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캅의 최후승리
때는 서기 156년 초, 교회 박해 시대였다.
흑해로 들어가는 다다넬즈 해협을 굽어보며 에게해를 끼고있는 서머나는
어디로 보나 아름답고 화평한 도시였다.
그러나 무럭무럭 연기만 태우며 서서히 진행되던 박해의 기세는
이제 열을 뿜으며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다.
광신적인 유대인들의 선동을 받은 이방폭도들은 피에 주린 마귀 떼들 같이
거리를 휩쓸며 죄없이 길을 거닐고 있는 기독교도들을 나꿔채어서는
지금 한창 경기가 진행 중인 투기장으로 끌고 간다.
로마인 총독 앞에서 벌어지는 약식재판은 어디까지나 형식뿐이다.
"너 그리스도를 저주하겠느냐? 시저에게 분향하겠느냐?"
이 두 마디의 간단한 질문이 있을 뿐이다.
"싫다" 기독교도들은 분연히 대답한다.
그러면 재판은 몇 초만에 끝나 버리는 것이다.
총독은 손을 들어 신호한다.
총독의 신호가 내려지기가 바쁘게 한 사람, 또 한 사람씩 투기장으로 던져 진다.
아래에서 미친 듯 치달리고 있는 성난 사자들에게 던져진
그들의 육체는 산산이 흩어져 버린다. 죽음은 순간적이다.
그리고 처절하다. 관중들은 미친듯이 기성(奇聲)과 환성을 올린다.
개중에는 이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고 변절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군중들의 야유와 욕지거리를 앞뒤로 받으면서
제단에 분향하기 위하여 호송되어 나간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런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은 다시는 기독교도의 교회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동시에 비겁하다는 이유로 이방인 사회에서도 천덕꾸러기가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도들이 하나, 둘 연달아 색출되고
총독의 법정에 끌려가게 되니 사태는 바야흐로 험악하다.
초긴장의 분위기다. 대부분이 용기있게 순교를 당한다.
그러나 피에 굶주린 흡혈귀 같은 군중들의 중심에는 무한정으로 만족이 없다.
마침내 군중 가운데 한 자가 소리쳤다.
"폴리갑을 끌어내라, 그가 바로 괴수다! "
이 소리는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울려 퍼져
투기장이 무너져 내릴 듯한 우뢰소리로 변한다.
기독교도들은 재빨리 폴리갑에게로 달려갔다.
생명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함이다.
노인은 기도하고 있었다.
86세의 성상을 그는 오로지 서머나에서 목회일에 바쳤다.
젊었을 때는 서머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에베소에서
사도 요한 밑에 제자로 있던 폴리갑이다.
폴리갑은 간단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다급하고 당황하게 부르는 소리에 마지못해서였다.
"목사님, 피하셔야겠습니다. 군대들이 오고 있습니다."
노인은 일각이 급한 위험도 대수롭지 않은 듯한 유유한 태도였다.
"목사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목자를 잃어 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양떼들을 생각하십시오!"
더 한층 다급해진 그들은 애원하듯 재촉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한숨을 내쉬며 폴리갑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저들이 이끄는대로 몸을 맡겨 버렸다.
즉시 사람들은 그를 도시에서 상거가 얼마 되지 않은 한 농가에 숨겨 두었다.
한편 투기장에서는 총독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명령은 벌써 내려지고 수색대원들은 폴리갑의 저택으로 몰려들었다.
서머나시의 치안 총책임자 헤롯이라 하는 자의 진두 지휘하에서 였다.
이 자는 폴리갑의 색출을 일생을 통해서도 포착하기 드문
큰 영달의 기회로 노리고 있는 것이다.
시종 폴리갑은 조금도 놀랜 빛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거의 평생토록 전세계에 널려 있는 교회마다
기억나는대로 그 이름을 외며 기도하던 폴리갑이다.
그 날밤 폴리갑은 꿈을 꾸었다.
자기가 베고 있던 베개가 몽땅 불에 타버리는 꿈이었다.
주위에 시중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폴리갑은 그 소감을 말했다.
"아마 내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하면서
나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 것 같소."
폴리갑의 신변을 안전히 보호하는 길은
폴리갑의 거처를 자주 이동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교회 장로들은 판단했다.
그리하여 다시 야음(夜陰)을 틈타서
다른 농장으로 피신시켜 폴리갑을 지붕 밑 방에다 숨겨 두었다.
헤롯의 부하들은 좀 전에 폴리갑이 숨어 있던 데까지 종적을 밟아 따라왔다.
마침 뒤처져 있는 하인을 고문한 결과
폴리갑이 숨어 있는 최후의 장소마저 탐지해 내고 말았다.
원수들은 어둡기를 기다려 부근에 잠복해 있다가 마침내 농가를 일거에 습격하였다.
폴리갑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적들이 들어오는 낌새를 눈치챈 시중하던 이들은 폴리갑에게 얼른 피신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폴리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쓸데없는 일이오. 하나님의 뜻대로 될테니까."
군인들이 문을 박차고 뛰어 들었을 때
폴리갑은 응접실에 앉아 태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의 그 어딘지 모르게 당당한 위세에 흠칫하였음 인지
침입자들은 우뚝 그 자리에 서 버렸다.
"들어들 오오, 친구들," 폴리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도망갈 사람은 아니니까 염려말고 여기 앉아 음식들이나 드시오.
그러나 한 가지 소청이 있소이다. 한 시간 동안만 기도하게 해주구려."
