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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자료]] 안성 3.1운동 기념관 (경기도 안성)

好學 2010. 6. 12. 16:13

 

[[성지자료]] 안성 3.1운동 기념관 (경기도 안성)

 

 

기념석 

 

기념관 전경 (안내책자 복사)

 

기념관 입구

 

입구

 

입구 전경

 

입구 만세고개비

 

" 이 곳 만세고개는 그 옛날 일본식민지 통치하에 항거 이 곳 애국 선열들이 불꽃 같이 일어나 뜨거운 피로 조국 자주 독립을 외치던 3.1 만세운동, 그 만세소리의 언덕......대한 독립 만세"

 

만세고개탑

 

양성면, 원곡면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으로 원래는 성은고개였으나 독립정신과 역사를 기리기 위하여 1991년 건설부 고시에 의거 "만세고개"로 개명하고 만세고개탑을 건립하였다

 

입구 문

 

입구 문

 

입구 대리석에 문양이 나타났다

 

안성3·1운동기념관에 항일 호국투쟁 순국선열들이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하는 사람 형상으로 대리석에 나타났다.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일명 만세고개에 세워진 3·1운동기념관 정문입구 대리석에 나타난 기적현상은 마치 3·1운동 당시의 만세운동을 보는 것 같다. 6개의 대리석에 각기 다른형태의 만세운동의 사람문양 중 가장 맨 위 그림은 마치 사람이 직접 만세운동을 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현대판 기적으로 불리우는 이 형상을 처음 발견한 강일구(37· 시청공무원)씨는 “지난주 점검차원에서 기념관을 둘러보던중 대리석에 이상한 그림 문양이 있어 확인해 보니 마치 사람이 만세운동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놀랐다”고 말했다. 이같은 기적현상은 습도가 높은 날에는 더욱 또렸하게 보여 기온에 의한 현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성지역의 3·1운동으로 피살과 옥사가 19명, 실형 126명이나 되는 전국 3대 독립운동으로 손 꼽히고 있다. 한편 시는 3·1운동 당시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 가장 치열한 항일운동을 펼친 원곡·양성의 만세운동을 기념하기위해 지난 2001년 만세고개에 기념관을 준공한 바 있다. 안성=진두석기자

 

사당 전경 

 

광복사 전경

 

광복사 입구

 

광복사(사당) 내부 위패

 

3.1운동 당시 안성지역에서 순국하거나 고문을 당하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현재 현재 이곳에는 순국선열 25위와 애국지사 195위의 위폐가 봉안되어 있다 

 

당시 우편소 모형, 만세운동 당시 원곡, 양성 주민 2,000명이 연합하여 양성면에 있었던 우편소를 공격 불태워 파괴하고 2일동안 해방을 쟁취했던 것을 기념코자 기념관 내에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당시 주재소(경찰서), 우편소와 마찬가지로 양성에 있던 주재소를 불태워 파괴하였다

 

입구 조각 , 천성명 작 "잠기다" 

 

조각물, 김인태 작 " 생명의 발견"

 

조각물

 

조각물  

 

원곡, 양성 3.1 독립 항쟁 기념탑으로 올라가는 우측 산책로       (블로그 > 인터네피아)

 

원곡, 양성 3.1 독립 항쟁 기념탑 오르는 길 옆의 조각물

 

원곡, 양성 3.1 독립 항쟁 기념탑 오르는 길 옆의 조각물

 

원곡, 양성 3.1 독립 항쟁 기념탑 전경

 

3.1운동 기념탑은 태극의 4쾌를 통해 우리 민족의 영원성을 상징하며, 태극기는 국권을 회복하고 산화한 선열을 위한 휘장이며 탑 측면의 부조는 양민의 학살, 주재소 및 통신시설 파괴등의 의거, 새시대의 개척, 역사적 항쟁사가 구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원곡, 양성 3.1 독립 항쟁 기념탑 태극4괘

 

원곡, 양성 3.1 독립 항쟁 기념탑의 만세 조각 그림

 

원곡, 양성 3.1 독립 항쟁 기념탑 기념비문

 

기념관 내 전시관 전경

 

전시관 입구

 

전시관은 지상 2층으로 연면적 374평인데 3.1운동 당시 안성지역의 만세운동과 관련한 유물과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펼쳐진 시위운동 및 역사적인 자료를 실물전시, 모형, 체험관과 영상물들을 통해서 관람할 수 있다

 

전시관 입구 

 

전시관 입구 

 

전시관 입구 조각물

 

전시관 입구 옆 회랑

 

전시관 입구 회랑 전시글

 

전시관 입구 회랑 전시글

 

 전시관 입구 회랑 전시글

 

전시관 입구

 

전시관 내부

 

전시관 내부

 

전시관 입구 만세 그림

 

안성 3.1 운동 예심결정서(동아일보) 

 

 

 

양성 지역 최초의 시위, 1919.3.11. 오전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 조회시간에 일어난 시위로 원곡, 양성 지역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위는 남진우(21살)와 고원근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우편소 공격

 

이천 7개면 연합시위, 이천 마장면 오천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발안 제암리교회 순교 장면

 

 

 

화승 총, 의병 이홍승 부자가 사용했던 화승단총

 

족쇄와 수갑 

 

벽관

 

독방

 

나무상자

 

고문 장면

 

전기고문

 

안성 3.1 독립항쟁 선열록

 

선열 명단

 

선열 명단

 

선열 명단

 

원곡, 양성 3.1운동 기념탑

 

안성 독립운동 관련자료

 

관련자료

 

3.1운동 당시 옥중에서 읽던 성서

 

3.1운동 당시 사용하던 태극기

 

안성기략

 

구 원곡, 양성 3.1운동 기념탑, 칠곡면 칠곡감리교회 뒷편에 있다 

 

