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救援論]구원.신앙.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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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學 2009. 11. 5. 23:38

 

성화

 

 

 

1. 구원과 성화

 

(i) 성화가 구원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에, 성화 없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행위 없는 신앙은 쓸모없고 죽은 것이며, 좋은 나무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요 15:5) 성화는 구원의 일차적 목적이며(엡 1.4-6), 따라서 그 완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레 11.45, 20.26, 벧전 1.15)는 무시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 4:3-8)


(ii)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공로적 성취를 요구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성화자이며, 인간은 하나님, 특히 성령님에 의해 성화된다(살후 2.13, 벧전 1.2). 비록 중생한 사람이 우리의 성화를 위해 성령과 협동하지만, 독립적인 주체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의 도구로서 그러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화이며,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2. 성화의 성경적 개념

 

(i) 성화(聖化)한다는 말은 거룩하게 한다 또는 거룩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룩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성화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루돌프 오토는 거룩을 순전히 윤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자유주의의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 Das Heilige를 1917년에 저술하였다. 그는 거룩을 sensus numinous와 mysterium tremendum, 즉 창조자의 임재 앞에서 느끼는 피조성과 전율의 압도적 감정(사 6장 참조)으로 정의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인간은 자기가 무의미하며 불순하고 죄악적이며 신의 진노 대상임을 느낀다.”(벌코프)

 

(ii) 성경에서, ‘거룩한’이라는 형용사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에게 사용되지만, 또한 사람들, 회중, 건물, 제사, 헌물, 그릇, 옷, 땅, 산, 그리고 심지어 입맞춤과 같이 다양한 대상에게도 사용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지만,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소유되거나 관계됨으로서 거룩하게 된다.

 

(iii) 구약에서, 성화는 여러 방식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에게 드리는 헌물과 봉헌, 제단이나 제물과의 접촉 등이다. 제사 제도와 성결법은 성화의 주된 원천이다. 불순한 것으로부터의 정화와 거룩한 목적을 위한 구별이 사람이나 물체를 거룩하게 만들었다.

 

(iv) 신약성경에는 “거룩하게[聖化] 한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αγιαζω가 29회 사용되어 있다: 마 6.9, 23.17, 19, 19, 눅 11.2, 요 10.36, 17.17, 19, 행 20.32, 26.18, 롬 15.16, 고전 1.2, 6.11, 7.14, 14, 엡 5.26, 살전 5.23, 딤전 4.5, 딤후 2.21, 히 2.11, 11, 9.13, 10.10, 14, 29, 13.12, 벧전 3.15, 유 1.1, 계 22.11.

 

복음서에는 모두 7회 사용되었는데,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용례는 매우 다르다. 공관복음에서, 한 쌍(마 6.9, 눅 11.2)은 주기도에 사용되었고: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다른 한 쌍(마 23.17, 19)은 그 의식적 사용을 보여 준다: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든지 특히 제물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비록 성화사상의 신약적 발전을 위한 기본개념이지만, 분명히 독특한 신약적 성화개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기에 쓰여진 제4복음서는 그 구원론적 개념과 기독론적 근거를 나타낸다.  첫째, 성부께서 성자를 거룩하게 하는데, 이는 그를 세상에 보내어 구속사역을 수행하게 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 (요 10.36).”  둘째,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의 성화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9).”  세째, 그 결과로 그의 백성이 거룩하여진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 17.17).”  성부는 성자를 성화시키고, 성자 또한 자신을 성화시킨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부에게 자기 백성의 성화를 위해 기도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성화자 (Sanctifier)이다.  예수님의 자기성화(self-sanctification)는 그가 하나님이기에 가능하다.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은 성화자인 동시에 피성화자로 묘사된다.  하나님께서 성화하실 때, 여기에 나타난 성화의 방편은 “진리 (αληθεια)”인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진리를 통한 성화 (truth sanctification)의 본질은 다른 성경계시들을 통하여 조명되어야 한다.

