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천곡교회, 삼척제일교회)
<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강대상 >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이하 교회와 기념비 사진은 천곡교회에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 1081 천곡교회 순교기념비 (교회), 천곡교회는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최인규 권사의 모교회로 그의 순교 기념비가 있다. 최인규 권사는 수감 1년 만인 1942년 12월 16일 형무소 병감에서 숨을 거두었다. 최인규 권사 별세 소식을 접하고 집안 조카뻘 되는 최종대가 대전에 가서 화장한 후 유골을 가져왔는데, 장례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한섬 야산에 묻었다가 해방되던 해 10월 삼척교회 입구에 묘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 해 3월, 삼척구역 6개 교회 이름으로 <최인규 순교 기념비>를 무덤 위에 세웠다. 그 후 도시계획 때문에 기념비만 이리 저리 옮기고 유해는 교회 담장 밑에 있다가 1986년 11월 천곡교회에 <최인규 권사 순교 기념비>를 세우면서 그리로 옮겼다. 천곡교회는 1940년 최인규 권사 체포이후 경찰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교회는 폐쇄되고 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1950년에야 샘실(현 동해시청 앞)에 ‘최인규 기념예배당’을 마련했지만 역시 도시 계획 때문에 이리 저리 옮겨 다니다 1982년에야 현 위치(천곡동 1081-8)에 자리를 잡고 예배당을 건축한 후 ‘순교 44년’ 만에 순교기념비 아래 유해를 안장한 것이다. 교인들은 최인규 권사가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강대상 모양을 본 따 기념비를 만들었다.
(출처- 감신대 이덕주 교수의 "최인규 권사 유적 방문기")
현재의 천곡교회와 최인규권사 순교기념비
천곡교회 내부
천곡교회와 최인규권사 순교기념비
천곡교회와 최인규권사 순교기념비
천곡교회 최인규권사 순교기념비
[정면] 勸師 崔仁圭 殉敎碑 (권사 최인규 순교비)
십자가
[우측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좌측면] 그의 믿음은/ 샘실 참샘물로/ 東海에 가득 서리어/ 그 빛깔/ 淸碧一色(청벽일색)으로/ 온 하늘에 /퍼져 나가네
[후면] 권사 최인규는 1881년 11월 5일 북평읍 송정리에서 태어나 1921년부터 북평교회에 출석하며 믿음생활을 하던 중 1933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샘실 마을로 이사하여 전 재산을 천곡교회에 헌납하고 온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며 충성할 때 일제로부터 신사참배, 동방요배 및 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 등을 강요당하니 이에 항거하다 1940년 5월 소위 불경죄로 검속되어 갖은 수모와 고문을 당하시며 삼척 강릉경찰서를 거쳐 이듬해 10월 함흥재판소에서 징역2년을 언도받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던 중 1942년 12월 16일 14시에 향년6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향천하심에 이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이 기념비를 세웁니다.
주후 1982년 6월 일 기독교 대한감리회 천곡교회 성도 일동
1986년 감리교 동해지방 각 교회가 성금을 모아 복원 하였다.
최인규 권사가 만든 강대상 (천곡교회 보관)
천곡교회 김형걸 장로가 전하는 강대상 이야기이다. “최인규 권사님은 똑같은 모양의 강대상을 세 개 만들어 하나는 당신이 사용하시고 두 개는 북평교회와 옥계교회에 보냈답니다. 옥계교회와 북평교회 것은 없어졌고 천곡교회 것은 교회 폐쇄 후 삼화교회(현 동해제일교회)에서 가져갔다가 해방 후 송정교회에서 물려 준 것을 1970년대 송정교회가 새 강대상을 마련하면서 우리교회에 넘겨 준 것입니다. 저희도 처음엔 최인규 권사님 작품인지 몰랐는데 원로 교인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보고 최인규 권사님이 만든 것이라 해서 알게 되었지요. 우린 엄청난 보화를 얻은 셈이지요.” (출처- 감신대 이덕주 교수의 "최인규 권사 유적 방문기")
최인규 권사가 만든 강대상
<삼척제일교회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삼척제일교회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이하 삼척제일교회 사진은 교회에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 15 삼척제일교회 순교 기념비(교회), 1946년 최인규 권사의 유골을 삼척제일교회 앞에 안장하고 세워진 기념비, 최인규 권사 기념 예배당인 천곡감리교회에 최인규 권사의 유골을 이장하여 모시고 1986년에 복원된 순교비이다.