구 원곡, 양성 3.1운동 기념탑 안내문

 

안성, 양성쪽 만세고개 언덕    (블로그 > 인터네피아)

 

안성,양성쪽 만세고개 언덕이다. 일제 치하 이곳에서 2,000여명의 이곳 주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지명도 만세고개라고 명명 했다

 

오산, 남사쪽에서 넘어오는 고개 

 

오산,남사쪽에서 넘어오는 길이다. 3.1운동 기념관을 끼고 휘돌아진 2차선 도로가 만세고개라고 한다

 

안성의 3.1운동

 

안성의 3.1운동은 3월 11일 읍내에서 시작되어 4월 1일 최고조에 다다르게 된다. 우리나라 전국에서 3.1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안성의 3.1운동이 중요한 것은 그 운동이 일제에 의해 평안북도 의주군, 황해도 수안군과 함께 “전국 3대 실력 항쟁지” 중의 한곳으로 지목되었을뿐만 아니라 민족대표 33인의 재판에 원용될 정도로 의미있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원곡, 양성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연결,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닌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2000여명의 전 주민이 참가하여 순국 24위, 피검 361명, 옥고 127명, 태형 40명, 민가소실 9동 외에 배상 취학방해 등 큰 희생을 냈고, 1993년 현재 100명이 각종 훈장을 받았으며, 고개이름까지 만세고개로 바뀔 만큼 뜻깊은 만세운동이었다


안성 3.1운동의 전개과정


안성에서의 3ㆍ1 운동은 3월 11일에 읍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상인들은 철시하여 이에 동조하였으나 일제 경찰이 출동하자 해산하는 비교적 평화적인 분위기로 시작되었지만, 이후의 산발적인 만세운동과 서울에서 귀향한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점차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식은 사회전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3월 29일에서 4월 2일까지의 안성읍과 4월 2일 일죽, 죽산 시장에서 연이은 만세운동이 있었고, 심지어 군청으로 몰려가 수 천명이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으며, 안성지역의 곳곳에서 뒷산이나 앞산에 올라가 횃불 신호로 일제히 결집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러한 산발적인 시위를 극복하고 실력투쟁으로 진전시킨 것이 4월 1일의 원곡, 양성지역 독립운동인데, 원곡, 양성 역시 3월 10일 이후 처음에는 산발적인 만세운동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곡면은 사전 연락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킨 뒤 3월 28일 내가천리 이시련 (李時連) 집에 모여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이어 마을 단위로 봉화시위를 시행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 후 4월 1일 1,000여명이 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면장인 남길우 (南吉祐)와 서기 정종두(鄭鍾斗)에게 태극기를 주어 만세를 부르게 한 후 선두에 세워 양성으로 향해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군중은 각각 각목과 농기구 등을 지참하여 양성면으로 진행하던 중 접경지역 인 성은고개(만세고개)에 이르러 그날 시위운동을 전개했던 양성면민 1,000여명과 합류하여 시위대는 2,000여명으로 늘어나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시위대가 주재소로 향해 돌진하자 순사와 순사보는 그 기세에 압도되어 피신하기에 급급했으며, 분노한 군중은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차례로 파괴 방화하고, 일본인 잡화상과 고리대금업자의 가옥을 파괴하였으며, 일제 경찰과 그 주구들의 탄압에 대비하여 이곳으로 통하는 교량을 차례로 파괴한 후 일단 산 속으로 피신하였다.  일제는 현지의 경찰로는 사태를 수습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조선 주차군 제40여단 79연대 소속장교와 사병 30여명을 지원 받아 주동자 검거에 나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가족들을 협박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에 회유책 으로 4월 19일 현 원곡초등학교 뒷산에 모아놓고 모든 사실을 불문에 붙이고 용서 한다고 회유책을 사용했는데, 일제의 공포에 짓눌렸던 가족들은 일제의 회유책을 사실로 믿고, 주동자들을 설득하여 원곡초등학교에 모이도록 하자 일제는 총검으로 사방을 포위하여 도주하는 자는 사살(현장 순국3명)하는 끔찍한 만행을 자행하였다. 또 6월 1일에도 하사 이하 36명을 투입하여 나머지 남은 시위세력 색출에 나섰는데 이들은 가족들을 협박함은 물론이고 민가에 난입하여 방화 약탈 등을 자행 했다. 이로 인해 원곡,양성, 주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19.3.11  양성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

1919.3.25  원곡, 칠곡으로 확산

1919.4.1   양성면 지역 시위

1919.4.1  원곡, 양성 연합시위


안성 3.1운동 기념관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산 186-21번지의 기념관은 만세고개 정상에 위치 하며 광복사, 3.1운동 기념탑, 전시관, 무궁화 동산 등이 조성되어 있다. 3.1운동의 역사를 되새기고 안성지역의 순국 선열들의 희생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이 지역의 성역화 사업으로 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광복사는 3.1운동 당시 안성지역에서 순국하거나 고문을 당하신 분들의 넋을 위로 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현재 이곳에는 순국선열 25위와 애국 지사 194위의 위폐가 봉안되어 있다. 3.1운동 기념탑은 태극의 4쾌를 통해 우리 민족의 영원성을 상징하며, 태극기는 국권을 회복하고 산화한 선열을 위한 휘장이며 탑 측면의 부조는 양민의 학살, 주재소 및 통신시설 파괴등의 의거, 새시대의 개척, 역사적 항쟁사가 구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궁화 동산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나라꽃인 무궁화를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횃불의 모양을 하고 있다. 전시관은 지상 2층으로 연면적 374평인데 3.1운동 당시 안성지역의 만세운동과 관련한 유물과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펼쳐진 시위운동 및 역사적인 자료를 실물전시, 모형, 체험관과 영상물들을 통해서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