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방법)계명.제안.비결

나폴레옹의 5대 전략

好學 2009. 7. 18. 22:22

 

나폴레옹의 5대 전략

 

 

1. 작전군은 동일한 작전목표를 가진다.

 

두마리의 토끼를 노렸다가 한마리도 얻지못한것 처럼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갖고 그것에 온힘을 집중하는것을 전략원칙에 가장 중요한것이라고 강조했다.

 

2. 적 야전군의 주력을 격멸시키는것을 작전의 제1목표로 한다.

 

그때까지의 전쟁은 대부분 영토획득을 목표로 한것이기에 지리한 공성전이 많았다.

나폴레옹은  이런 영토획득같은것은 부차적인것으로 생각해서 미루고, 먼저 적의 주전력을 격파함으로써 남은 모든것을 얻는것을 목표로 삼았다.

 

3. 전쟁개시의 초기배치에서는 휘하의 병력을 넓은지역에 분산배치하라.

 

나폴레옹은 전쟁개시 초기에 휘하병력을 광범위하게 분산배치시켰는데,

이는 적에게 자신이 노리는 주목표가 어디인지을 판단할수 없게 만들어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전략중에 하나였다.  또한 전쟁중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서 새로운 목표에 전력를 집중할때 용이할수 있게 이러한 방식을 채택했다.

 

4. 적의 측면이나 배후에 아군의 주력을 배치하라.

 

이것이 나폴레옹의 전략중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는 말일것이다.

적의 주전력을 격멸시키기 위해서는 아군의 희생도 적지않다. 이를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적의 측면이나 배후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급습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당시 프랑스군대는 군대개혁을 통해 그당시 유럽의 모든군대보다 가장 신속한 이동력을 보유했으며, 그 이유에는 보급품의 현지조달을 꼽았다. 당시 유럽군대는 보급창고를 만들어 거기서 조달하는 범위내에서만의 활동제약이 있는관계로 신속한 이동은 꿈도 못꾸었다.

또한 미끼부대를 적의 주력과 교전케하는 사이 주력은 적의 배후로 신속이동해 배후에서 공격을 가해 승리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5. 부대간의 연락선을 꼭 확보하라.

 

나폴레옹의 병력은 광범위하게 분산 이동하였기에 부대간의 신속한 연락만이 전략전술에서 승리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본진을 중심점으로 보고 포메이션을 구축했으며, 작전부대와 행군거리로 6일이상의 거리로 멀어지면, 즉시 이동하면서 쫓아갔다고 한다. 이것은 상당히 좋긴 하지만 부대간의 신속한 집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각개격파을 당할수도 있는 위험도 내포되어 있다.

 

 

각개격파(各個擊破) 전법

 

 

나폴레옹은 적보다 월등히 빠른 기동성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경이로울 정도의 변화무쌍한 전략전술을 구사하여 연전연승하였는데 그것의 가장 극적인 예가 '각개격파(各個擊破)'이다.

 

<나폴레옹을 성공시킨 각개격파 전법>

1789년 10월 프랑스혁명의 와중 속에서 돌연 그 모습을 나타낸 나폴레옹은 불과 하루만에 파리의 폭동을 진압시키고 1796년 3월에 이르러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이 되자 그대로 숙적 오스트리아군을 이탈리아에서 일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전 유럽을 석권하고 말았다.

그의 경이적인 성공의 근본 원인은, 다른 나라에 앞서서 국민군을 편성한데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직접적인 것은 그가 개발한 신전법에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이전의 장수들은 태세의 우위를 가지고 승패를 가름하였다.이것은 나폴레옹 이전의 기동전략이라고 하는 것은 교묘히 기동하여 유리한 태세를 만들어 내는 것을 전략의 주안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폴레옹 이전의 장수들은 포위를 당하면 그대로 퇴각했다.그리고 3개 방향에서 공격해 오는 2배 이상의 적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게 되는 매우 불리한 사태에 빠질 경우엔 '패했다!'고 인장한 후 그대로 퇴각하였는데, 만일 이럴 때 적과 싸우는 것은 장수의 매너에 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러한 것을 모두 무시하고 퇴각하지 않았다.그 뿐만 아니라 종래에 최대의 위기로 보아온 포위공격 속에서 챤스를 발견하면, 전술적 승리는 전략적 승리에 우선한다(전반적인 태세가 불리하더라도 국소로 이기면 된다. 전략적으로 이겼다 하더라도 전술적으로 이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단호히 외치면서 적에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즉 적은 세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고, 우리는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 있다.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볼 땐 적보다 열세하지만, 적의 한 집단에 대해서는 우리 쪽이 유리하다는 원리를 적용한 것이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1796년 4월 오스트리아군을 이탈리아로부터 추방한 후 5월 맨추어 요새를 고수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 1만을 포위공격 중에 있었는데 7월 하순 전력을 회복한 오스트리아군 주력이 증원을 해오자, 나폴레옹군은 그 집중 포위권 내에 빠져 곤경에 처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적을 분리시켜놓은 다음 각개로 격파할 결심을 굳히고 결연히 맨추어의 포위망을 뚫고 가르다호(湖) 남동지구로 전진(轉進), 이곳에다 주력을 집결시킨 다음 전기(戰機)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각 부대에 신속한 행동을 요구하였으며, 가장 중용한 대포를 땅 속에다 묻어 놓고 방치하는 상태였다.