삼척제일교회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삼척제일교회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비문소개 (기념비 뒷면)
눈서리 어리는 혹한 이 푸른 대의 자태를 손상할 수 없고, 먼지 따위가 백옥의 빛을 변하게 할 수 없음과 같니 악한 법과 혹독한 고문이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 없도다. 돌아보니 오늘날 푸른 대나무와 백옥 같은 지조를 지키는 자 몇이나 있으랴. 오호라, 고 권사 최인규는 강릉이 본관이며 인규는 그의 이름이로다. 입교 이래로 그 재산을 기껍게 바치고 독실하게 교리를 믿었다. 병진년을 당하여 섬나라 오랑캐들이 어지러운 정치를 할 때, 소위 신사참배의 죄로 얽어 매이는 것에 참여하지 않고 깨어 지키며 갖은 형벌을 받으나 십계명을 힘써 지키고 뜻을 굽히지 않았도다. 익년 임오년에 대전형무소에서 임종을 맞으니 때 12월16일 오후2시 였나니 향년 63세더라. 오호라,그맑은 뜻을 지킴이여. 엄동에 대나무와 먼지 속의 백옥에 비추어 부끄럼이 없으니 죽었으나 우리의 주께서 영광을 주리로다. 이에 돌을 깎아 그 사실을 기록하니 장차 올 세상의 믿음의 식구들이 모범으로 삼을 진저
주후1946년 3월 기독교 조선감리교회 삼척구역 삼척,도계,옥계,삼화,북평,장성,묵호에서 삼가 세움
삼척제일교회 계시판, 최인규 권사에 대해 소개가 되어있다.
복원 전 1946년도 기념비 사진 (사진출처- 천곡교회 김형걸 장로)
이 기념비는 1946년 최인규 권사의 유골을 삼척제일교회에 안장하고 세워진것이다.
복원 전 1946년도 기념비문 (사진출처- 천곡교회 김형걸 장로)
눈서리 어리는 혹한 이 푸른 대의 자태를 손상할 수 없고, 먼지 따위가 백옥의 빛을 변하게 할 수 없음과 같니 악한 법과 혹독한 고문이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 없도다. 돌아보니 오늘날 푸른 대나무와 백옥 같은 지조를 지키는 자 몇이나 있으랴. 오호라, 고 권사 최인규는 강릉이 본관이며 인규는 그의 이름이로다. 입교 이래로 그 재산을 기껍게 바치고 독실하게 교리를 믿었다. 병진년을 당하여 섬나라 오랑캐들이 어지러운 정치를 할 때, 소위 신사참배의 죄로 얽어 매이는 것에 참여하지 않고 깨어 지키며 갖은 형벌을 받으나 십계명을 힘써 지키고 뜻을 굽히지 않았도다. 익년 임오년에 대전형무소에서 임종을 맞으니 때 12월16일 오후2시 였나니 향년 63세더라. 오호라,그맑은 뜻을 지킴이여. 엄동에 대나무와 먼지 속의 백옥에 비추어 부끄럼이 없으니 죽었으나 우리의 주께서 영광을 주리로다. 이에 돌을 깎아 그 사실을 기록하니 장차 올 세상의 믿음의 식구들이 모범으로 삼을 진저
주후1946년 3월 기독교 조선감리교회 삼척구역 삼척,도계,옥계,삼화,북평,장성,묵호에서 삼가 세움 (비문내용)
삼척제일교회 현재 전경
삼척제일교회 교회 내부
<최인규 권사 생가 및 순교기념비>
최인규 권사 생가 터 입구 (출처- http://cafe.daum.net/kchistory)
최인규 권사(1881년 11월 15일 생)는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현재로는 송정동 741번지이다. 2006년에 생가는 철거되었다.
철거되기 전 최인규 권사 생가 사진 , 2007년 현재는 철거 (사진출처- 천곡교회 김형걸 장로)
최인규 권사 생가 터 (동해시 송정동 741 현모습)
북평읍 교회당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권화선 속장의 교회 짓는 일을 도와 던, 최인규권사는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에서 1881년 11월 5일(음) 최돈일의 차남으로 태어나 18세에 홍씨가문에 장가를 들어 평범한 농촌의 살만한 양반의 자제였다. 그러나 40세가 될 때 그는 복음을 듣게 되었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출석한 교회는 북평읍 교회였는데, 교우 권화선속장을 권유로 천곡교회에 자체하여 왔으며(1933년), 최권사는 천곡에 논3마지기(539평)와 밭 1369평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 온 교우 들고 함께 밭을 일구고, 열심히 전도하니, 당시 교인들의 생활은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를 그대로 본받은 생활이었고, 함께 농사를 짓고, 서로 도와 일하고, 하나님을 섬기니, 안 믿는 자들에게 믿는 자로써의 본이 되었다고 한다. 총리원에서는 토지를 기증한 최인규권사님께 1938년10월 총회에서 상장과 은제상패를 표창하기도 하였다. 아무든 권속장은 주님을 모신 후 술집을 청산하고, 기도처 가까이 이사를 하여 술대신 가정 상비약을 팔았는데 파는 약보다 나누어주는 약이 더 많았고 집에는 항상 많은 밥을 지어놓고 교인들이 오면 대접하였는데, 그 일이 얼마나 극진하였든지 안 믿는 집안 사람들이 시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교회순교자 추모예배, 2005.12.1. 양지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출처- http://cafe.daum.net/kchistory)
철원 장흥교회 서기훈 목사와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에 대한 순교자 추서 예배이다.