 

사도행전과 로마서의 용례들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다메섹체험을 술회하며 부활하신 주님이 준 사명이 이방인의 성화라고 진술한다: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8).”  그의 궁극적 사명은 이방인들을 성화된 사람들로 만드는 일이며, 그 방편은 “나를 믿어”,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여기에 나타난 믿음을 통한 성화 (faith sanctification)의 개념은 바울서신에 지배적이다.  또한, “죄 사함” 즉 칭의와 성화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더욱이, 성화가 개인적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다메섹 경험은 바울의 전 생애를 통하여 너무나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이 소명의 내용은 그의 기독교 구원관이 되어 그의 일생동안 모든 사역에 있어서 골격과 규범이 되었을 것이다.  이 문구는 행 20.32에 또다시 나타나는데, 거기서 바울은 그가 3년 동안 눈물로 가르쳤던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여기서, 성화는 “세운다(οικοδομεω)”는 개념과 연결되는데, 이는 특별히 그 교회론적 성격을 강조하여 성화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된다. 더욱이, 바울은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에서 온다고 확언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성화자이며 진리/말씀이 성화에 사용된다는 요한의 이해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방인을 성화하라는 그의 사명은 그의 소명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또다시 로마서에 소개 된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 15.16). 오로지 성화된 제물만이 하나님께 받음직하며, 바울은 이방인의 제사장으로서 먼저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을 성화해야 한다. 여기서 성령은 성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령은 또 하나의 성화자이다. 성령의 능력은 분명히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과 연결되어 작용한다. 성화된 제물이라는 개념은 구약의 제의적 성화 (ceremonial sanctification) 개념과 연관되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와 연결하여 로마서 12장을 숙고하는 것은 바른 접근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사도바울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부름에 있어 그 정체성을 칭의보다 성화에 두었음을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성화된 사람들 ( ̀ηγιασμενοι)”이라는 말은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는데 즐겨쓴 명칭중의 하나이며, 이는 그의 가장 즐겨 쓰는 용어인 “성도 ( ̀αγιοι)”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문안에서 교회론적으로 의미 있게 나타난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고전 1.2)”. 교회 (εκκλεσια)는 성화된 사람들이며 성도, 즉 성도의 교제 (communio sanctorum)이다.  ̀ηγιασμενοι는  ̀αγιαζω의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그들이 이미 성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도 ( ̀αγιοι)”, 즉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하다. 이 구문에서, 성화는 성도라고 불리기 이전의 단계이다. 성화라는 선행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그들이 거룩할 수 없다. 모두가 부패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실체와 성도의 호칭은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교회와 성화의 개념도 불가분리하다. 따라서, 개인주의적 성화는 분명히 비성경적인 생각이다. 성경에는 단수적인 ”성자 ( ̀αγιος)“개념이 없고 오로지 복수로만 사용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화된다. 확실히 그들이 자기 자신을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성화되어지며,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난다. 성경은 항상 ”그리스도의“ 성화를 가르치며, 결코 도덕적 개선이나 종교적 신성화를 말하지 않는다. 고전 6.11은 이것을 더욱더 분명히 가르쳐 준다. 그 문맥은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며 누가 받지 못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논의이다. 불의한 자들과 각종 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지만, 그들이 회심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심지어 9-10절에 열거된 바와 같이 사악한 자들도, 만일 성화되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비록 어떤 사람들(τινες)만이 9-10절에 열거된 죄목에 해당되지만, 그러나 아무도 ”불의한 자 (αδικοι)“라는 보편적 범주로부터 제외될 수 없다. '기업을 받는다'는 말은 그의 다메섹소명에서 유래한 바울적 개념이다: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행 26.18)”;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2”. 여기서, 기업을 받는 것은 성화가 전제된다. 성화되지 않고는 유업이 없다. 따라서, 성화는 기업이나 구원과 동의어이다. 