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낱말뜻
- 발음 : 아나스타시스 anastasis {an-as'-tas-is} - 어의 : 회복, 다시 살아나는, 죽음에서 일어나다.
이 단어로는(마 22:28, 22:30, 막12:23, 눅14:14, 20:33, 요11:24, 계20:6)에서 나온다. 부활절은 성도에게 믿음의 생동력과 승리를 맛보게 하며, 환희의 절기 이다. 그러나 부활절에 이르는 동안 우리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이런 준비와 과정없이 부활절을 맞는 것은 아무런 준비없이 결혼날을 맞는 신랑.신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부활절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겠는데, '한날'에 치중하기보다 '전체'를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사순절
사순절, 또는 수난절이라 하는 절기는 부활절이전 46일간(주일을 제외한 40일) 기간을 의미한다. 이 때에는, (1)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는기간으로 삼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을 묵상하며, (2) 믿음을 살피는 기간으로 삼아,내 믿음이 현재 어디에 서 있는지 점검하는 기간이며, (3) 결단의 계절로 삼아, 이웃과 교회를 위한 좋은 계획을 세워 실천하는 기간으로 삼는다. 예를들면 구제를 계획하거나, 선교비를 작정하여 보낸다든지, 헌혈을계획하는 것도 좋겠다.
종려주일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예수께서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펴고 한편, 손에들고 흔들어 축하하였듯 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결단을 찬송하며, 감사하는 절기이다.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사탄을 대적하는 상징이 되며, 번영과 (시92:12), 아름다움 (아7:78)의 상징이기도 하다. 종려주일에는온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기억하고 위하여기도하여 주며,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결단의 시간을 가짐이 좋겠다.
고난주간
종려주일로부터 시작하는 고난주간에는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마지막 한주간에 일어난 성경기사를 중심으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데 전념한다. 특히 성경봉독과 기도에 힘쓰는 일을 주력하면 좋겠다. 이 고난주간동안은 한끼씩, 또는 금요일 하루 온전히 금식하는 것이 좋겠고, 이때 모여진 성미로 구제하거나 고아원 양로원 등에 보냄이 좋겠다. 수요일 밤이나, 목요일밤에는 교회에 모여 세족식을 가지면 좋겠고, 고난주간동안 교회를 완전히 개방하고 성가를 연주하거나 틀어 놓아 인근 주민들이 들려 기도하게 함이 좋겠다. 토요일 밤에는 주일학교 교사들이 학생,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이웃들에게 나눠줄 부활계란들을 채색하는 것 역시 부활절에 가는 추억이 된다.
부활주일
유대인의 날 개념으로 금요일, 토요일과 주일 사흘을 무덤에서 지나신 주일 아침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축하하는 절기이다. 부활절은 기독교에 있어서 성탄절과 함께 양대절기인데, 주후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현재와 같이 춘분후 만월 다음에 오는 첫번째 주일을 부활주일로 정하고 시행하게 되어 금년의 경우에는 4월 2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부활절 새벽에는 연합새벽예배를 드려왔고, 부활절 아침예배는 기쁘고 환희에찬 가운데 드리도록 준비함이 좋겠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활 감사헌금의 사용은 개 교회의 경상비로 쓰기보다 경찰병원, 원호병원, 정신병원 등의 환우들 및 장애단체들을 위해 구제비로 사용하거나, 선교비로 사용함이 좋겠다. 부활절 저녁에는 음악예배를 드려 찬송으로 영광을 돌린다면 인상에 남는 부활절 저녁이 되리라.
부활절 EASTER
부활절 EASTER(행12:4) 에서(KJV)헬라어(토 파스카)를 영역한 말, 다른 영역판 성경은 "유월절"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정확하다,KJV은 이와 다른 28개의 구절에서 토 파스카를 "유월절"이라고 번역했다)."유월절"을 보라.
"이스터"(Easter)라는 명칭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베데(Bede, De Ratione Temporum XV)에 의하면, 이 명칭은 4월에 희생제물이 바쳐진 튜우톤족의 봄의 여신 "이스터"(Eastre)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을 기념하는 크리스챤 의식은 아마도 이교도 축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주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연례의식이 사도 시대에도 지켜졌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5:78 절의 암시를 주목하지만, 이는 의심스럽다고 보겠다.
