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노병선 최초로 기독교 신앙변증서 저술

好學 2010. 10. 6. 21:32

 

 

노병선 최초로 기독교 신앙변증서 저술

 

 

1. 감리교회의 구역제도

한국 감리교회의 독특한 선교정책은 "구역제도"(The circuit system)에 있다. 구역은 신도들의 모임인 예배처(chapel)와 선교처로 조직된다. 구역내의 지도자로서는 구역장인 장로사(장로 목사:Elder)가 있으며 각 예배처와 선교처를 순행하여 돌보는 집사(집사목사:Deacon)가 있다. 이 분들은 연회(年會)에서 안수받은 목회자로서 오늘날 "정회원"목사, "준회원"목사와 같다. 예배처(chapel)와 선교처 안에는 성도들의 모임인 "속회"가 있으며 실제로 예배를 인도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평신도 사역자들이 (본처 사역자)있다. 평신도 사역자는 속장,권사,전도사(평신도 전도인,Local preacher)이며 이들을 통털어서 "평신도 보조자"(Lay-Assistant)또는 "조사"(helper)라고도 한다.

이러한 구역내의 평신도 전도인들이 3개월마다 한번씩 모이는 회를 "계삭회"(The Quaterly conference)라 하였고 이 계삭회에서 각 예배처와 선교처에 평신도 전도인을 파송하고 임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도인 양성을 위해 사경회를 개최키도 하였으며 신학반을 두어 목회자를 양성키로 하였다.

 

이러한 감리교회의 선교정책으로 안수받은 목회자(목사)가 없더라고 성도들 스스로가 교회를 형성시키고 확장시켜 나가는 감리교회의 독특한 교회제더이며 개척선교정책이다. 그러므로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사에 의해서 교회가 설립된 선교해 나간것만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지도자와 전도인이 되어 교회를 이루어 왔다. 평신도 전도인이야말로 한국교회를 설립하고 이끌어간 핵심이요 주역이었다.

한국 기독교회의 최초 교회인 정동교회에 예배처(Chapel)가 형성된 것은 1885년 10월이었고 선교처로는 배재학당,이화학당,정동병원,정동부인병원,종로서점(대동서시)이었다. 이러한 예배처의 지도자(전도인)을 양성키 위해 별도의 건물(가옥)을 마련한 때가 1887년 10월 9일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구역회가 조직된 때는 1889년 12월인 것이다. 정동구역회가 조직될 때는 복음이 이미 서울지역 뿐 아니라 제물포와 평양지역으로도 확산되 나가던 때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연구하고 밝혀졌지만,한국교회가 주역이며 밑거름이 된 평신도 지도자,전도인에 대해서 밝혀진 사실이 극소하다. 정동교회의 최초 교인이었으며 한국인 전도자는 한용경,유치겸,이무영,송귀영,문경호,김연창,노병일,조명은,박윤섭,김창식,최병헌,정인덕,노병선,노광옥,민찬홍,이경직,양흥묵,윤창열씨 등이다. 또한 여성 전도자로서는 김사라,노수산,메미례,이슬비씨등이다. 이분들이 실제로 정동구역의 각 예배처와 선교처에서 직접 선교 활동을 맡아 수고한 분들이다.

 

여기서는 한국감리교회의 초기 교인이며 전도인중에서 노병선 선생에 대하여 밝혀보려한다.

놀라웁게도 노병선 선생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기독교신앙변증서를 저술한 분이며, 협성회 창립인이고,한국기독교 최초 청년회원 엡윗청년회 창립인이었다. 또한 정동교회의 초대 엡윗청년회 회장이었고 정동교회 설교자이었다. 배재학당 영어교사였으며, 상동 공옥학교,평양광성학교 교사로도 봉직하신 분이고 한국 최초 유치원인 "정동몽양원(유치원)"설립의 발기인이 기도 하셨다.

노병선 선생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 밝혀진 바가 없으므로 선생의 사위되시는 조병옥박사의 회고록과 현재 생존해 있는 따님(노정옥여사)증언과 연회록 및 "조선크리스도인 회보"등을 중심으로 노병선생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려한다.

