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랑 하실 수 없다.
'나' 때문에 주님께서는 친절 할 수가 없고,
'나' 때문에 주님께서는 관심을 자져줄 수 없고,
'나' 때문에 주님께서는 웃으실 수조차 없다.
'나' 때문에 주님께서는 의가 상한 가족들과 친구들과 그리고 한 교회 교인들하고 조차 화해하실 수가 없으시다.
'나' 때문에 꼭 하셔야 할 일들이 지연 되고 있고 복잡해 지고 힘들고 오해 마저 생겨 미움과 다툼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는 더욱 텅 비게 되고 주님의 십자가만 더 무거워 진다. *
"나(자기)는 이제 없다"라고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벌써 세상은 그만큼 평화로워진 것 같다.
교회에 가도 '나'라는 신자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교회는 얼마나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곳이 되는지 모른다.
직장에서도 '나'라는 종업원이 없어져야 모두들 마음이 편해지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가 없어져야 모두들 유쾌해 진다. 심지어는 가정에서 조차 '내'가 없어져야 모든 가족원들의 마음이 안락해 진다.
'내'가 만약 오늘 '자기 십자가'에 처형이 되고 만다면 기독교회는 얼마나 큰 능력으로 넘치게 될까!
모든 '나'만 없어진다면 세상은 곧 천국이 될 것이다.*
갈보리 산 언덕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 후 부터 하나님 께서는 우리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다시는 문제 삼으실 수 없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들의 죄악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죄악은 2천년전 그때 갈보리 산 십자가로 처형이 끝나고 만 것이다. 이미 처형되고 만 우리들의 죄악은 하나님도 다시 찾아내 문제 삼으실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갈보리 산 십자가에 처형된 분은 아들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다시는 우리들의 죄악을 문제 삼지 않으시기로 하셨다는 하나님의 영원히 변개 될 수 없는 절대 언약의 증거요 보증의 대속물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들의 죄악에 관계된 일로 꼭 한가지 문제 삼으시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가 전에 우리들의 죄악을 미워하시던 같은 무게만큼의 미움을 가지시고 문제 삼으신다. 그것은 회개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죄악이 차마 아내한테도 말 할 수 없고 자식이나 친구나 부모에게조차 의논 할 수없고 또 온 나라 온 세상이라도 경악하며 침을 뱉게 될 그런 엄청난 죄악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의 죄값으로 아들 예수의 피가 이미 흘려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무게는 세상의 어떠한 죄악의 무게 보다 무겁다. 이 고귀한 아들 예수의 속죄의 피가 값 없이 조건 없이 주어졌는데도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아들 예수의 피를 거부하는 마지막 죄악을 범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마지막 범죄다. *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이름 없는 자가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직 섬기기만 하는 자가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 마저 달게 받게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의 대답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십자가로는 안 되겠느냐?"는 것이다.
십자가 보다 더 큰 성령의 능력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께로부터 이 한가지 질문을 받고 있다. "십자가로는 안 되겠느냐?" 곧 "십자가를 져 보았느냐?"는 뜻이다. *
기독교는 그 첫 관문에서 '나'의 장례식을 요구한다. 곧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 것을 절대로 요구한다. '자기'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오늘도 시끄럽다. *
십자가는 하나님의 혈서다. 나의 구원의 근거는 이 하나님의 혈서에 있다. '나는 도둑놈 입니다' 혹은 '나는 살인자요 각종 더러운 죄인 입니다' 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막지 못한다. 마찬 가지로 내가 도둑놈이 아니고 살인자가 아니더라도 그것으로 나의 구원을 이룰 수 없다.
나의 구원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혈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을 뿐이다. 내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나의 영혼의 이마에는 너는 내것이라는 하나님의 혈서가 쓰여진다. 그러므로 이제 이후로는 다시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내 이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혈서는 하나님의 최후의 창조 행위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렇게 해서 창조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무것도 나를 이 하나님의 것이 된 상태로부터 끊을 수 없다. 핍박이나 곤고나 환란도 나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 천사들도 못하고 하늘에 있는 어떤 권능도 땅에 있는 어떤 권세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자신도 이제는 영원히 나를 버리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 영혼의 이마에는 아들 예수의 피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피를 버리실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쓰여진 하나님의 구원의 혈서는 이와 같이 영원 불변하다. 나의 구원은 이 정도로 확실하고 확고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대신 죽었다는 사건 이상의 사건은 신 자신도 상상 할 수 없다. 만약 그보다 더한 큰 사건이 있다면 그가 곧 신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후다. 아니 하나님의 전부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란 천상천하에 영원히 없다. 나의 구원은 이와 같이 큰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되는 것 보다 더 큰 사건(기적)이란 이 세상에 없다. 한 사람이 구원 받게되는 것 보다 더 크고 굉장한 일은 천하에 없다. *
십 자 가
선지자는 부르짖는다. 그래서 세례 요한 까지도 광야에서 외쳤다. 그러나 부르짖어야 되는 것은 아직 완전한 진리는 아니었다. 부르짖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참 진리가 오는 길을 앞서 예비하는 일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세례 요한에게서 보았다.
완전한 진리는 부르짖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완전한 진리는 대신 죽어 주는 것으로만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외치는 대신 십자가 위헤서 대신 죽어 주셨다. 그리하여 인류는 예수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참되고 완전한 진리를 보게 되었다.