한편, 우리는 다음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성화된 자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열거된 종류의 사악한 자가 다시 될 수 있는가? 또는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탐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은 성화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인가? 초자연적 성화와 관찰할 수 있는 행동의 상관관계는 성화론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중의 하나로서, 성경의 보다 더 넓은 주제들과 연결된다. 그런데 성화의 또 다른 면이 이 구절로 조명될 수 있다. 강조적인 대조 접속사 “αλλα”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묘사하는 세 가지 연속적 서술은 구문론상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것들 (씻음, 성화, 그리고 칭의)은 구원의 순차적 단계들로서 각기 다른 실체들일 수 있다. 또는, 한 실체의 세 양상일 수도 있다. 두 해석이 다 가능하지만, 후자가 더 개연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씻음과 성화는 불가분리하며, 칭의도 분명히 성화적 요소를 가지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가정이 수용된다면, 성화는 세례 (물과 성령)와 칭의 (사죄)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더욱이, 앞에서 설명한 바울의 관용적 표현에서 기업구절들이 필수적으로 성화를 그 본질적 개념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성화가 이 셋중 중심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한편, 이 구절은 고전 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과 롬 15.16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에서 밝힌 성화의 두 원천을 결합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 거룩함...을 얻었느니라.” “...의 이름으로”라는 구절을 곁들인 이 삼위일체론적 서술은 세례공식과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초대교회에서 성화의 영적 현상을 성령세례나 물세례와 연관하여 설명하는 것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죄인은 성령의 씻음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의롭게 됨으로서 성화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성화로서, 삼위 하나님의 협력에 의하여 일어나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가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며 의롭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서술되지 않는다. 고전 7.14은 성화의 특별한 실례를 설명한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바울은 누구나 회심 후에 사전관계를 과격하게 단절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설정하였는데 (17, 20), 그것을 결혼과 가정에도 적용하였다. 배우자의 불신이 정당한 이혼사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의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할 기회를 제공한다. 마치 믿는 배우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의 성화자인 것처럼 제시되는데, 여기서 “εν”은 단지 도구적이다(BDF). 하나님은 그의 믿는 배우자를 도구로 사용하여 그를 성화시킨다. 더욱이, 우리가 바울의 도전적인 질문을 상고해보면, 그것은 배우자의 회심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그러나, 결혼성화를 추천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높은 가능성이 있으며, 여기에 실패할 경우 자녀의 거룩함은 보장되지 않는다. 가족관계는 성화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특별히 언급되었다. 이 주제는 엡 5.25-28에서 보다 더 강화되었는데, 거기서 그의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의 아내를 위한 남편의 사랑에 대한 모델로 추천되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성화의 모티프는 사랑이며, 자기희생이 그것을 위한 대가인 것이다. 고전 6.11과 같이, 성화는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는데, 특히 “물로 씻음”이 강조적으로 지적되어 있다. 이 물세례는 성령세례와 함께 (롬 15.16, 고전 6.11) 성화와 구원의 필수불가결한 방편이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요 3.5”는 공식과 조화를 이룬다. 또한, 성화는 여기서 요 17.17과 행 20.32에서 제시되었던 말씀의 방편(καθαρισας εν ̀ρηματι)과도 연결된다. 말씀에 대하여  ̀ρημα와 λογος가 호환적으로 사용됨은, 비록 성화의 실제적인 근거가 그의 자기희생(십자가)이지만, 그 방편이 그리스도의 별칭으로서의 말씀보다는 성경이나 선포되는 말씀임을 암시한다. 그가 사랑한 대상은 교회 (εκκλησια), 즉 성화된 사람들의 공동체였으며 결코 분리할 수 있는 개인이 아니었는데, 이 모티프는 성경 전체에 매우 일관성 있게 표현된 사상이다. 비록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교회의 성화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이와 같이 ( ̀ουτως)” 그리스도인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고 바울은 권면한다. 물론, 남편이 자기 아내를 성화시킬 능력은 없으나, 사랑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성화에 참여한다.

