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오은선 배낭 열어보니 트럼프가… “캠프서 심심할때 딱이죠”
선크림-립글로스도 등반 필수품
오은선이 지난달 30일 해발 4200m의 베이스캠프에서 이뤄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14좌 완등 과정에서 힘들었던 순간, 가족에 대한 느낌,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제공블랙야크 |
여성 첫 14좌 완등 오은선 대장(28044247.1) 155cm, 48kg의 오은선은 작고 가볍다. 복잡한 걸 싫어한다. 고산 등반 시에도 속공 전략으로 등정을 끝낸다. 가벼운 체구와 등반 스타일답게 그는 배낭도 간편하게 꾸린다. 베이스캠프 생활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오은선의 가벼운 배낭과 단순한 베이스캠프 생활을 들여다 봤다.
등반 장비를 빼면 오은선의 배낭에 별로 남는 것은 없다. 하지만 항상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선크림이다. 그는 다른 산악인들에 비해 유난히 얼굴이 하얗다. 안나푸르나(8091m) 정상을 밝고 내려온 그의 얼굴은 검붉은 색으로 그을린 산악인들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얼굴이 원래 하얀 탓도 있지만 그는 “2,3시간마다 잊지 않고 선크림을 발라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쓰는 선크림은 대표적인 저가 화장품 브랜드의 제품. 그의 선크림보다 4,5배 비싼 선크림을 쓰는 남자 대원들은 종종 머쓱해지곤 한다.
립클로스도 그의 동반자다. 영하 20도의 기온과 강한 바람 그리고 내리쬐는 직사광선 속에서 등반을 하다보면 입술은 쉽게 갈라지고 트기 마련이다. 따라서 수분 공급과 보호를 위한 립클로스는 필수품. 작은 크기라 쉽게 잃어버리기 때문에 목에 걸거나 배낭에 매단다.
그의 배낭에 달려 있는 또 하나는 갈색 가죽에 덮인 카메라다. ‘라이카’ 제품으로 소형 디지털 카메라 중에서는 고기능 제품에 속한다. 오은선의 등정 및 정상 사진을 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산에서의 베이스캠프 생활은 기다림은 연속. 정상 등정에 적합한 날씨를 바라며 하늘만 바라보기 일쑤다. 오은선은 시간이 남을 때 책을 많이 읽는다. 그가 감명 있게 읽은 책은 ‘세 잔의 차’다 세계 2위봉 K2(8611m) 등반 중 조난을 당했다 현지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구조된 등반가가 다시 히말라야를 찾아 78개의 학교를 세운 이야기를 담았다.
대원들과 종종 카드 게임을 하기도 한다. 심심풀이로 하기 때문에 1달러에 사탕 10개씩을 바꿔 칩으로 활용한다. 그가 좋아하는 게임은 ‘훌라’. 지난해 안나푸르나 원정 때는 ‘포커’를 배웠다. 타고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풀하우스’라는 높은 패를 가지고 사탕을 잔뜩 배팅했다가 기자의 생애 첫 ‘로얄스트레이트플러쉬’에 무너지기도 했다.
[초대석]여성 첫 14좌 완등 오은선 대장
“힘든 순간 생각나면 눈물… 난 강한 사람 아닌 열정적인 사람” 《여성 최초 히말라야 8000m 이상 14봉우리 완등의 주인공 오은선(44·블랙야크). 그는 역사를 완성한 4월 27일 안나푸르나(해발 8091m)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너무 기쁩니다. 대한민국 국민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엄마, 아빠가 가장 생각납니다”라고 말했다. 1993년 에베레스트 한국 여성 원정대에 참가하며 히말라야를 품은 지 17년. 숱한 성공과 좌절을 거쳐 정상에 선 오은선의 눈물과 외침 속엔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상에서 내려와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그를 지난달 30일 베이스캠프(4200m)에서 만났다.》
지난달 27일 안나푸르나(8091m) 정상을 밟으며 히말라야 8000m 이상 14봉우리를 모두 오른 최초의 여성이 된 산악인 오은선. 1993년부터 17년에 걸친 도전을 마무리한 오은선은 “산에 국한하지 않고 폭넓게 활동하겠다”며 앞으로 계획을 밝혔다. 안나푸르나 5600m 지점의 캠프2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원정을 함께한 동아일보의 사기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 제공 블랙야크 |
내려와선 숨진 스페인 대원 생각뿐… 정상이 뭐고 생사가 뭔지
웨딩드레스 입는 상상 당연히 해… 외모는 강동원 닮았으면
―14좌 완등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탈감이 밀려올 것 같다고 했는데….
“허탈감을 느낄 여유가 없다. 사망한 톨로라는 스페인 산악대원 생각뿐이다. 그 사람이 조금만 더 일찍 발길을 돌렸더라면…. 당시 도와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있고 안타까운 마음도 컸다. 톨로가 조난 중에 위성전화로 부인과 통화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삶과 죽음이 뭔지, 정상이 뭔지, 왜 사람들이 7000, 8000m에 있으면 올라가는 데만 집착하는지, 나는 그런 모습이 없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히말라야에는 정말 생과 사가 한길에 있는 것 같다.”
―우는 모습을 많이 봤다. 원래 눈물이 많나.
“평상시 울 일은 별로 없는데 눈물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등반할 때 얘기를 하다 보면 그 순간에 몰입돼 힘든 순간이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눈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멋지겠지만 난 그렇지 않다. 내가 울면 힘들었던 상황에 동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쟤 또 울어’라는 사람도 있다.”
