의 공격명령은 “가라!”였다. 누구나 목숨은 하나이고 아까운 법,남보다 앞서 나서질 리 없었다.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판국이라 영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래서 참패했다. 그런 아랍군에 반해 이스라엘군 지휘관들은 “나를 따르라!”고 외쳤다. 상관이 용기 있게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그를 따르지 않을 병사가 없었던 것이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부정부패,무사안일의 펼연적 귀결로 나타난 복지부동현상을 타개하는 방법은 “나를 따르라”이다. 솔선수범하며 나설 생각은 접어준 채 당근을 줄테니 좀 달려보라고 구슬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모자란 생각이다. 따를만한 위의 모범을 보면서 바르게 행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영적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 악의 영들에 대한 믿음의 싸움을 하면서 지치고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그의 명령을 따라 행할 때에는 반드시 승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처한 곳에서 예수를 온전히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이다.(요한복음 8:12)

네로의 미소
영화 ‘쿼바디스’에 보면 로마의 폭군 네로가 로마시내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궁에 앉아 불타는 시가지와 그 속에서 허둥대는 자신의 백성들을 보면서 쾌감에 젖어 시를 읊으며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사이래 많은 폭군과 독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마구 휘둘러 백성들을 전쟁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일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영상 가득히 화염속을 헤매는 사람들의 아비규환과 함께 유유자적히 자신의 궁에 앉아 잔인한 미소를 띄우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네로의 모습은 섬찟함을 넘어 전율을 느끼게 한다. 한 왕의 잔인성은 그의 백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안위와 만족을 추구한다. 불길을 바라보는 네로의 미소에서 섬김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백성된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감사가 저절로 터져 나옴을 어찌할 수 없었다.

돌아오기 위한 여행
해마다 여름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떠난다. 이와 반대로 북유럽의 사람들은 겨울에 따뜻한 지중해 연안을 찾아 ‘피한 여행’을 떠난다. 서로 반대되는 풍속이긴 하지만 두 여행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에서 ‘떠난다’는 것과 떠난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 ‘돌아옴’은 여행의 끝인 동시에 새로운 여행을 위한 준비이다. 만약 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여행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면 여행의 본 목적은 상실된다. 진정 그들이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자신이 떠났던 일상생활로 돌아와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일상생활에서 부딪칠 어려움이나 고통때문에 여행의 행복에만 매어달린다면 결코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현재가 즐겁고 행복하다고 현재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결국 현실의 주변인으로 전락해 결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는 까닭이다.

동맹주역들의 최후
인류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일 중 하나인 2차 세계대전은 1936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체결로 한층 가속화 되었다. 이 삼국동맹의 결과로 평화로운 지구 곳곳은 온통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로 화했다. 그러나 결국 정의로운 연합군의 승리로 삼국동맹의 주역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먼저 유태인을 600만이나 학살한 히틀러는 연합군이 한참 독일로 전진해 오던 45년 그의 지휘벙커에서 애인 엠마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극악한 파시스트인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는 45년 연합군에 패전후 국경밖으로 도망하려다 암살됐다. 일본의 동조천황은 전쟁기에 국민들로부터 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이미지를 모두 상실한 채 89년 한 인간으로 돌아와 병에 걸려 죽었다. 전쟁의 악령에 사로잡혔던 세사람은 결국 그 악령의 조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미리 쓴 일기

어린시절 방학을 하면 학교에서는 쉬는 날에 걸맞게 많은 방학숙제를 내주었다. 그러나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보면 방학은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정신을 차려 숙제를 하려고 하면 개학은 며칠 남지 않아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헌데 다른 숙제는 그런대로 한다지만 일기만큼은 벼락치기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늘 고민고민 하다가 대충 써서 내곤했다. 그러다 어느해 방학때는 한달치 일기를 미리 써놓는 바람에 매우 곤욕스러운 적이 있었다. 매일매일 써놓은 일기를 따라서 생활하려니까 상대적으로 현실적 여건과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시킬 수는 없고(일기에는 거짓말을 쓰면 안된다고 해서)하니 억지로 일기에 써놓은대로 따라가고, 때로는 일기의 상황을 일부러 만들기도 했다. 한달 후 내 체중은 3kg이나 줄어들었다.