 

살전 5.23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마침기도이며 확증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 ̀αγιασαι  ̀υμας ̀ολοτελεις),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여기서 사도가 위해서 기도한 성화의 개념은 분명히 확장된 내용이다. 지금까지, 성화는 회심에서 나타나는 모종의 변화로 묘사되어 왔다. 이제, 그것이 확대된다. 이 기도는 교회, 즉 이미 성화된 사람들의 공동체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완성을 향한 성화의 확장을 위한 기원이다. 물론, 이것은 희구적인 기원으로서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원초적 성화의 확장을 믿었다. 여기에서 중심단어인  ̀ολοτελεις는  ̀ολος와 τελεις의 합성어로서 “전체적으로(wholly)”와 “완벽하게(perfectly)”를 둘 다 의미하는 양적이며 질적인 용어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기원한 성화는 계속적이고 점진적이며 성장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화에 있어서도 바울이 기도했던 성화자는 하나님이다. 성화의 논리는 고전 3.7에 잘 묘사되어 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인간은 최선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동역자 (συνεργοι θεου)”, 즉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으나, 결코 성화자일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화자일 뿐 아니라, 여기 분명히 기록된 대로 우리 성화의 완성자이다. 그것은 그가 우리 성화의 보존자라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하나님의 신실성에 기초하여, 우리를 부르고 성화하신 그가 계속 성화하고 끝까지 보존해 주시리라 확신한다. 이 계속적 성화의 개념은 인간적 요인을 강조하며 딤후 2.21에도 나타난다: “누구든지 이런 것(악)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비록 하나님이 여전히 성화자이지만, 여기에는 조건적 성화의 개념이 나타난다. 이 조건문은 문법상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노력해야 하지만 주어 τις가 암시하는 대로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는 예기적 조건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은총적인 성화에 추가하여, 이 본문은 상대적이고 조건적이며 의지적인 성화에 관한 것이다. 이 성화는 중생이나 수양과 무관하고 봉사의 종류를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집 안에 있으나, 각자는 훈련과 성화의 정도에 따라 그 자신의 용도가 배정 된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0). 그러나, 우리가 그 조건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우리는 그 상대적이고 조건적인 내용이 본질상 성화가 아니라 오염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조건절 “누구든지 이런 것(악)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은 단순히 “만일 성화된 사람이 죄악의 유혹에 빠져 오염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서 자기의 성화(상태)를 유지하면”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삶을 살라고 부르셨기, 1.9”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 2.19”.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셨으므로, 1.7”,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며, 1.14”,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2.26”, “정욕을 피하는, 2.21” 것은 우리 성화된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다. 동사 εκκαθαιρω가 성화의 함축적 내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주체가 인간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중생적인 행위와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신적 성화의 보존을 위한 모종의 인간적 도구성을 의미한다. 나아가, 살전 5.23을 참조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순종이 그가 성화의 완성을 향한 성령의 계속적 성화사역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성화의 진보에 공헌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조건이 성취된 결과는 “충성된 사람들, 2.2”, “좋은 군사, 2.3”, 또는 “인정된 일군, 2.15”과 같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 나오는 두 개의 수동 완료분사  ̀ηγιασμενον과  ̀ητοιμασμενον은 그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이 부사적 분사가 표현하려는 용법은 원인인가, 방편인가? 다른 말로, 그가 귀히 쓰는 그릇이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성화시킨 대로 거룩을 유지했기 때문인가, 또는 그가 그 자신을 악에서 깨끗케 함으로서 성화됨에 의해서인가? 둘 다 가능하며, 중생적 성화가 연장되고 확대되는 방식으로 상호 보완된다. 한편, 구문상 성화되는 것은 “예비 (equipped)”되어 “쓰심에 합당하게 (useful)”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성화가 실천적인 사명, 즉 하나님에 의하여 선한 일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 깊게 증명한다. 그러므로 성화의 예비는 교회 직분자들에게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거룩한 예비와 훈련은 본서에서 유명한 구절에 나타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3.16-17“.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중생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 둘 다에게 결정적인 방편이다. ”귀신의 가르침, 4.1“을 반박하며 음식의 성화를 가르치는 딤전 4.5은 성화를 위한 다른 방편을 소개한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성화되는 것은 분명히 음식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음식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가하여 감사 기도가 제시된다. 비록 이 문맥이 그 적용성을 음식의 성화에 제한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화를 위한 그 보편적 효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그것은 유사하게 다른 피조물, 환경, 조건, 또는 심지어 동료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성화된 사람에게는 타부시되는 대상이나 상황이 없으며, 그와 같은 긍정적 자세는 분명히 그 안에서 성화가 진전되는 믿음을 표현한다.

 