최인규 권사 순교자 추서증 수여,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2005.12.1.
최인규권사의 죽음은 60주기가 된 오늘날까지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96년 그의 죽음을 잘 아는 이 지역 교인과 지식인들이 ‘순교자 최인규 권사 기념사업회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국가에 청원을 냈으나 ‘사망사실 확인문건 요구’ 등으로 인해 난관에 봉착해 있다. 추진위 김형걸 총무(47·천곡교회 장로)는 “42년 사망직후 시신을 회수하고 해방되자마자 그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 제막식을 가질 정도로 검증된 분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기념비 제막식 때 삼척지역을 관할하는 미 군정청의 대위가 직접 참석할 정도로 최권사는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이자 순교자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걸림돌로 최권사의 순교후 추도 예배에 참석했던 성도들 중 상당수가 이종교로 개종해 지금까지 동해지역이 그 세력권에 있는 것과 최권사의 아들이 행방불명돼 최권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됐을 경우 수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도들은 “최권사의 순교는 교회사가 향토사가 지역목회자 지역행정사료 등을 통해 이미 검증된 사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천곡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제막식, 양지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2005.12.1.
천곡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양지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천곡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뒷면
최인규 권사, 한곡기독교순교자기념관
최인규 권사 범죄인 명부 (사진출처- 천곡교회 김형걸 장로)
최인규 권사, 한곡기독교순교자기념관
최인규 권사 약력 (글- 김동혁 목사)
1881.11.5 (현)동해시 송정동에서 崔燉一씨의 차남으로 출생.
1921. 북평제일감리교회에 입교.
1933.12. 최인규권사 북평교회로 부터 천곡교회로 이명, 예배를 인도하다.
1935. 전 재산을(전1,300평,논 500여평)교회에 드리다.
1937.10. 총리원으로 부터 포상 받음.
1940.5. 신사참배,동방요배,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 등 을 거부 항거로 왜경에 체포.
1941.10. 함흥재판소에서 불경죄로 징역 2년형을 언도 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
1942.12.16 대전형무소에서 순교하다.
1946.3. 강릉지방 삼척구역 7개 교회가 삼척제일교회 교정에 유해와 함께 기념비 세움.
1979.11. 그 위치에 최인규 기념교회(77평)를 신축하다.
1978.6. 최인규순교비를 성도들에 의해 천곡교회에 세우고 8월 15일 제막하다.
1986.11.3 동해지방 교역자 회의에서 아호(雅號)를 泉谷으로 추서 키로 함.
1986.11.11 삼척제일교회로 부터 유해를 이장하여 천곡교회에 모시다.
1986.6. 최인규순교비를 동해지방에 의해 천곡교회에 복원하여 세우다.