믿고 말고요
어느 교회에서 부활절 칸타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연습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해서 힘껏 불렀다. 합창 순서가 지나가고 소프라녹 독창을 할 차례였다.
“내 주는 살아계시고”라는 가사로 노래가 이어졌다. 독창을 맡은 여자는 음악적인 기술이 원숙했다. 호흡조절도 완벽했다. 음정도 정확하고 발음도 똑똑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잘 전달이 되었다.그는 마지막 음절까지 아주 자신만만하게 다 불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지휘자에게로 모아졌다. 아마도 “잘 불렀습니다!”또는 “아주 훌륭했습니다!”라는 찬사가 지휘자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 모두가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지휘자는 그 자매를 향하여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듯한 모습으로 이렇게 물어보았다. “자매여! 그대는 진정 주님께서 살아계신다고 믿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 자매는 선뜻 대답했다. “그럼요! 믿고 말고요!” 이와 함께 지휘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신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불러주세요. 자매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을 수 있도록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불러주세요!”그 소리에 여자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도 함께 하시며 자신의 찬양을 받고 계심을 느끼는 마음으로 다시 불렀다. 듣는 사람들이 다 감격해서 울었다. 노래가 끝난 후 지휘자도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자매는 정말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알고 있군요. 자매의 노래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어요!” (예수,예수의 사람들, 박상훈)

믿음의 나락-체념

코끼리를 산채로 잡는 사냥법입니다. 먼저 코끼리를 정글로부터 유인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우리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코끼리의 발목에 든든한 쇠사슬을 매어 놓고 한 끝은 튼튼하고 굵은 나무 기둥에 묶어 놓습니다. 그후 우리를 치우면 야생의 코끼리는 정굴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발목에 묶인 쇠사슬 때문에 몇발작 걷닥는 저지를 당합니다. 처음에 코끼리는 쇠사슬로부터 놓여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있는 힘을 다 동원해 보지만 계속 실패를 하게 되고 결국엔 체념하며 비록 코끼리가 끊고 도망갈 수 있을 정도의 기둥과 줄에 묶어놔도 조금만 줄이 팽팽해지면 힘쓰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대로 줄을 잡아당겨 코끼리를 훈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체념은 소망을 포기하는 행동이며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처음의 고통이나 고난이 비록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믿음과 소망을 갖고 기다리며 노력하면 결국에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팔소리)

문화적 선교사
(국민일보 1994.6.9)
여름철의 대표적인 보양식품으로 개고기를 꼽는다. 요새는 언제 어디서고 쉽게 먹을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머무는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다. 전세계 동물 애호가들의 비난이 그칠 새 없지만 한 민족의 문화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반론이다. 자기네 문화가 소중한 것처럼 우리의 문화도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한미국인 선교사가 고향에 편지를 했다. “···어제 눈 딱 감고 난생 처음 개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사람들 꽤나 좋아하며 저를 대견하게 여겼습니다. 이내 친숙해져 전도가 쉬워졌지만 여름내내 개고기를 대접받게 생겼습니다.···”아버지의 답장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였다.
현지 문화에의 적응이야말로 해외 선교의 첫걸음이다. 한때 한국에 온 선교사중엔 그 이해나 훈련이 부족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일이 많았다. 최근 있었던 침례교 한미전도대회 평가회 때 한 목회자의 말은 그것은 역설적으로 실감케 한다. “우리교회에 오신 미국목사님은 저희가 대접하는 무엇이든 잘 드셔서 온 교우들이 얼마나 흐뭇했던지요” 그는 우리식으로 밥도 두,세공기씩 맛있게 들었고 그가 인도하는 전도집회는 대성황이었다. 예수 믿기로 결심한 사람도 다른 곳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서로 마음이 합해질 때 그사랑의 토대위에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 열매 맺게 된다. 선교에의 열정이나 사명감과 함께 문화나 사람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선교사역자들에게 더욱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변화시키는 힘
캐나다의 존 케디라는 선교사는 식인종이 사는 작은 섬으로 복음을 들고 나갔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고 언어를 습득하여 성경을 번역하고 교육을 시켰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1848년에 그가 이곳에 처음 상륙하였을 때에는 이곳에 그리스도인이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1872년에는 여기에 식인종이 한명도 없다.” 즉 그는 섬사람 모두를 그리스도인 되게 한 것이다. 복음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식인종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셔서 신분이 바뀌게 한다(요 1:12). 성경은 우리가 원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어둠이었는데 생명의 빛을 받고 빛이 되었다고 말한다(엡 5:8). 투정과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 감사하고 노래하며 밝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요,죄의식과 좌절로 누추하게 살던 사람이 자유함고 희망으로 청결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이 복음이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 험악하고 거친 인생을 살다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유순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바뀐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이 생명의 복음을 사랑하자. (달리는 QT, 박광철)

보여지는 빛
옛날 팔레스틴의 집들은 지름이 50cm도 안되는 작은 창문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대단히 어두웠다. 당시는 등잔불을 켜는 성냥이 없을 때였으므로 한 번 불이 꺼지면 다시 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평시에는 등잔을 대위에 올려 놓았다가 외출할 때는 대위에서 내려 흙으로 만든 말위에 두어 외출했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하였다. 등잔불의 본래적 사명은 보여지는데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란 사람에게 보여지는데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숨은 제자란 있을 수 없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하면 제자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므로 제자이면 숨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다만 교회안에서만 보여져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밖의 이 사회생활에 더 많이 보여져야 한다. (박조준)