 

2. 출생과 성장

노병선생은 1871년 평북 철산에서 농가의 아들로 출생하셨다. 선생의 성장과정은 알 수 없으나 선생의 따님인 노정옥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13세 경에 꼴베러 나왔다가 곧바로 서울로 갔다고 한다. 신학문에 뜻을 두고 용기를 내어 서울에 왔지만 그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정확히 밝힐 자료가 없다.

그러나 추측할 수 있는 점은 서울에서 초기 선교사와 만나게 되었고, 선교사를 도와 일하면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하지 않았나 사료된다. 이렇게 추측하게 되는 것은 선생의 1897년 저술인 "파혹진선론"이란 책을 보아서이다. 이 책은 우선 선교사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 돈을 쓰며 이국땅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출판소를 설립하여 책을 출판하여 보급하는 봉사와 헌신을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병선 선생은 자신도 이러한 의혹을 가졌으나 선교사들이 이러한 사랑과 봉사와 헌신을 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을 알때에만 의혹을 피할 수 있고 참된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기독교를 변증하고 증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노병선 선생은 선교사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과 같이 생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가능성은 노병선선생이 영어를 해득하였을 뿐 아니라 자유롭게 영어로 통화할 수 있었고 선교사들의 통역인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3. 배재학당시절 - 협성회와 독립협회활동

노병선선생은 선교사들과 접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깊이 가지게 되었으니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제1회 명예 졸업하였다. 초창기 배재학당은 수시로 입학하고 학습의 능력대로 진급하기도 하며 졸업하기도 하였는데 1897년에 첫 명예 졸업생을 배출했다.이때 노병선선생과 함께 졸업한 분은 리승만,정교,여운형,주시경,오긍선,최재학,윤성열,신흥우,정태응씨 등이다.

노병선선생은 배재학당 시절에 협성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초대 임원중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회장은 이익채씨,서기에는 오긍선,이응진이었으며,회계는 류영석,민찬호씨였다. (협성회보 1권1호)당시 배재학당의 협성회는 독립협회의 자매단체로서 토론회를 통해 충군애국 정신과 근대시민 정신과 사회개혁 사상 및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었다. 노병선 선생은 협성회의 토론회 연사로 적극 참여 활동하시었다. 또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에도 참여하시었다.

 

4. 엡윗청년회활동 - 창립위원 및 정동교회 초대회장

노병선선생은 1897년 5월 5일 창립된 한국기독교 최초 청년회인 엡윗청년회의 창립 5인 위원중 1인이었다. 창립 5인 연합위원은 조원시목사(H.G. Jones,監會官),노병선(배재학당 대표),김기범(제물포 대표),리은승(상동교회 대표),노블(선교사 대표)이었다.

중앙본부 임원의 초대 총무는 조원시목사였으며, 노병선선생은 통신 국장직을 맡아 전국 각 교회 엡윗청년회 지회를 조직하며 활동하는 일을 지도하였다. 또한 1897년 10월 31일에 조직된 정동교회 남자 엡윗청년회인 "윌는(warren) 청년회"의 초대회장으로도 활동하였다. 정동교회 여자 엡윗청년회는 "죠이스(Joice) 회"라 하였다. 당시 남자 청년회는 배재학당과 소년원으로 조직되었고 여자 청년회는 이화학당과 소녀들로 조직되었다. 1897년 12월까지 3개지회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은 달성교회의 "말일유회",인천지회의 "나인지회"평얀지회의 "꾿션회"이였다. 엡윗청년회는 복음전도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협성회와 독립협회와 연관되어서 자주 독립사상,평등자유 사상,민족구국 신앙을 고취시키고 실현시키는 청년 자치단체이었다.