이제 히브리서의 용례는 성화의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원인, 즉 “그리스도의 보혈”에 집중되고, 지금까지 제시되어 왔던 진리, 신앙, 세례 그리고 기도와 같은 것들은 단지 성화의 2차적 방편일 뿐이다. 히브리서는 엡 5.25-26에서 간단히 서술되었던 주제를 강렬하게 파고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거룩하게 하시려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히 10.10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분명히 언명한다. 그의 육체적 희생은 우리 성화의 기초 원인이며, “단번에 (εφαπαξ)”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희생뿐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성취된 성화의 절대적 완전성도 규정한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이 성화는 그것이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시 그리고 또다시 행해져야 했던 구약 제사장 제도의 제의적 성화와 같지 않다. 히 10.14은 동일한 원칙을 반복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개선하기 위한 모든 도덕적 및 종교적 노력과 다르다. 그런 것들은 항상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그리고 또다시 반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성경이 중생적 성화의 완전을 향한 확장을 가르치지만, 그 원초적인 혹은 중간적인 단계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완전주의이든 불완전주의이든, 성경의 구속적 조망으로부터 이탈한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성취된 성화인 한, 그것은 항상 완전하다. 그것은 사죄나 칭의와 유사하다. 비록 심지어 “단번에”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다시 그리고 또다시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원초적 사죄나 칭의가 불완전했다고 말할 수 없다. 원초적 성화와 계속적 성화는 하나의 실체로서, 항상 자라지만 항상 완전하고 아름다운 나무와 같이 성장하고 확대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보완해야 될 불완전이란 없으며, 이 완전성은 전적으로 오로지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님의 육체적 희생은 “속죄제물 ( ̀ιλασμος)”로서,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요일 1.7, 계 1.5”. 피의 성화 (blood sanctification)라는 성경적 원리는 히 9.13-14에 예시되어 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피가 거룩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한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의 상징에 불과하다. 전자는 사람의 “육체 (σαρξ)”를 단지 상징적으로 성화하는 반면, 후자는 그의 “양심 (συνειδησις)”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실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피가 희생적 죽음의 상징이지만, “어린 양의 피, 계 12.11”는 성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성화가 값싼 자기개선 프로그램과 같지 않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의 희생하신 피는 “새 언약의 피, 마 26.28, 막 14.24)”이다. 히 10.29은 성화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 피가 없이는, 의식적이든 구속적이든 성화란 없다. 한편, 이 구절은 성화되었지만 “의도적으로 계속 범죄하는” 사람에게 성화의 영원한 효력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성화된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며 성령은 은혜스럽게도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지만 이와 같이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는 관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 계시된 원리는 성화의 한 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기계적이거나 강제된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회복시켜 성화하신 그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는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화된 사람이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인도로 예비되어 있지만 프로그램 된 로봇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자동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 위의 경우가 발생하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단지 하나의 경고성 권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히 13.12은 그의 희생적 죽음에 “고난”이라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느니라”. 금욕주의적 전통은 고난이 가장 능력 있는 성화의 방편이라고 주장해 왔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성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자의적인 고난이 우리의 성화에 요구되는지는 의심스럽다. 고난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imitatio Christi) 길이지만 (벧전 2.21), 오로지 그것이 순종의 길일 때만 성화가 성장하는 방편으로 작용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우리자신을 성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성화되는 것은 은혜에 의한 것이다. 히 2.11은 성화자 ( ̀ο ̀αγιαζων)와 피성화자 ( ̀οι ̀αγιαζομενοι)를 분명히 구별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 벧전 3.15)”. 이 구절은 이사야 8.13의 재구성된 인용이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라”. 이 문장에 이어서 어떻게 거룩하게 할 것인가를 재 언급하는 두 개의 반복적인 문장이 나온다: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he is the one you are to fear, he is the one you are to dread)".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한다는 구문론적 의미는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며, 이 의미는 두 본문의 앞 절에 의해 확인 된다 (사 8.12=벧전 3.14). 공포의 감정이 아니라 존경과 경외 (롬 13.7, 요일 4.18)로 정의되는 ”두려워함“은 성화된 사람이 가질 당연한 태도이다: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7.1“;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빌 2.12-13)”. 하나님을 성화시킨다는 것은 주기도문에서와 같이 간접적인 개념이다. 음식의 성화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시므로, 이것과 연관하여 성화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우리자신이다. 유 1.1.은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문구는 몇 가지 원문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사랑을 얻은 자들 ( ̀ηγαπημενοις)“에 관한 것인데, P사본과 Majority Text에서는 “거룩함을 받은 자들 ( ̀ηγιασμενοις)“로 대치되어 있다. 사본의 다수는 전자를 지원하지만, 후자가 구원론적으로 보다 합리적으로 보인다: “부르심을 입고, 거룩함을 받고, 지키심을 입은 자들 (the called, sanctified, and preserved)”. 계 22.11은 자기의 길을 지키라는 명령으로 엄숙하게 성경을 끝맺는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그것은 “때가 가까왔기, 10b” 때문이다. 여기서, “거룩하게 된다”는 말은 문맥상 “의를 행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상이 예비되어 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2”.

 

 

3. 성화의 교리

 

(i) 성화는 성령의 인도에 자기를 부인하는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이고 완전한 헌신을 이룩하기 위한 영적 발전의 긴 과정이다. 그것은 중생(즉각적 성화)의 원초적 변화에서 시작하며, 모든 면에서 점진적인 성장과 성숙(점진적 성화)을 위해 영원히 계속된다. 비록 자주 퇴보도 발생하고 항속적 발전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와 정화는 계속 증진한다(롬 6.19, 소후 3.18).