보 혜 사
데이비드 시맨즈의 글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심장 절개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수술을 받기 전날 몃진 간호원이 내 병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나에게 꽉 잡아 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간호원이 참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수술을 받으시는 동안 당신은 당신의 심장과 분리된 상태에서 오직 기계의 도움에 의해 생명이 유지될 것입니다. 당신의 심장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당신의 심장 기능은 다시 정상으로 움직이고 당신은 마침내 회복실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약 6시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일 것입니다. 당신이 비록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못하고 심지어는 눈을 뜨고 싶어도 뜨지 못하는 상태일지라도 당신의 의식은 완전한 가운데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들어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당신 곁에 머물겠습니다. 비록 당신이 어찌할 바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빠질지라도 당신이 내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간호원이 내게 말해주었던 일들이 나에게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내 손을 잡아 준 간호원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스니다. 그것이 내가 어려움을 경험하는 동안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 임재해 주실 것이란 약속은 그분이 가르쳐주신 보혜사란 말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이름처럼 지금도 고난과 슬픔에 싸여있는 우리의 손을 잡고 위로와 소망을, 그리고 힘과 사랑을 주십니다.
(설교예화, 김선도)

복음의 능력
조쉬 맥도웰은 아주 똑똑한 청년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아주 불우했고, 그는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한 알콜 중독자였다. 그의 친구들은 늘 그의 아버지의 술주정 행각에 비웃음을 보냈다. 조쉬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심지어 아버지를 창고에 끌고 가 꽁꽁 묶어놓곤 해야 했다. 그리고는 창고근처에 차를 세워두고는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집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조쉬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안으로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꼈다. 조쉬는 자연히 분노에 찬 사람이 되었다. 그는 특히 자기 아버지를 증오했다. 천천히 세월이 흘렀다. 조쉬는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참으로 거듭난 크리스챤들을 몇 명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들안에서 자기의 굶주린 마음이 그토록 갈망해왔던 그 뭔가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너무 똑똑했다. 조쉬는 기독교 및 예수님의 부활을 ‘지적으로 멋지게 반박해보기로’마음먹었다. 그는 작정을 하고 그 증거들을 파헤쳐 들어갔다. 그의 생각과 마음을 두고 벌어진 이 전투는 가히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결국 조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여겨지는 그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확신과 아울러 마지못해 한다는 마음도 같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959년 12월 19일 저녁 8시 30분에 자기방에서 혼자,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과 삶속에 모셔들였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실재성에 바탕을 둔, 아주 조용하고도 감정의 동요가 별로 없는 회심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평온한 회심으로 시작됐던 그것이 나중에 가서는 새로운 사람으로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비밀은 없다
어느 풋내기 변호사가 사무실을 열게 되었습니다. 개업 첫날이었습니다. 손님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합니다. ‘옳지. 이제야 손님이 오는구나. 첫 손님이니 내가 꼭 사건을 맡아야지.’ 이렇게 생각한 변호사는 어떻게든 손님에게 신뢰감을 줄 양으로 걸려오지도 않은 전화수화기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무러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일감을 맡고 있는지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손님이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있자 그는 온갖 몸짓을 다 해가며 더 큰소리로 지껄여댔습니다. 조금후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변호사는 손님을 향해 넌저시 물었습니다. “손님은 무슨 사건으로 오셨습니까?” 그러자 손님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실은 전화국에서 나왔습니다. 선생님 사무실에서 신청하신 전화선을 이어드리려구요.” 전공은 아직 개통하지 않은 전화기의 선을 찾아 잇기 시작했습니다. 영원히 감추어지는 비밀은 없습니다. 착함과 악함도 언젠가는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행한 악을 감추려는 것도 헛된 일인데 인생은 어쩌자고 어리석은 일, 헛된 말만 골라 행하기를 즐겨하는지요. 그러기에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이슬비 장로의 젊은 이야기, 여운학)

사랑의 언어의 중요성
어린아이들이 말로 표현하는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고작 2000내지 3000개의 단어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어린아이들의 어휘력은 한계를 느낍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만을 위하여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들은 악한 말부터 배웁니다. 어린아이들이 말을 처음 배울 때 어떻습니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욕부터 배우지 않습니까? 선한 말은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악한 말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하여 친구를 칭찬하는 말보다 허물을 말하고, 격려의 말보다 조롱의 말을 많이 합니다. 흉과 허물을 말하기 좋아합니다. 별명을 붙여도 꼭 이상한 이름만 붙여줍니다. 말이 많다고 ‘참새’, 키가 크다고 ‘황새’, 뚱뚱하고 둔하다고 ‘두꺼비’,눈이 크다고 ‘왕눈이’등 기분 좋은 별명은 별로 없습니다.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어린아이들의 언어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상대방 가슴에 상처를 주는 말을 골라서 합니다. 내기분을 살리기 위하여 말 한마디도 마구 합니다. 남의 감정과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말은 상스러움을 넘어서 혐오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자녀에게 저주하는 것은 예사이고, 이웃에게 악을 전파하는 것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혀는 토하여 내는 것이 악이기 때문에 독사의 독같이 무섭다고 표현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모를 때에는 육체를 따라 살게 되므로 한마디 한마디가 어린아이들처럼 악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아십니까?, 권경흠)