"예, 그러시죠."
노인의 너무나 침착한 태도에 기가 질린 대장은 얼른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구태여 죽음을 자처하실 필요까지야 없지 않습니까?
또 '시-저는 신이다'라는 이 한 마디에 무어 그리 구애되실 게 있습니까?
그리고 분향하는 일도 말이죠.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저희들은 속심으로 그런 것을 믿어서 그러는 줄 아세요?
순 강제가 아닙니까? 마지못해 하는 거죠."
헤롯은 친근히 말을 걸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일언 반구도 입을 열 필요가 없는 듯 싶었다.
"폴리갑 선생님, 저 좀 보세요.
참으로 선생님 같으신 분은 이런 일을 당하기에는 퍽 아까운 분이세요.
마음을 돌려 보시지요."
헤롯은 끈질기게 권했다. 폴리갑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귀관의 충고대로 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들의 설득이 아무 소용 없음을 알자
헤롯 부자의 친절로 위장한 가면은 이내 벗겨져 버렸다.
수레도 멈추기 전에 사정도 없이 늙은 몸을 난폭하게 떠밀어서는
수레 밖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폴리갑은 크게 다친 정강이를 절뚝거리며 서머나 총독 앞에 나타났다.
군중들은 떼지어 몰려 들었다.
"그대가 폴리갑이뇨?" 로마인 총독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
"그대는 국법을 아느뇨?"
" 잘 압니다. "
"그럼 그대의 나이 값을 해서라도 국법을 준수하라"
"안하겠습니다."
"이봐, 마음을 고쳐 먹어, 시-저에게 서원하라.
「이 기독교도들을 다 탄핵해 버려라.
시-저를 믿지 않는 이 무신론자들이여」하고 복창하라! "
이 때 폴리갑은 야유하는 군중들을 치켜다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익살스럽게 소리쳤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무신론자들이여!"
"이 늙은이가 나를 놀리는구나. 욕을 해! 그리스도를 저주해! "
폴리갑은 총독을 정시(正視)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팔십 육 년 간 나는 그를 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분도 내게 대하여 아무 잘못하신 일이 없습니다.
나를 건져 구원해 주신 나의 대왕을 모독하다니 그게 될 말입니까?"
"빌어먹을 소리!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때 총독은 군중들을 가리키며 폴리갑을 야유했습니다.
"저 군중들에게 '날 좀 살려 주시오'하고 빌어 보아라."
"귀관은 시-저 의 대리자이요,
시-저 의 대리자로서 나는 귀관을 대접하되 저 백성들에게는 아무 빚진 것이 없소."
"내게는 맹수들이 있는 줄 모르느냐?"
이와 같이 말하는 총독을 폴리갑은 응시했다.
그러나 조금도 동요하는 빛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곧 불러내십시오."
"너는 우리 맹수들까지 업신여기는구나. 그럼 다른 조처를 하겠다.
너를 그냥 불로 살라버리겠다. 어떠냐?
그대 용감한 그리스도인이여, 이제는 네 마음이 좀 변하겠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귀관의 불도 한시간이면 족합니다. 그 후로는 끝납니다.
귀관이 회개치 아니하면 지옥불은 영원토록 귀관을 사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옵소서."
총독은 대답할 말을 생각해내려 했으나 아주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죽음을 이토록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을 일찍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총독은 군중들에게 선포했다.
"폴리갑은 그리스도인임을 스스로 자백했다.
처형은 화형으로 한다. 형은 곧 집행될 것이다. "
군중들은 득의의 환호성을 질렀다.
사람들은 잽싸게 투기장 한 가운데 나뭇단을 쌓아올렸다.
군인들은 폴리갑을 화형주(火刑柱)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옷을 벗으라고 명했다.
저들이 화형주에다 폴리갑을 못박으려 했으나
폴리갑은 한마디로 그것을 제지해 버렸다.
"그럴 필요가 없소. 불의 곤욕을 견디는 것이 주님의 뜻이니
불더미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게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이요.
나를 가만 내버려두오. 다만 기도하도록만 허락해 주시오."
사람마다 그를 주시하고 놀랐다.
포로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일거일동이 자유자재다. 태연작약하다.
주위의 소음을 무시하고 폴리갑은 큰 소리로 몇 초 동안 기도를 올렸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영광스러운 특전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 때 누가 횃불을 겹겹이 쌓아 놓은 장작 더미에 갖다 대었다.
삽시간에 불길이 솟아올라 폴리갑을 둘러쌌다.
그러자 별안간 무슨 이상한 힘에 억눌리는 듯 불길이 아래로 꺾여 휘어져 내려갔다.
공포에 사로잡힌 듯 군중들은 뒷걸음질쳤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총독은 저주스러운 욕설을 내뱉었다.
"이 예수쟁이는 살아 생전보다 죽을 때에 더 해독을 끼치는 존재다."
"죽여 버려라!" 그는 날카롭게 일갈(一喝)했다.
불기등 사이로 칼날이 번쩍였다. 그리고 일은 끝났다.
군중들은 풀이 죽은 채 말문을 잃고 어안이 벙벙하여 허물어져 내려갔다.
노성도의 장렬한 순교의 사실은 즉시 온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스도인들은 목놓아 울었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는 용기와 격려가 스며 있었다. 장래는 암담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은 없다.
폴리갑의 죽음이 바로 이것을 입증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애도에 잠긴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받는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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