 

5. 개척전도 및 목회활동

노병선선생은 정동교회의 권사로서 한국 감리교 초기개척 전도인이요,설교자로서 활동하시었다. 1898년 8월 31일에 모인 "연환회"(매연회)에서 노병선선생은 최병헌선생과 함께 서울 정동교회 계삭회의 본처 전도인(Local preacher)으로 파송받았다. 당시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 보면

1899년에는 정동구역 동대문 교회에 파송받아 전도인으로 목회활동 하였다. 1899년 12월 27일자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 보면 동대문 교회 소식이 보도되어 있다.

[이 회당에는 로병선씨가 젼도 ㅎㄴㄷ이날 하오 칠뎜죵에 남녀 교우들을 모호고 례물을 셔국 풍쇽디로 구세쥬 탄일 나무가지에 달엇다가 긔도 찬미 후에 연설하고 기쁘게 논하 주었다더라.]

 

노병선선생은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동대문교회 설교자로 파송받아 목회와 전도활동을 하였으며 1899년에는 연회 서기로도 활동하였다. 1901년 연회록에 의하면 노병선선생은 송귀영권사와 함께 정동제일교회 소속권사 3년급이시였으며 파송은 "동대문 볼드윈 예배처"(East Gatem,Baldwin chapel)로 받았다. 또한 남지만 감리사 조원시 목사는,

[노병선형제는 배재학당 영어선생이며 본처 전도인으로 서울 동대문 곁에 있는 볼드윈 예배처에서 활동했다. 교회는 지난 몇해보다 더 좋아졌고 예배에는 그전보다 더 많이 참여하고 있으며 소년 매일학교(The Boys Day School) 도 잘 운영되고 있다.] 고 보고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노병선선생이 배재학당 영어선생이었음과 매일학교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병선선생은 1902년 5월에 다시 본교회인 정동제일교회로 아펜젤러(H.G.appenzeller)목사와 함께 파송받았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이해 6월에 순직하여 실질적인 정동교회 목회는 노병선선생이 맡아 감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벙커(D.A.Bunker) 목사의 정동제일교회에 대한 연회보고를 보면 알 수 있다.

["제일교회의 목회는 지난(1902) 10월에 맡았다(그러나 전념치 못했다).규칙적인 예배는 주일마다 아침.저녁으로 지켜지고 있다. 노씨(노병선)는 거의 직접 목회활동을 도맡아하고 있다. 그는 설교도 도맡아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든면에서 만족스럽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펜젤러목사가 순직한 후 곧바로 최병헌목사가 목회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노병선선생이 맡아서 목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병선선생은 1903년부터는 스크랜톤(W.B.Scranton)박사의 조사(helper)로서 남부지역 순행전도하였고 특히 교육운동을 장려하며 지도하였다. 1907년 연회에 스크랜톤박사의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지난(1906년)10월 공주로 여행하여 그곳 학교에 관심두며 여행하였다. 나의 조사(helper) 노병선씨는 공주에서 25마일 거리의 마을,강하류 지역인 놀미(Nolmi)에 교사로 적당한 분을 세웠다. 그는 거기서 도왔고 선한 사업에 충성하였다. 남부의 학교들은 노(병선)형제와 나 자신이 지난해 동안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버딕(M.Burdick) 선교사의 보고에도 ["스크랜톤박사의 조사(helper)인 노병선은 교회와 학교에 유익한 협력자이다."]고 하였다.

 