새끼를 위해 죽은 암닭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농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닭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는 막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닭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닭은 죽어있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닭의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받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정한 자랑거리입니다. (목회를 돕는 명예화집, 죠지 스코트)

선교는 그리스도의 부르심
어떤사람이 한 선교사에게 아프리카 선교사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때 그는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내 아내와 아이들은 어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련되고 깨끗한 감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식하고 더러우며, 잔인한 사람들과 상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다 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싫던 좋던 선교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에 선교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섬김의 삶
사람은 누구나 높은 사람, 큰 사람, 대접받는 사람, 권세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죄인된 우리를 대신해 가장 추악한 죄인만이 지는 십자가를 지셨다. 내가 지금까지 본받으려 노력해온, 그리고 현재나 앞으로도 예수께 본받고 싶은 점은 바로 이‘낮아짐’의 도(道)이다. 낮아진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높아지려는 사람이 대부분인 이때, 예수의 “너희도 가서 남의 발을 씻기라”는 말씀은 언제나 내생활 가운데 있다. 섬기는 삶, 낮아짐의 도,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제자가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리라. (임택진)

신기루 현상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가끔 나타나는 신기루 현상은 열 또는 찬기운 때문에 대기 밀도의 급변으로 빛이 이상하게 꺾이어, 공중이나 땅위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대기 현상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신기루는 그 형체를 간직한고 있는 사물의 반대편에 나타나기 때문에 신기루를 쫓아가다가는 점차 그 실체와는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옛날 사막을 여행하던 대상들에게 있어 신기루의 존재는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당장의 필요에 급급한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할 겨를이 없이 단지 눈 앞에 보이는 신기루만을 쫓다가 점차 진짜 오아시스와는 거리가 멀어져 결국 물도 없는 사막에서 말라죽게 되는 것이다. 위장된 진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신기루만을 쫓는 사람들의 결국은 사막의 신기루를 따른 사람과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이다.

양쪽 노를 다 젓기
한 늙은 스코트랜드 사람이 작은 배의 노를 저으며 승객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어느날 한 손님이 그 노인의 한쪽 노에는 ‘신앙’,그리고 다른 노에는 ‘옳은 행위’라고 새겨져 있는 걸 보았다. 이상히 여긴 그는 이 의미를 물었는데 그 노인은 “자 보시오”하며 ‘옳은 행위’라고 써 있는 노만 저어 보였다. 그러자 배는 원을 그리고 뱅글뱅글 돌기만 했다. 바꿔서 ‘신앙’이라고 쓰인 노만 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서 노를 둘다 함께 젓자,배는 물살을 가르며 재빠르게 나아갔다. “보십시오, 이것이 기독교인의 생활방식입니다.‘믿음없는 메마른 행위’는 소용없으며 ‘행동없는 믿음’또한 죽은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옳은 행위’의 두 개의 노를 함께 젓는다면 안전과 발전과 은총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대화
어떤 목사님이 한 젊은이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냐고 물었는데 그는
“지난 5년 동안 종교를 연구해 보았으나 신통치 않아요.”하고 대답하였다.
“아,그래요? 나도 과거 15년 동안이나 종교를 연구해 보았으나 결국 포기해 버렸지요.”하고 목사님은 말했다. 청년은 너무나 의아해 되물었다.
“아니,목사님께서 그러시단 말입니까?” “네,그러다가 나는 그리스도를 대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리스도는 나를 충족케 해 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 종교를 추천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의 구세주 예수님을 추천하는 것입니다.”라고 목사님은 말하는 것이었다. (미어즈 성경핸드북)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ΙΧθΥΣ)
기독교 서점이나 교회용품을 취급하는 곳에 가면 고기모양의 형상에 “ΙΧθΥΣ”라 쓴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헬라어로 “고기”라는 단어인데 여기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비밀 스런 사연이 담겨있다.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공직에서 추방됨과 시민권의 박탈,그리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전도와 증거로 성도들은 계속늘어났고, 따라서 그들만의 비밀스런 암호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위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를 풀이하면 ‘Ιηδου? Χρ?δτο? θεο? ??ο? δωτηρ’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시다’란 말을 앞글자만 따서 만든 것이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성도들이 방랑하다가 어느 곳에 이르러 고기모양이 그려진 것을 보면 그 안에 이 단어를 썼고 그것을 확인한 다른 성도는 비록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된 그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고 함께 예배하고 음식을 나눈후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비록 세상은 그들을 박해하고 버렸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됨에 감사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던 것이다.