―가장 많이 운 게 언제인가.
“1995년이나 1996년인 것 같다. 당시 사귀던 연하의 남자 친구가 바람피우는 모습을 봤다. 내가 만나자고 했는데 자꾸 피하기에 느낌이 이상해서 찾아갔다. 그런데 다른 여자랑 손잡고 나오는 걸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정말 펑펑 울었다. 처음으로 이성의 느낌을 가졌던 사람이었고 첫 연애였다. 그때는 남자 친구를 나의 분신처럼 여겼기에 눈물이 많이 났던 것 같다.”
―기쁨의 눈물을 가장 많이 흘린 때는….
“이번 안나푸르나 정상에 섰을 때다. 정상을 10m 정도 남겨뒀을 때 속에서 불덩이가 올라왔다. 태극기를 꽂기 바로 직전 눈물이 쏟아졌다. 7대륙 최고봉을 마칠 때도(2006년 12월 오세아니아 최고봉 카르스텐스·4884m) 눈물이 났는데 이번이 눈물의 농도가 더 진했던 것 같다.”
―산에 오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힘겨움의 강도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었던 순간도 지나가면 잊혀진다. 힘든 것은 잘 잊어버리는 성격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산에 오를 때뿐만 아니라 살면서 죽고 싶을 정도의 시련은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의지는 강한 것 같다.”
―스스로 한계를 느낄 때가 있는지….
“고산 등반 시 루트 작업을 할 때, 어려운 구간에서 셰르파들이 앞장서 가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내가 저렇게 해야 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오은선은 셰르파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솔직한 등반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셰르파들도 인정하는 부분이고 국제적으로 내가 인정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이 안나푸르나 등정을 마치고 내려가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 의혹을 제기했다.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나.
“배신감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내려와(4월 29일) 파사반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황당했다. 그럴 수도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2006년 10월 시샤팡마(8027m)에서 처음 만난 이후 파사반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사실 이번에 베이스캠프에서도 경쟁 때문에 껄끄러울 수 있는 상황인데도 너무나 유쾌하고 다정하게 대해줬다.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은 정말 모르겠다.”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가장 먼저 생각난 ‘엄마, 아빠’는 어떤 분인가.
“산에서 힘들 때면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난다. 특히 엄마와는 산에 다니는 걸로 갈등도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이 생각난다. 부모님은 주말이면 늘 둘이서 놀러 다니셨다. 등산, 골프 등도 늘 함께하신다. 나도 결혼하면 저렇게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가족(남편)을 맞을 계획은…. ‘산과 같은 사람’ 말고 구체적 이상형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계획을 잡나. 지금껏 ‘결혼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 적은 없다. 30대 초반에는 결혼에 대한 의지가 강했는데…. 나도 웨딩드레스 입는 상상을 당연히 한다. 이상형은 자기 일에 신념을 갖고 몰입하는 사람이다. 자상한 성격에 외모는 강동원처럼 샤프한 스타일. 나이는 나보다 많았으면 좋겠다. 7, 8년 전까지 연애를 했는데 주로 연하를 만났다. 어린 친구들이 나에게 보호받고 싶은 느낌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40대 넘어서는 누구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다들 ‘이제 좋은 사람 만나야지’라는 인사는 하지만 정작 소개해 주는 사람은 없다.”
―‘오은선은 항상 열려 있다’고 광고를 해드릴까.
“그래 달라.”
―국민에게 왜 감사한가.
“내가 산에 가며 먹고살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 국민이 산에 많이 가기 때문이다. 등산 관련 산업이 많이 성장해서 산악인들을 후원하는 기업이 많이 생겼다. 나는 주앙 가르시아(포르투갈·4월 안나푸르나 정상에 서며 19번째 14좌 완등자가 됨)보다 등반 실력이 뛰어나지 않지만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국민의 성원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다. 그래서 국민에게 매우 감사하다.”
―오은선에게 대한민국이란….
“엄마의 품. 나는 한국인이라는 것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군인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이번에 천안함 장병들 소식을 들으면서 내 가족 일 같아 내가 바닷속에서 질식하는 느낌이었다.”
―대한민국 스타로서 삶의 변화가 있을까.
“사생활이 많이 없어질 것 같다. 많이 알아보고 인정해주면 좋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내가 사람을 보는 게 달라질까 두렵다. 나도 모르게 ‘내 위상에 맞는 사람이어야지’라는 생각을 할까봐 겁나기도 하고…. ‘정말 내 짝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복잡하다.”
―새로운 오은선의 모습은….
“나로 인해 국민이 희망을 갖고 긍정적 힘을 얻었다면 그분들에게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 히말라야를 품고 있는 네팔, 파키스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활동도 계획 중이다. 향후 활동은 꼭 산에 국한하지 않고 넓게 보려고 한다.”
오은선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는 가장 큰 오해가 무엇인지를 묻자 “오은선은 강하다”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는 강하지는 않다. 단지 좋아하는 일에 대해선 누구보다 열정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오은선
―생년월일: 1966년 3월 5일(음력)
―출생: 전북 남원
―체격: 155cm, 48kg
― 가족: 미혼. 1남 2녀 중 장녀
―학력: 서울 중곡초-휘경여중-송곡여고-수원대 전산학과
―등반 시작: 수원대 1학년 2학기 때 산악부에 가입하면서
―별명: 철의 여인, 날다람쥐, 은빛 천사, 울보, 독한 년
―평소 즐기는 운동: 수영, 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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