 8월 3일, 나폴레옹은 먼저 가르다호 서안에 있는 적 2만을 살로 부근에서 기습하여 격파하고, 그 여세로 후방에서 공격해 온 적의 주력인 중앙군 2만 5천을 가스티그리완 부근에서 격멸시켜 전 유럽을 아연케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이 작전 기간 중 명마 다섯마리를 갈아탈 정도로 대활약을 하였던 것이다.



<종대(縱隊) 전술의 채용>

18세기의 3만 ~ 5만의 군대는 각종 병과(兵科)로 혼성하여서 행군 중에도 사령관의 명령 하나로써 질서정연하게 횡대로 전개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때나 전장은 넓은 장소가 아니면 안 되었다.그러나 벌써 10만 내지 20만 이상의 대군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은 독립전투능력을 가진 수많은 사단을 1일 내지 2일 행정의 거리를 두고 수개로 분리시켜 진격시키는 것이 통례였다.나폴레옹은 1796년부터 1797까지의 이탈리아 침공작전에서 '사단체계(divisional system)'를 채용했다.그는 후에 이러한 개념을 확장하여 '방진대대(batealion dquare)' 혹은 몇 개의 사단으로 편성된 군단을 만듦으로써 모든 부대는 어떠한 적군에 대해서도 하루나 이틀은 단독으로 지탱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같은 결정은 다른 종대가 여러 방향으로부터 동시에 적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군사전략적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그가 병력을 분진시키는 의도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적에게 아군의 작전기도를 비닉하고 적의 기도와 병력동향 등의 허실을 용이하게 포착할 수 있으며 대 부대 이동에 있어 현지보급의 부담등이 경감된다는 등 여러 가지 이점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항상 교묘한 전략을 입안하고, 독특한 기동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전선에 이를 때가지는 병력을 분진 시키다가 적의 주력을 발견하게 되면 그 어느 일점을 향하여 신속히 전 병력을 집결시켜 협격하는 데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하였다.

즉, 적의 허를 포착하면 전기를 일실(逸失)함이 없이 적의 중앙부를 돌파하는 모험적 전술을 여지 없이 발휘한 대 전략가였다.

당시는 오를날과 같이 전신, 전화 등의 통신망이 없었으므로 나폴레옹은 전령운용을 초인적으로 신속하게 수행하였다


 그것은 그가 항상 옆에 유능한 기병 전령관과 천리의 준족들을 대비시키고 있다가 일단 적과 조우하여 공격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면 일시에 필요한 각 방면으로 집결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나폴레옹은 산병(散兵)전술과 밀집 종대전술을 교묘히 활용한 사람이다.그는 산병의 사격효능을 더욱 증강하는 동시에 밀집종대의 돌격력을 이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중 특이한 것은 중앙돌파였는데 그것 역시 밀집종대의 돌격력에 의한 것이었다.즉 나폴레옹은 결전에 앞서 교묘히 일부 병력을 산개대형으로 전진시켜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그 기회를 포착하면 질풍처럼 집중돌파를 감행하여 적의 병단을 사분오열로 분산시켜 상호지원을 할 수 없게 한 후에 타격 목표에 병력을 집결하여 내선 작전 개념에 의한 각개격파를 하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전술은 때와 장소에 따라 천변먼태라고 볼 수 있으나 그의 전법은 어느 때나 전 병력을 일점에 집중시키는 것이 비결이었다.언젠가 부장 모로우가 나폴레옹에게 "폐하는 언제나 소수를 가지고 다수에게 이겼다"고 말한데 대해, 나폴레옹은..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다수를 가지고 소수에 이겼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병력 집중의 원칙에 의한 상대적 우위의 묘리를 설명한 내용이었다.