열 두 사도의 최후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후 68년 네로 박해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국 밧으라에서 X형으로된 형틀에서 못박혀 죽었다.
큰 야고보는 주후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요한은 끊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 당했다가 주후100년경 에베소에서 죽었고, 빌립은 부루기아에서 기둥에 매인채 맞아 죽었다. 그리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고, 마태는 애굽에서 칼에, 다대오는 버시아에
서 활에 맞아 죽었으며, 작은 야고보는 주후 62년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었다. 이들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전하다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들이 전한 사랑의 복음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있다.

염 려
염려는 누구나 버릇처럼 하기 쉬운 것이다. 안해야지 하면서 다시 하고, 안한다고 하면 먼저 한다. 어떤사람은 염려를 안개에다 비유하고 있다. 광화문 일대를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가 실은 한잔의 물이 600억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염려가 처음에는 한잔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온통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안보인다. 하나님도, 그의 약속도, 응답의 손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많은 염려가 자주 우리를 괴롭힐 것 같다. 어떻게 할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어떤 여인이 한번은 불이 난 자기 집에서 그녀의 그림들과 가장 애지중지하는 가구들을 바쁘게 끌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열심히 수고했으나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 자기 자녀 중 하나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아이를 불타는 집 속에 두고 나온 것이다. 그 어머니가 황급히 다시 방안으로 돌진해 들어갔을 때 이미 그 방은 불이 활활타고 있었고 아이는 죽어있었다. 그때 그여인은 비통한 나머지 양손을 비틀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통곡하였다. 어머니는 자기가 꺼낸 모든 가구들을 저주하는 것 같았으며 차라리 그것을 꺼내지 못했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하잘것 없는 것들을 구하려다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호기심 있는 지식 부스러기와 묘한 금언 그리고 심오한 교리 등을 불 가운데서 끄집어낸다 해도 만일 사람의 영혼을 패망시킨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양심을 고소할 뿐이다. 귀한 영혼들이 사랑의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난제를 끄집어내어 수십 가지의 토론을 하면서 50주일을 무의미하게 허비하는 것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런 문제는 그대로 두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무한히 낫다.

유산 이야기
(국민일보 1994.5.31)
세계 인류의 존경을 받는 마하트마 간디의 유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생전에 즐겨부르던 노래책 슬리퍼 샌들 찻잔 숟가락 회중시계 안경, 이 일곱가지 뿐이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위대한 사상이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도 존경을 받는다. 유산의 많고 적음이 그리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의 하나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1천만달러의 유산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큰 돈을 모두 써버려 70세가 됐을때는 거의 무일푼의 상태였다. 말년에는 방 두개짜리 집에서 딸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면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썼을까? 보통사람 같으면 자신을 위해 기업을 도모하거나 흥청망청 썼을테지만 그는 달랐다.
우리돈으로 80억원이라는 큰돈을 유산으로 받자 그는 이것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위탁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30여년의 긴세월동안 곤궁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 불구자나 병자,그리고 고아와 과부에게 베풀었다.경찰과도 긴밀하게 연락해 가엾은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주었다. 그런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무려 3만명에 이르렀다.
쓸모없이 돈을 쓰는 사람이 이세상에는 너무많다. 반면에 돈을 쓸모있게 쓰는 사람은 너무나 드물다. 그러면서 누구나 많은 유산을 자손들에게 남겨주려 한다. 1백억원의 유산을 노린 충격적인 범죄로 인해 유산안 물려주기 운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재물이 적든 많든 남기든 남기지 않든 상관없이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누가복음 12:42-44).

의식 개발
몇 년 전에 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참사랑을 베풀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기에 제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이 성경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고아와 과부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지할 곳이 없고 보호해주는 사람이 없으며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자로 나섰던 것입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해본 뒤에 저는 장애자가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여 년 전부터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또 교회 여러가지 구제사업도 장애자들 위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철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천성이 그래서인지, 아주 냉정합니다. 아무런 동정도 할 줄 모르고 끔직한 일을 봐도 별로 놀라지도 않으며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불쌍한 느낌도 없는 아주 냉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어머니가 저를 보고 냉혈동물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사람들이 겉보기에 불쌍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니까, 장애자가 제일 불쌍하고 도움을 제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두다 보니 그 다음부터는 신문에 장애자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번쩍 뜨이고 또 길을 지나다 장애자를 보면 더 관심이 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장애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의식 개발입니다.
(교회발전을 위한 의식개발, 이중표 외11인)