최인규 권사
동해고속도로 종점에서(동해시 평능동) 500m 정도 더가면 동해시청 쪽으로 진입하면서 산 쪽으로 보이는 웅장한 교회가 있는데 이곳이 순교자 최인규권사가 섬기던 천곡교회다. 지금은 동해시의 중심지로 천곡동에만 3만인구가 있지만 교회설립당시에는 50여호의 농어촌으로 삼척김씨, 남양홍씨, 전주최씨 등의 집성 촌이었다. 이 동리에 권화선(감리회보 소화12년4월16일)이 춘양에서 26세에 홍씨 가문에 재가하여 와 냉천동(현 냉천공원)에 1920년경 주막을 차리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는 한 아낙네가 있었는데, 그는 소생이 없으며 불교에 적을 두고, 뒷방에서 목탁과 염주를 들고 열심히 염불을 외며, 불공을 드리러 절에 다니던 중 집안 며느리 벌되는 김태봉씨가 시집와서 새댁으로 예수를 전하니, 구경 삼아 교회에 몇 번 출석하다, 예수를 믿고 목탁과 염주를 팽개치고, 열심을 다해 이웃에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집에서는 찬송과 성경 읽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고, 30십여 리를 걸어 북평교회당에 다녔는데, 얼마 후에는 농촌집 사랑방을 빌려 기도 처로 정하고, 주일날에는 모두 모여 북평교회로 가고 그 외는 함께 모여 찬송과 기도, 성경공부를 하며 열심히 전도하니, 날로 믿는 자가 더하여 천곡리291-1번지에 대지86평을 마련 교회(8간 초가)를 짓고,(감리회보 소화8년7월10일 20면) 십자가를 세우니(1932년) 유교사상이 농후한 이곳에 개화의 물결이 넘실거려, 이 무렵 문을 연 "천곡학원"과 함께 개화에 큰 몫을 했다. 최인규 권사는 1881년 삼척군 송정리(현 동해시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서당에 다니다 18세에 홍씨와 결혼한 평범한 농부였다. 이러한 그가 1921년 40세의 늦은 나이에 당시 북평감리교회(현 북평제일감리교회) 김기정 목사를 통해 예수를 접하고 불같은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금주 금연은 물론 대물림하며 섬기던 우상과 그에 따른 각종 제기들을 불살라버렸다. 그는 예수 영접에 앞서 1919년 동해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같은 마을 출신 김원대 성도 등에게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1932년 권사로 임명된 그는 당시 기도처에 불과했던 지금의 천곡교회를 헌당하고 인도자로 헌신했다. 평범한 농부가 자신의 마을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성령체험과 치유은사를 경험한 그는 더욱 열심을 내 전도와 선교에 힘썼고 독립운동가 이수정 선생(1887∼1977·동해교회 원로장로)과의 교유를 통해 조선이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현실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됐다. 천곡교회 인도자와 주일학교 교장으로 신앙생활을 다져나가던 그는 기도 끝에 1935년 자신의 소유한 논밭 전부를 천곡교회에 헌물하였다. 이수정 선생의 부인 이부전 장로는 96년 “최권사는 논 600여평,밭 1400여평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나님께 바치고 오로지 교회에서만 생활하셨다”며 “결국 남편과 최권사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동족의 밀고로 잡혀가 각기 징역 3년과 2년을 언도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일제 경찰은 최인규 권사에게 액비통(인분통)을 지게 하고 온 동네를 끌고 다니며 망신을 주었다.그런데 최권사는 인분통을 지고도 자랑스럽게 동네 사람들에게 외쳤다. “내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인규올시다.내가 예수 믿는 최인규 권사요!” 순사들은 그의 행동에 오히려 당황했다. 주민들이 그를 심정적으로 지지했고,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는 그를 존경했기 때문이다(기감 동부연행 발행 ‘순교 순국자 최인규 권사의 삶과 신앙’에서). 최인규 권사.일제의 우상숭배 강요와 기독교 탄압에 맞서 저항하다 감옥에서 순교했음에도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후손이 없고 평신도였다는 점이 그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다.일제의 핍박으로 장로회와 감리교 연합공의회가 해산되고 내선일체를 목적으로 한 관변 조직인 조선기독교연합회가 발족해 모든 교회가 창씨개명과 동방요배를 강요받던 상황에서 동해안의 작은 교회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우상 숭배란 있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저항했다. 특히 최권사는 40년 5월 독립운동을 한 일과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불경죄로 검속된 후 모진 고문 속에서도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지 다른 신은 경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천조대신과 천황도 하나님이 내신 사람이다. 우리 십계명에는 하나님 외에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며 예수를 증거했다. 그는 감옥에서도 늘 찬송을 부르며 전도했고 사상범들을 교화시키는 교회사(敎誨詞)들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 무렵 원산지방 고성교회에서 목회하던 이진구 목사도 천황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런 연유로 대전 형무소에서 이진구 목사와 최인규 권사가 만났다. 1938년 이진구 목사가 강릉지방 사경회 강사로 왔던 적이 있었기에 최인규 권사가 그를 먼저 알아보았다. 훗날 이진구 목사는 당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최인규 권사가 국민서사와 동방요배까지 거절하고 간수들에게 매를 맞는 것이 안쓰러워 그를 동정하는 마음에서 ‘권사님, 왜 국민서사와 동방요배를 아니하고 매를 맞았소. 권사님, 그냥 한다고 하고 나가세요.’ 했다. 그러자 최 권사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목사님은 국민서사와 동방요배를 양심상 기쁨으로 하는 것이오? 나는 양심으로 사는 사람이므로 거기에 대해서는 다시 말을 마시오.’ 하였다. 나는 실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목사로서 양심대로 살지 못한 것이 한 없이 부끄러웠다.” 결국 최권사는 고문 후유증과 옥고로 인해 이감 끝에 대전형무소에서 63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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