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남궁혁(南宮爀) 장로교 목사 신학자 납북인사

好學 2010. 10. 6. 21:31

 

 

남궁혁(南宮爀) 장로교 목사 신학자 납북인사

 

남궁혁 (1882-1950)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요 최초의 신학교 교수로서, 해방 이후에는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총무로 제직하고 있다가 6.25사변때 공산군에게 납북되어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882년 7월 1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은 한말(韓末)의 애국지사 가문이었으며 그의 외조부(임씨<任氏>)는 승지(承旨)와 평양감사를 지낸 고관이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등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그의 집은 경기도 용인으로 피난가게 되어 세살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그리고 외조부가 평양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평양으로 따라가 일곱살까지 평양감영에서 성장하였다. 총명함과 재질이 뛰어나 평양으로부터 용인에 돌아와서는 한문을 익혀 백일장에 등과하기도 했으며 1896년에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고, 졸업후 인천세관을 거쳐 목포세관 등 공직에 1901년까지 제직했다.

 

그가 목포세관에 있을 때 목포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그의 총명과 재질을 간파하여 교회로 인도하기 위하여 무척 노력하였다. 선교사들은 서울 정신여학교 교장에게 부탁하여 그에게 배필될 만한 신앙의 여성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여, 그는 황해도 솔내(松川)의 명문출신인 김함라(金涵羅)를 만나게 되었고 1908년 게일(J.S.Gale)선교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선교사들은 목포 영흥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그를 광주 숭일중학교로 옮기게 했다. 그의 영어 실력은 뛰어나 강습을 받기 위해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후일 한국 사회의 명사가 된 김성수.김병로 그리고 장면의 부친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다. 부인은 선교사들이 기대한 그대로 자신의 남편을 훌륭한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의 신앙은 날로 자라 드디어 1917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1921년 제15회로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첫 목회지는 광주양림교회였으며, 1922년에는 미국으로의 유학길이 열려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4년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다시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의 박사학위 과정에 진학하였고 1925년에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학위논문은 귀국한 후 제출되었고 192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귀국하여 1925년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교수직의 수행과 함께 성서번역사업 성서의 주석 발간 및 신학교 교우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까지 맡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일을 도운 인물로서 김인서, 강흥수, 김재준 등이 있었다. 그는 후배를 극히 사랑한 도량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형룡목사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을 때 신학교수의 길을 열어 주었고, 김재준 박사의 생계를 위해서도 염려하였으며, 이성휘,송창근 박사 등 후배의 진로를 후원해줌으로써 한국교회를 활기띄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1938년 9월 20일 장로회신학교는 일본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사실상 폐교되었다. 신사참배에 동의할 마음이 없었던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해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조국의 해방으로 귀국한 그는 곧 미군정청장관의 요청으로 적산관리처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그 후에 재무부 세관국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부패한 정치정세 속에 더 이상 몸을 담지 싶지 아니하여 1948년에 관리생활을 청산하였다. 48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후신이라 하여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려는 무렵 박형룡 목사가 그를 찾아와 교장으로 취임해 보려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니 사양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미 그는 그때에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찌기 애국지사 이승만이 일제와 싸우다가 망명길로 떠아면서 그의 집에 들러 신세지고 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된 이박사의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193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 노회장이 되었고 그해에 또한 총회장에 선임되었다. 그에게는 곧은 기질이 있는가 하면 부정을 미워하는 청결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남궁혁목사는 교회 연합사업에 뜻이 있어 한국기독교교회연합(KNCC)의 총무직을 수락하여 열심히 헌신하였다.

 

6.25 사변 때 그는 서울을 떠나 남하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어느날 그의 집에 들어닥친 공산군들은 가택수색을 하여 그를 체포했으며 그는 8월 23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이번에는 세번째로 평양을 향해 돌아오비 못하는 길로 강제 납북되었다. 그는 감금생활 중에 있어서도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켰으며 공산당에게 협조하지 아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북괴 정치보위부로부터 기독교대표로 남한을 행해 방송을 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하는 감언이설의 유혹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남궁 목사의 최후는, 금식을 계속하면서 기도하다가 기운이 없어서 쓰러진 채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