20세기 선한 사마리아인

세상에는 수많은 모임이 있다. 대부분의 모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임을 구성한다. 그런데 지금 소개되는 모임은 좀 특이한 모임이다. 일곱가정 정도 되는 부부모임인데 이들 부부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이 모임에 내얺는다. 물론 십일조는 다 각자 교회에 하고 그외의 십일조를 또 내는 것이다. 이 돈은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그 돈을 가지고 강원도 골짜기의 한 교역자를 계속 돕고 있고 또 갑작스런 재난으로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시원한 냉수 역할을 해오는 것이다. 새상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계모임을 갖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동창회, 상조회, 종친회, 계 등. 불붙는 살림살이 앞에서 맨몸 빈손으로 살아남아 엉엉 우는 사람에게 이름도 모르는 사마리아인처럼 손에 수표를 꼭 쥐어주고 가는 이들의 모임에 난 감탄을 연발한다. 이 부부들의 관심은 시시콜콜한 파마나, 신발이나, 차나, 아파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도울까에 있는 20세기 선한 사마리아인들이다. 어떤 부부는 아파트 방 한 개를 항상 비워두고 누구든지 와서 쉬어가도록 오픈하우스를 한다고 한다. 이 부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부부인 것 같다. 이웃을 향한 열린 마음이 없고서야 행복이 그 가슴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행복이란 날카롭게 따지고 내 것을 꼭 움켜쥐고 부들부들 떠는 감정표현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할 때 확장되는 것이다. (십대를 위한 수필 2, 김원태)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
나는 27살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어려나라들을 다니며 전도자로서, 선교사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나는 독신으로 있는 것이 너무나 싫었고 결혼하기를 원했었다. 파리의 에펠 탑 꼭대기에 서서 파리전경을 내려다 볼 때였다. 그 광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워 누군가에게 이 아름다운 정경을 말해주려고 돌아봤지만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내가 혼자라는 것을 절감했다. 성경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때 나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라고 말한 구절을 발견했다. 나는 그때 진심으로 하나님이 내겐 그 은사를 주시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나는 사역자에게 있어서 아내는 꼭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고 주위에는 언제나 매력적인 후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이 말씀을 보면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내 삶을 향해 주신 부르심을 위해 내가 독신으로 있기를 원하시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고자 하는 나의 권리를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려 놓았다. “좋습니다. 만약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저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했을 때 내 안에 새로운 자유함이 생겨났다. 나는 더이상 ‘물색하는’일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전심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몇 개월 후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을 계속해서 순종하고 있을 때,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시에서 젊고 발랄한 금발의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그녀도 또한 결혼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 놓은 후였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우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신 것이다. (네 신을 벗으라, 로렌 커닝햄)

잘 모여야지요 (국민일보 1994.6.8)
교회 출석은 성도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의무중 하나이다. 요즘처럼 놀러다니기 좋은 계절에는 예배출석률이 떨어지고 봉사하는 이들의 자세도 다소 느슨해진다. 시대적 요인으로 교회성장이 주춤하고 있다는 분석되 있지만 계절따라 교회 출석이 기복을 보이는 것은 문제이다. 모이기를 싫어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 하나
*미국아이오와주의 키오쿡 제일 침례교회 교인 린퀴스트여사는 1888년부터 88년간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성탄절이나 부활절 예배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고 담임목사 15분에게 8천번의 설교를 들었다. 기도회에는 4천번의 출석을 했으며 침상에서 드린 기도는 2만9천번. 50년동안 주일학교에서 봉사했고 그에게서 성경을 배운 많은 이들이 목사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 교회가 없었다면 어찌되었을까. 교회의 친교,주일학교,기도회,그리스도인 가정,세상의 빛과소금은 없다. 복음,온 땅에 보낼 선교사,세상의 그리스도의 몸,교회에서의 결혼식도 없다. 청년에 대한 종교교육,가정제단,외롭고 슬픈 가정의 심방,죄인을 위한 기도,청소년들의 도덕적 훈련,그리스도인 대학,죄인을 위한 사랑도 없다.
도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상태일 것임에 틀림없다. 인생의 존재의의를 다른 무엇에서 찾기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절대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외면하는 믿음을 바르다고 할 수 없다.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로 행하라. 모이기를 싫어하는 것도 습관,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에 힘쓸 일이다.(히브리서 10:23-25)

제자의 길

하나님의 왕국은 그대의 적들 속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시련을 감내할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적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며, 장미와 백합으로 둘러싸인 곳에 안주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의 그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모욕적인 행위이며 커다란 배신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당신과 같은 그러한 바램을 가지고 삶을 영위했더라면,이 세상에서 그 누가 그분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며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M.루터)