내가 목회를 해 보니 내가 교인들을 위하여 죽지 않을 때 일 수록 강단 위에서 더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
십자가의 길은 잘못을 비는 길이다. 곧 회개의 길이다. 자기 잘못을 빌 줄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잘못을 빌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자기 잘못을 빌 줄 모르는 사람은 정상적인 가정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자기 잘못을 빌 줄 모르는 사람은 정상적인 직장의 일원이 되어 같이 일 할 수 없다. 자기 잘못을 빌 줄 모르는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 할 수 없다. 사회는 그런 사람을 따로 격리하여 그 시대로 부터 추방한다.
하물며 천국이랴! 자기 잘못을 빌 줄 모르는 사람은 결단코 천국의 일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도 자기 잘못을 빌 줄 모르는 사람하고는 같이 사시지 못하신다. *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이것이 복음이다. 모든 말씀은 이것으로 해석되고 모든 말씀은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있다. 따라서 모든 설교는 이것을 위해서 있다. *
우리가 십자가를 향해 갈 때는 성령께서 우리들의 앞과 옆과 뒤에서 밀고 붙들고 이끌어 주신다.
마침내 우리가 십자가를 만나게 되면 성령께서는 우리 속으로 들어오신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하여 천국을 향해 가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우리가 성령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데는 이론이 필요없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묘안이라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그에게 당장에, 1분내로 필요한 일은 조건 없이, 수속 절차 없이 그 자리에서 <건짐 받는 것> 뿐이다.
예수 십자가가 바로 이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놓고 재판 먼저 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도 안 하는 짓이다. 하물며 세상 만민의 구원을 선포한다는 교회에서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오히려 때 찾고, 장소 찾고, 출신 신학교 찾고, 소속 교파 찾고, 각종 형식 찾고, 목사파 장로파 찿느라고 교회 주변의 죄인들이 죄악의 강물에 떠내려 가고 있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니! *
기도는 설교보다 앞선다. 그러나 기도보다도 앞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십자가다.
십자가 지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아니 하시고, 자기 십자가 지지 않는 설교는 교인들이 듣지 않는다. *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까? 각종 좋은 것을 다 열거 해 보라. 갖은 좋다는 방법을 다 동원 해 보라. 그 무엇 하나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있는가!
예수 죽음 가지고 십자가 방법으로 하나님 섬기는 길 외에 다른 방법 없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길이다. *
사람들이 한 그리스도인을 보고 말하기를 "그 사람을 보면 예수가 생각난다. 예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라고 한다면 그 예수의 모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십자가를 진 모습 뿐이다. 바울 사도의 모습이 그런 것이었다. *
자기 십자가 안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 생활이 아니다. *
기독교는 논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데 다툼이 일어날 수 없고 십자가 지는 데 싸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성자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기 어께에 십자가로 지는 사람이다. 성도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그런 것이었다. *
그는 나를 위해 죽으셨을 뿐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이 나에 대한 그의 요구요 나에 대한 그의 모든 것이다.
그는 십자가로 나에게 말씀 하시고 십자가로 나를 나무라시고 십자가로 나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로 나를 부르신다. *
'자기'가 죽은 사람이 아니면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섬길 수 없다. *
세상에서는 의를 위해서 부르짖어야 참된 용기가 된다. 정치가도 그렇고 사회 사업가도 그러하며 심지어 학자들 조차도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의를 위해서 부르짖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불의를 그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질 뿐이다. *
십자가에서 세상의 판결은 끝이 났다.
십자가로서 하나님은 일손을 놓으셨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다. *
십자가는 하나님 집의 문이다. 그 문을 통해서가 아니면 하나님의 집에 들어 갈 수 없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창이다. 십자가를 통해서가 아니면 하나님께 말씀 드릴 길이 없다.
십자가는 하나님 집의 일이다. 십자가 질 줄 모르면 하나님 집의 종이 될 수 없다. *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실 수 있는 조건을 완성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인간을 사랑하실 수 있는 절대 조건을 얻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도 하나님이 미워 하실 수 있는 죄인은 없다.*
율법은 꾸짖고 십자가는 용서한다.
율법은 죄를 들어내고 십자가는 죄를 덮어준다.
율법은 죄값을 요구하고 십자가는 죄값을 지불해 준다.
율법의 얼굴은 무섭다. 그러나 십자가의 얼굴은 부드럽다.
율법은 재판정의 문을 열고 십자가는 재판정의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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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는 법에 관한 문제는 내가 책임 질 테니 너희들은 사랑만 하라는 뜻이다. *
마침내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되면 그의 인생도 끝이 나게 된다. 죽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 믿는다는 것은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그의 앞에서 그를 기다려 주는 것은 새 생명의 부활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 뿐이다. *
십자가의 도
다이야몬드의 참된 가치는 그 빛나는 아름다움의 자랑에 보다 그것의 영구불변성과 강도의 유용성에 있다.
예수 십자가 도의 가치는 자랑에 있지 않고 그 영원한 생명 되심에 있다.
교회가 생명 구하는 일에 흥미를 잃고 자랑을 일삼게 될 때 타락하게 된다. *
예수가 가르쳐 준 십자가는 끌고 다니라는 것도 아니고 목에 걸고 다니라는 것도 아니며 혹은 지붕 위에 세워두라는 것도 아니다.
예수가 가르쳐 주신 십자가는 내가 거기에 매달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