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3>미국(下) ―맥아더를 만나다
노병은 사라졌지만, 정신은 죽지 않았다
부인과 함께 묻힌 기념관
자유-평화의 메시지 전해
지도엔 ‘독도’ 표기 선명
버지니아 주 (맥아더 기념관) 미국 버지니아 주 남부 군항(軍港) 노퍽 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맥아더 기념관은 연간 7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250만 점의 문서와 8만6000여 장의 사진 등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맥아더 장군이 남긴 유물이 보존돼 있다. |
지난달 7일 버지니아 주 남부 군항(軍港) 노퍽 시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을 찾았다. 이곳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맥아더 사령관의 모든 것이 보존된 성지다. 그는 1951년 유엔군 최고사령관에서 해임돼 미국에 돌아온 뒤 어머니 고향인 노퍽을 자신의 ‘제2의 고향’으로 정했고 영욕의 군 생활 48년의 기록을 고스란히 시에 기부했다. 노퍽 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1850년에 지은 시청 건물을 맥아더 기념관으로 헌정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맥아더 사령관과 부인 진 맥아더 여사의 무덤이 있다. 맥아더 사령관이 이곳에 묻힌 날은 1964년 4월 11일. 13년 전인 1951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유엔군 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된 날과 똑같다. 2000년 1월 22일 사망한 맥아더 사령관의 부인 진 여사는 나흘 뒤 남편 곁에 묻혔는데, 이날은 맥아더 사령관의 출생일(1880년 1월 26일)과 같다. 홀의 한가운데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 최고사령관기와 미 육군 역사상 넷밖에 오르지 못했다는 5성 장군 깃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극동군 총사령관기가 있다.
6·25전쟁 관련 전시관은 1층 왼쪽에서 맨 처음 만날 수 있다. 20세기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전황도 및 맥아더 사령관의 제복과 모자, 파이프 등이 보존돼 있다. 음향장치를 통해 전해오는 당시의 포성과 폭발음을 듣고 있자니 맥아더 사령관이 금세라도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눈앞에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동해(East Sea)라는 표기가 선명한 한반도 지도도 눈에 띄었다. 기념관 측은 “약 7년 전 당시 주미 한국대사가 이곳을 찾아 ‘일본해’라고 표기된 데 문제 제기를 했다”며 “대사관과 한국 정부가 아예 동해라는 표기가 있는 유리패널을 제작해 와 기증했다”고 말했다. 10년 전인 2000년 6·25전쟁 발발 50주년 당시 한국과 미국 정부가 공동으로 제작한 기념기도 전시돼 있다. 이 깃발에는 ‘FREEDOM IS NOT FREE’라는 영어 문구와 ‘자유는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한국어 문구가 병기돼 있다. 맥아더 기념관의 사료실장 제임스 조벨 씨는 “맥아더 사령관의 취미는 독서였고 하루에 3시간씩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기념도서관에 보관된 20만 권의 장서 중 5000여 권은 맥아더 사령관 개인 책. 맥아더 사령관의 노란색 대학노트 900쪽에 1961년부터 2년 동안 연필로 눌러 쓴 ‘회고록(Reminiscences)’의 친필 원고를 보고 있자니 그의 향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의 필체는 힘이 있으면서도 고상한 기품이 흘러 넘쳤다.
맥아더 사령관은 1962년 5월 12일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찾아 ‘의무, 명예, 조국(Duty, Honor, Country)’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는 “군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그 이유는 군인이 전쟁으로 인한 가장 깊은 상처와 흉터를 아파하고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맥아더 장군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도 했다. 그가 남긴 평화와 자유에 대한 메시지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 기념관 사무국장 데이비스 씨 “한국 발전상 보면 무덤서도 춤을 출 것”
그는 1951년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에 따른 맥아더 사령관 해임에 대해 “중공군 참전이라는 변수를 만나 만주에 있는 중국의 후방기지를 공격하려 했을 만큼 승리에 대한 집념이 강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데이비스 사무총장은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한국이 통일됐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원자탄 사용을 고려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단호히 부정했다. 데이비스 사무총장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한 그의 발언은 그가 했던 일들을 통해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사진 노퍽(버지니아 주)=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김남조 시인, 남편 김세중 씨의 6·25기념 조각 공개
“흔적조차 사라진 유엔탑… 참전국에 송구할 뿐”▼
1981년 철거… 서울시, 복원 재추진
김남조 시인이 7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자택에서 작고한 남편인 조각가 김세중 씨가 유엔군자유수호참전기념탑을 위해 만든 부조 작품 2점을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오른쪽이 ‘수호 남신상’, 왼쪽이 ‘자유 여신상’이다. 이훈구 기자 |
김 교수는 지금은 창고로 쓰는 2층 남편의 작업실로 안내했다. 높이 325cm, 폭 115cm의 청동 부조 2개가 한쪽 벽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남편이 1963년에 만든 ‘유엔탑 수호 남신상’과 ‘유엔탑 자유 여신상’이다.
1964년 6월 25일 제2한강교(현재 양화대교) 다리 위에 유엔군자유수호참전기념탑이 세워졌다. 북한군에 밀리기만 하던 유엔군이 최초로 한강을 넘었던 그 자리에 참전 16개국의 자유수호 의지와 우의를 기리기 위해 국민성금 2300만 원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설립한 것이다.
높이 50m의 v자형 탑신 양쪽 면에는 7일 김 교수의 집에서 본 ‘자유 여신상’과 ‘수호 남신상’이 2배 정도 크게 조각돼 있었다. 탑의 조각과 전체적 설계를 맡은 김 씨는 탑 제작에 앞서 작은 크기의 부조를 만들었다. 김 교수가 이날 공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6m 크기의 자유 여신상과 수호 남신상 부조는 탑과 함께 1981년 5월 철거됐다. 당시 서울시는 4차로였던 다리를 8차로로 확장하면서 탑과 조각들을 부숴 다리 아래로 버렸다. 탑의 잔해는 다리 밑에 4년간 방치됐고, 이후에는 그 흔적마저 사라졌다.
“조각품이 방치돼 있는 것을 본 남편은 서울시에 방치된 돌을 달라고 요청했죠. 자신이 보관하다 복원할 때 다시 쓸 생각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사진기를 직접 들고 다리 아래로 가 조각난 돌들을 일일이 찍어뒀습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남편은 1986년 세상을 뜰 때까지 (복원을) 진심으로 바랐고, 항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1981년 탑을 철거하면서 규모를 축소해 원래 자리에 세우든지 통일로나 서울대공원 입구에 옮기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서울시는 김세중 씨 등 관계자들을 불러 수차례 회의를 하고 1987년에는 복원할 장소까지 물색하며 탑 복원을 추진했지만 이후 시장이 바뀌면서 복원은 없던 일이 됐다고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유엔 참전국 젊은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수십 년간 참전기념탑 복원에 무심했다는 것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전국에 송구스럽습니다. 남편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서울시는 6·25전쟁 60년을 맞아 참전기념탑 복원을 재추진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9일 “오세훈 시장의 지시로 복원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면서 “복원할 탑의 크기와 장소, 향후 관리 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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