지혜로운 차선
(국민일보 1994.6.10)
요즘 대개의 도시 교회들에서 특이한 현상 하나를 보게 된다. 결혼적령기를 넘어선 30대 독신 여자성도들이 눈에 띄게 많다는 것이다. 사회전반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교회안에서는 매우 두드러져 보인다. 교회학교에도,성가대에도,기관·단체에되 없는 곳이 없다. 당사자와 그 부모가 상당히 고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아예 독신을 선언하기도 한다.
미국의 한 인디언부족은 그들의 딸이 성숙해지면 옥수수밭으로 데리고 가 인생 교육을 시킨다. 지정된 밭고랑에 서서 한번 내디딘 발걸음을 돌이키거나 한번 본 옥수수를 다시 보지 않고 지나가면서 제일 좋은 것을 따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옥수수를 따지 못하고 밭고랑 끝에 와버리는 것이다. 그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옥수수가 눈에 띄어도 다음에 더 좋은 옥수수가 나타날 것 같아 따지 않고 지나치다 결국은 못따고 빈 바구니가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인디언들은 그들의 딸에게 남편감을 잘 고르도록 교훈했다고 한다. 제일 좋고 이상적인 사람을 고르겠다고 하다가 혼기까지 놓친 이들의 경우가 바로 이런 예에 해당된다고 본다. 믿음안에서 자신과 함께할 만한 요소가 발견됐다면 과감히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이상적인 최선의 실현이 어럽다면 현실적인 차선의 수용이 오히려 낫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차선이 무리한 최선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로마서 12:16). 아울러 교회는 결혼교실의 운영을 더욱 활발히 해 이들의 포기와 체념을 막고 결혼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진정한 변혁자

오스카 써번티스야말로 인생을 바꿔놓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살아있는 실례이다. 오스카는 어렸을 때부터 문제 속에서 자라야 했다. 자라가면서 그는 장력 범죄로 열일곱 차례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감옥의 정신과 의사들도 오스카는 구제 불능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틀렸다. 짧은 막간의 자유를 누리던 어느 날, 오스카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노인은 오스카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스카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고, 차츰 친절하고 사랑 많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그는 감옥 사역을 시작했다. 워위크 감옥 목사는 이렇게 묘사한다. “솔대드의 매달 세번째 토요일 밤은 ‘오스카의 밤’이다. 재소자들은 다 모여 오스카의 메시지를 듣고, 열렬하게 복음 성가를 부른다. 그들은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진지한 자세로 앉아 있는다. 그들은 예배당의 제단 앞으로 자유롭게 걸어 나간다.” 오스카의 변화! 많은 전문가들이 몇 년을 두고 상담을 통하여 이루어보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순간의 회심을 통하여 이루어내셨다. 우리가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격분하여 날뛰는 귀신들린 광인을 유순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바꾸시는 모습을 본다. 이 광인과 오스카 써번티스를 바꾸어놓은 바로 그 능력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도 활짝 문을 열고 있다. 그분이야말로 으뜸 변혁자이시다. 당신은 그분으로 인하여 변화되었는가?
(안 믿을 수 없는 예수, 플로이드 C.맥켈빈)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언젠가 내 친구 두사람이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우리집에 들러 며칠 동안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게도 함께 가자고 권해서 같이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길을 가던 도중에 친구 중 한 사람이 모자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자를 우리집에 놓고 왔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집으로 편지를 해서 아내에게 좀 부쳐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아내에게서 받은 편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이 나에게 특히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집을 지붕 꼭대기에서부터 아궁이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모자는 보지 못했고, 제가 발견한 것은 그분들이 남기고 간 축복 보따리뿐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느낍니까? 당신은 축복을 남깁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까? 당신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줍니까, 고통을 안겨줍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도 대단히 유익할 것입니다. “나는 평안을 주는가, 아니면 분란을 남기는가?” “나는 용서하는가, 아니면 원한을 남기는가?” “나는 기쁨과 사랑을 주는가, 아니면 좌절과 증오를 남기는가?” 어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자신들의 흔적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거 자기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기를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남을 존중해주고 격려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때 목동이었습니다, 필립 켈러)

칼빈과 윌리암 화렐

27세 때 저술한 <기독교 강요>로 그 이름이 온 유럽에까지 알려진 존 칼빈이 어느날 이탈리아에 잠깐 들렸던 적이 있다. 갔다가 곧 오려는데 전쟁이나서 부득이 지금 스위스지방으로 돌아서 오려고 제네바에 들려 하루를 자게 되었다. 그때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하던 윌리암 화렐이 그를 찾아와 함께 도울 것을 요청했다. 칼빈은 다른 계획된 일이 있는데도 여기에 있으라고 하니 허락할 리가 없었다. 계속되는 거절에 윌리암 화렐은 “나 보기에는 당신이 여기에 잠깐 들린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장차 이것은 당신이 여기서 일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만일 당신이 그냥 간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날 저녁의 일로 그는 일생동안 제네바에 머물게 되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뜻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할 때가 있다. 그러할 때에도 공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하겠다.