 

(ii) 동방교회는 성회를 일차적으로 신화(神化)로 이해하고, 로마 카톨릭교회는 imitatio Dei, 즉 신의 모방으로 이해하지만, 존 칼빈은 그것을 주로 자기 부인으로 이해하며, 존 웨슬리는 정화로 이해한다. 비록 5대 전통의 대표들이 저술한 Five Views of Sanctification에서 보는 대로 성화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다음과 같은 공통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


(1) 성화는 타락으로 인해 오염된 원초적 인간성의 회복이다.

(2) 성화는 실체의 변화라기보다 방향의 변화로서, 존재의 모든 영역과 성향에 영향을 미친다.

(3) 성화는 삼위 하나님, 특히 성령님의 사역이지만, 그것은 또한 자유로운 순종을 통한 인간의 책임을 요구한다.

(4) 성화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근거한다.

(5) 성화는 신앙에 의해 개인에게 적용된다.

(6) 성화는 두 방식으로 실현된다: (a) 중생에서 발생하는 시발적, 기초적, 즉각적, 확정적 성화, (b) 전 생애동안 계속되는 진보적, 점진적, 경험적 성화

(7) 성화는 영화에서 완성된다.

(8) 성화는 과거의 자아와 새로운 자아 사이의 내적 투쟁을 극복하고 후자가 지배적이 되어가는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다.

(9) 성화는 하나님이 부여하는 성화의 방편에 의해 보조된다.

(10) 성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간의 봉사라는 목적을 향한다.

 

(iii) 성화는 전인, 즉 영혼과 육체(고전 7.34, 고후 7.1, 빌 3.21, 살전 5.23), 지성(골 1.10, 3.10, 빌 1.9, 롬 12.2, 고후 10.5)과 감성(갈 5.22, 24, 벧전 2.11, 롬 6.17, 엡 4.31, 요일 2.15)과 의지(빌 2.13)에 영향을 미친다. 성화가 성령의 열매에서 보는 대로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자기중심성의 부인(근본적 무요구)이기 때문에, 성화는 개인주의적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나아가 세계의 성화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계속 자기를 죽이고 다시 사는 계속적 중생과 회심이 요구된다. 그것이 죄로부터의 정화인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헌신이기 때문이다. 성화는 의식과 무의식, 가시적인 그리고 불가시적인 영역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도덕적 개선을 포함하지만(마 5.16), 그 본질은 항상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동시에 수동적이며 능동적이어서, “우리를 성화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수동적 신뢰와 동시에 우리의 삶에서 상향된 거룩과 순종을 위한 우리의 능동적 노력을 통해 우리가 계속 자라는 것이 중요하다.”(그루뎀)

 

(iv) 하나님의 말씀, 성례, 예배, 기도, 섭리적 인도, 교제, 자기 훈련 등이 성화의 방편으로 인정되지만, 실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대한 모든 순종이 이 방향으로 도움을 준다. 더욱이, 성화는 그리스도를 닮고 imitatio Christi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것 participatio Christi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성화를 위해 필수적이고 본질적이다.

 

 

4. 완전 성화

 

(i) 구원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을 실현하는 긴 과정이기 때문에, 그것은 현재적 실체이며 또한 미래적 기대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그 완성을 위해 정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완전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명령되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따라서, 완전의 추구를 무시하는 방림주의자들의 방종은 구원의 목적에 상반되는 것이다. 물론, 율법주의나 자연 종교의 접근도 정당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전 과정을 통하여 우리 구원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다.

 

(ii) 구원의 완성은 성장과 성숙의 개념으로 서술된다. 소명, 중생, 회심, 신앙, 회개, 칭의, 그리고 성화를 포함하는 구원의 모든 측면이 계속 자라나지만, 적은 신앙에서 큰 신앙으로, 약한 신앙에서 강한 신앙으로 자라가는 신앙의 성장이 삶의 모든 영역을 반영하기 때문에 모든 영적 성장의 척도로 인정된다.

 

(iii) 존 웨슬리가 완전주의, 즉 완전한 성화가 현세에서 가능하다는 이념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전적으로 무죄한 완전이 아니라, 단지 “알고 있는 율법의 의도적 범죄”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상태가 성령의 제2 축복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성경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일 1:8)고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에, 아무도 무죄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목표를 향해 정진해야 한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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