<기동성의 향상이 가능했던 이유>

18세기의 군대는 병력의 3분의 1 또는 반수에 이르는 말을 사용하였고 포병 기병 뿐 아니라, 치중(輜重)에 많은 말을 필요로 하였다. 치중에 있어서는 탄약, 식량, 막사, 장병의 화물, 말의 사료(1두당 사람의 10배) 등을 운반하였다. 따라서 군의 기동은 행군이라기보다는 이주(移住)라고 볼 수 있었으니 이에 제약을 받아 18세기의 전쟁은 병력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매우 느렸다.

치중문제를 교묘히 처리하여 기동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명장의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그런데 프랑스 혁명군은 식량을 적지에서 조달하고 (즉.現地自活) 최소 한도의 화물과 필요에 응하여 군대의 휴대품을 경감하였다. 또한 프레하브 주택과 같은 무거운 막사는 엷은 휴대천막으로 대치되었다.이와 같은 조치는 돌연한 대 징병에 의하여 장비의 부족으로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오히려 병사들의 고통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치중의 격감으로 여러 가지 무리와 절대량의 부족을 초래하였으나 대국적으로는 지형의 영향을 감소시킬 수 있었고 또 행군속도에 탄력성을 가져와 군의 기동력과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결과적으로 그 당시 프랑스에 대항하는 적군의 전진이나 전투에 임하는 보속은 종전과 같이 1분에 70보인데 비해 프랑스 군의 보속은 1분에 120보로 증대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폴레옹은 적에 비하여 신속한 기동과 집중전화을 가능케하여 속도에 의한 부대의 타격력을 배가시켰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총으로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의 다리를 가지고 전투를 한다고 했다.또한 그의 병사들도, "우리의 황제는 새로운 병술을 발견하였다. 그는 우리들의 무기를 사용함이 없이 우리들의 다리를 가지고 싸웠다"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부대의 기동은 주로 보병에 의한 행군에 의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나폴레옹의 이같은 기동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무거운 장비를 휴대하고서도 급 행군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행군에 의한 피해가 전투간의 피해보다도 상회하는 일이 많았다.



<나폴레옹의 전략 대관(大觀)>

전술한 바와 같이 나폴레옹은 징병제, 현지급양제도, 그리고 종대전술의 획기적인 개혁과 '부르세'의 계획적 분산원칙, 다지(多枝)계획, '귀베르트'의 기동력과 사단전투 능력의 잠재력에 대한 선구자들의 이론을 유산으로 받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켜 거의 추가함이 없이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었으니 바로 이것이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 나폴레옹이 아니었다면 한낱 이론으로 그쳤을 지 모를 일이다.


다만 추가 시켰다면 포병을 보병이나 기병과 같이 집중운용하였다는 점일 것이다.그는 말하기를,"중대한 효과를 얻으려면 포병도 다른 군사와 같이 밀집을 시켜야 한다. 총검으로 싸우듯이 포격을 해서 싸워야 한다. 밀집전을 쓰면 그 효과는 더욱 더 크다."라고 하였다.

石原完爾는 그의 저서에서 "나폴레옹이 그 천재적 직관력을 갖고 사물의 진상을 통찰하고 혁명에서 얻어진 삼대개혁을 종합하여 이를 전략으로 활용하고 병력을 신속히 결승점에 집중, 적의 주력에 대하여 일거에 결전을 강요한 후 맹렬하고도 과감히 그 승리를 추구하여 순식간에 적을 굴복시키는 섬멸전략에 의한 획기적인 성공을 획득, 전 유럽의 이목을 진동하게 하였으나 이 전략을 일반이 쉽게 이해치 못함으로써 나폴레옹의 성공은 점점 위대한 것으로 받아졌다."라고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마크' 장군은 '울름'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패한 후 "나폴레옹은 전쟁의 정석으로 싸우려 하지 않는다"라고 개탄하였듯이 나폴레옹은 마치 기본적인 삼색을 수백 가지 색조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같이 각국에서 항용(恒用)하는 구태의연한 구전법에서 탈피하여 "전쟁에는 고유한 진형이란 있을 수 없다."라는 자신의 금언과 같이 그는 천부적인 전략안을 가지고 예민한 통찰력과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신속과감한 결단력으로 전쟁을 지도함으로써 연전연승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나폴레옹의 섬멸전략을 가장 빨리 체득한 것은 프러시아의 장군 샤른홀스트와 구나이제나우로서 그들은 이 전략을 역이용하여 후일 나폴레옹을 괴롭혔던 것이다.나폴레옹도 자신이 희망하였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전쟁에서 전쟁으로 달음질 쳤으나 끝내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피폐만 확대시킨 채 붕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