파 송

“자, 이제부터 너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 사랑이 없으면 내가 너에게 일러준 모든 일들도 아무 소용없어. 이제부터 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며 평안하게 살 수 있을거야. 또한 온유하고 친절함도 배우게 될거야.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내가 너를 항상 붙들어줄께.” 나는 누군가를 또다시 찾아가려고 나의 담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떤 때는 담옆에서 마냥 기다렸고, 어떤 때는 손을 잡아주기도 했습니다.-중략- 우리가 그 옆을 지나가면 놀라운 사랑이 그들과 우리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나는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평화를 발견합니다. 그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믿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안에서 하나되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글로리아 J.에반스‘담’중)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

스트로맨이라는 연구원이 교회를 드나드는 청년 7천명을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60% 이상이 선한 생활에 힘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참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 이상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통계자료가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공로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공로주의를 배격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지혜는 무엇인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시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경건생활에 힘써도 내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기까지 헌신해도 자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드는 자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옥한흠)

하나님만이 아신다.

의사들간에 쓰는 은어중에 ‘G.O.K'라는 은어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God only Know)'라는 뜻으로 의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수단과 방법을 다 쓴 후에 그결과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뜻으로 쓴다고 한다. 몇년전만해도 불치병으로 생각되던 많은 병들이 현대 의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점차 그 위세가 꺽이고 상당수 많은 병들은 간단한 약물치료로 완치가 가능할만큼 현대 의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최첨단 시설에서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들이나, 첨단장비로 환자들을 진찰한 많은 의사들이 마지막 장벽에 부딪치면 ‘G.O.K'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의사들의 치료 대상인 사람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서 베들레헴(떡집)으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매우 처참했다.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해 주권을 상실했고, 사회의 지도층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아픔이나 고통등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더구나 백성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할 제사장들조차 권력층과 결탁해 재물을 모으는데만 급급했다. 전 국토의 1/5만이 경작이 가능했고, 나머지는 쓸모없는 박토였으며, 그나마 경작이 가능한 땅도 잦은 가뭄과 병충해등으로 피해를 입었다. 가난과 굶주림,질병과 과중한 세금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차지해 소망은 모두 끊어진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유대‘베들레헴’에 오셨다. ‘베들레헴’이란 히브리어로 ‘떡집’이란 뜻이다. 육적 굶주림과 고통으로 인해 허덕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육적 굶주림’과 함께 보다 더 중요한 ‘영적 굶주림’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베들레헴’으로 오셨던 것이다.

핵폭탄보다 무서운 위력

현대의 무기중 가장 강력하고 두려운 것으로 꼽히는 것은 단연 핵폭탄이다. 이 핵폭탄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다른 폭탄이 폭발로 인한 피해나, 파편으로 인한 상해로 그치는 데 비해 네번에 걸쳐 피해를 입는다는 점이다. 먼저 폭발로 인한 피해가 있고, 다음에는 폭발시 엄청난 고열이 발생해 주번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거나 녹여버린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핵 폭풍이 발생해 사방 수십킬로 지표면에 있는 모든 물체를 파괴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이모든 파괴가 지난 후에도 방사능 낙진이 오염되어 수십년간 그 지역은 그야말로 황폐화 된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오심은 단지 병고침과 오천명을 먹이심에 그치지 않고 인류 최대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그효력이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인류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 된다는 데서 핵폭탄보다 더 큰 사랑의 위력을 느낄 수 있다.

헌혈과 보혈

내가 근무하는 교무실에 내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될 연령의 딸아이를 두고 있는 선생님이 한분 계신다. 불행히도 그 딸아이가 태어난지 얼마 후부터 원인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뇌의 기능에 이상이 생겨 육체적 성장은 정상적이지만 정신연령이 미달이고 가끔씩 혼미상태에 빠지는 소위 간질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래도 그 선생님은 그동안 아이가 커감에 따라 정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노력해 왔는데 학교에 입학할 연령이 되었는데도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 첫딸의 치료를 위해 그 다음 아이를 낳는 것도 포기한 채 6년 동안 온 정성을 다했는데도 효과가 없으니 거의 절망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주변의 선생님들이 하도 딱해서 그 아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아이를 하나 더 낳아 새로운 기대를 갖고 사시기를 권한 적도 있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지질 않습니다. 그 아이를 포기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몇 번이나 직접 나의 피를 했습니다. 때로 머리속에서 차라리 포기해야지 하는 결단을 내려보는 적도 있지만 나의 가슴이, 나의 본능이, 나의 피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나면 정말 위로할 말을 잊게 된다. “나의 피가 그것을 용압하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나의 피가 멎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십자가상에서 모든 인간을 위해 자신의 피를 온통 흘려주신 예수님의 심정이 딸을 위해 수혈을 한 아버지의 심정과 같은 것이 아닐까? 회복될 줄 모르는 딸을 부여안고 눈물 흘리는 아버지처럼 속죄의 피를 흘려주셨건만 죄에서 회복될 줄 모르고 간질병 같은 증세를 나타내고 있는 요즘의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눈물을 흘리시며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계실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예수님,겨자씨,좁쌀, 홍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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