6. 애국 계몽 교육활동

노병선선생은 1907년 이후 전도와 목회활동보다는 애국 계몽교육운동에 주력하시였다. 이 사실은 앞으로 더 밝혀져야할 부분이지만 몇몇 기록된 자료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17호 20면)에 노병선선생은 상동교회의 공옥학교교사로 게재되었다. 당시 상동교회와 공옥학교 분위기는 민족구국 운동의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때 전국 엡윗청년회 대표들이 상동교회에 모여서 보호조약무효상소 운동을 전개키로 결의 했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서 죽음을 각오로 성공될 때가지 상소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종로로 나가 대중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종로까지 증원하여 달려온 일본군과 맞붙어 싸웠으나 일본군의 발포로 인하여 해산되고 말았다. 이때 이들은 교육을 통한 민족독립 구국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하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공옥학교는 이러한 때에 설립되어 상동청년 학원과 함께 민족독립운동의 웅지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원순옹은 노병선선생을 "항일 투사"라 하였는데 어떠한 독립투쟁을 하였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따님인 노정옥 여사는 "부친은 일본 말도 배우지도 않고 쓰지도 않으셨으며 일본인과 마주쳐도 영어로 말하셨다"고 술회한 것으로 보아 민족의식을 굳게 가지신 분이셨고 교육운동을 통한 민족의 자각과 자주독립을 기하신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예수교 회보"4권 21호와 "그리스도인 회보"에 보면 1912년 여름에 설립된 정동몽양원(유치원)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시었다. 1920년대에는 평양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었다. 현재 배재고등학교 소장 마이클로필림 자료에 보면 노병선선생의 주소가 경성냉동으로 되어 있으며 광성학교 교사로 명시되어 있다. 노정옥여사는 경성의 주소는 맏아드님이신 노정훈씨 집 주소이고,부친은 광성학교에서 교편생활하시었다고 술회하였다.

 

7. 말년의 생애와 가족상황

노병선선생의 사위되는 조병옥박사의 회고록에 보면 자신의 혼인에 대한 기록에서 "윤성열씨의 모친 소개로 대한제국 시대에 고등관의 벼슬까지 한바있는 노병선씨의 따님 노정면양과의 청혼"이라 했다. 또한 "장인될 노병선씨는 반 승락하면서 장모가 될 오씨에게 승락받으라"고 회고하고 있으며, 1914년 미국으로 유학 항해중 하와이에 잠시 머문 이유를 기술하면서 "내 장인인 노병선씨와 결의형제를 맺은 바 있는 리승만 박사를 만나는 것"이라 술회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노병선선생은 대한제국 시대에 고등관을 지내신 분임과 그의 부인은 오씨이며 리승만박사와의 의형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노병선선생은 언제 결혼하셨는지 밝혀지진 않았으나 부인 오씨에게 3남 3녀를 두시었다. 장녀 :노정면(조병옥박사 부인),장남:노정훈,차남:노정원,삼남:노정은,차녀:노정숙,삼녀:?. 그러나 오씨 부인이 별세하신 후 1920년 평양광성학교에 계실때 주변에서 재혼을 권하여 산정현교회 교인인 조용선양과 재혼하시었다. 부인 조씨에게서는 3녀를 두었는데 노정희(별세),노정옥,노정내씨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직계 자손으로는 노정옥,노정내씨 뿐이시다.

 

노병선선생은 1930년대에 서울 창천동으로 이사하시어(서대문구3 창천동 51-6)원한경(H.G. Underwood)박사댁과 한 집처럼 다녔고 원박사의 자녀들과 선생의 자녀들이 친하게 다녔다고 한다. 또한 백낙준박사와도 자주 왕래하셨다한다. 교회는 이필주목사님이 시무하실 때 창천교회 출석하시었고,이필주목사님이 떠나신 후 연세대 교회에 출석하셨다고 한다.

노병선선생은 일본말을 배우지도 않으셨고 창씨개명도 거부하시었다. 일제 말기에 그들의 등살에 못이겨 능곡으로 피난 은거생활하시었다. 능곡의 삼성당이란 동네 교회에 출석하였고(현재 능곡감리교회) 청렴결백하셔서 재산도 하나없이 집 한채만 남겨놓고 1941년 1월 11일 70세를 일기로 별세하시었다. 별세하실 때 "승만이 형,승만이 형"을 부르며 별세하셨다 한다. 이승만박사도 해방직후 귀국하여 제일 먼저 노병선선생을 찾았다 한다.

 

6.25때까지 가족들은 능곡에 거주하였는데 6.25때 조병옥박사의 처가라고 해서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집한채 마저도 불질러 버렸고 이때 선생의 자료.문서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한다. 노병선선생의 묘지는 능곡에 있었으나 최근에 모란공원으로 이장하였고 부인 조씨도 1986년 1월에 별세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