부활절 축제에 대한 최초의 문자기록은 부활절의 정확한 날짜를 결정하려는 "부활절 논쟁"에 나타나는데, 이는 A.D.154년 서머나(Smyrna),의 감독 폴리갑(Polycarp)과 로마의 감독 안티크투스(Anticetus)사이의 서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Euseb. Hist. V 23-25). 그러므로,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활절 축제가 기독교회 전체에 걸쳐 일반적으로 지켜지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왜 부활주일은 유동적인가?
부활절은 매년 3월 22일부터 4월 25일에 온다. 이것은 춘분다음 첫 만월후 첫째주일이다.
이렇게 지켜지는 이유는 그 유례가 있다. 초대교회때 3세기 동안에는 해마다 부활절을 지켜야 할 일자에 대하여 계속 날카로운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날을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부활절을 음력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서방교회(로마교구를 중심으로한 서쪽에 위치한 교회들)에서는 부활절이 언제나 주일(일요일) 부활일에 지켜져야 하며 십자가 처형은 언제나 금요일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것은 서방 크리스천들에게는 주중의 날이 중요하였고 동방교회(알렐산드리아, 예루살렘, 안디옥, 콘스탄틴 교구를 포함한 로마 동쪽에 위치한 교회들)의 크리스천에게는 달(月)월의 날이 중요하였다.
이런 의견의 해결은 니케야총회(325년)에서 결정했는데 결국 달과 주중의 날 둘다 인정하여 부활절은 춘분다음 첫 만월 후 첫째주일이 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런 유동적인 부활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부활절에 휴가를 하는 학교와 대학들이 교육계획을 종교적인 휴일과 맞추기 위하여 어려움을 보기 때문에 관심이 많다.
이뿐아니라 의복상으로 이른 부활절과 늦은 부활절 때문에 행사의 복의 수요공급이 해마다 달리되는 경우가 있다는 등으로 근년에 와서는 부활절이 고정된 주일이 되도록 고정된 교회력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 내용은 gssvt@hosanna.net이 보내주셨습니다.
정장복 교수님의 예배학 개론에는 '두 월력은 보통 10일에서 심한 겨우 한 달의 간격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2001년에는 서로 다른 날짜의 계산법도 불구하고 4월 15일에 합치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앞에두고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중동교회 협의회(MECC)는 1996년 시리아 알렙포헤서 회의를 갖고 역사적인 결정을 내린바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날짜를 가장 정확한 천문학적 지식을 이용해 산출한 뒤 21세기가 시작되는 2001년을 기점으로 부활절을 함께 지내자"는 합의를 한 바 있다. 이러한 알렙포 제안은 세계의 많은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는 시점에 이르렀다.
세계 성공회 주교회의를 비롯하여 루터교세계연맹(LWF)나 로마 교황청도 "이러한 시도에 근본적으로 동의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심지어 시리아 정교회까지 적극적인 호응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다만 정교회의 최대교단인 러시아 정교회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의의
의식주의자요 독선주의자들인 바리새교인들,부활이 없다고 내세를 부인하는 세속주의자들인 사두개 교인들, 그리고 잔인한 로마의 병정들의 손에 의하여 우리 주님은 만민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득의한 줄 알고 의기 양양하여, 주님의 무덤을 인봉하여 굳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킴은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우리 주님은 사망권세를 이기고 무덤문을 헤치고 부활하고야 말았습니다. 검은 구름이 해를 가리울 수 있으나 해를 없앨 수는 없는 것처럼 악의 세력은 의의 세력을 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이며, 불의에 대한 의의 개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생명의 빛으로 통하는 일시적인 관문일 뿐,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요11:25).
엠마오로 향하던 실의에 찬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마음이 뜨거워져 새 힘을 얻은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눅24:32).슬피울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통하여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마28-9).빈 그물을 걷우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대로 그물을 던지므로1실패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요21:1-11).
성경을 주의 깊게 주목하여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의 확신 전후가 놀랍게도 비교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몇 군대서 주님의 부활사건을 중심하여 그 전후가 어떻게 달랐었는지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의 신앙(눅24:13-17 )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장사되자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예루사렘에서 25리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곳으로 힘없는 발걸음으로 무거운 다리를 옮겨 놓으며 깊은 사랑의 함정으로 빠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그들은 3일만에 다시 부활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말씀하고 계셨지만,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신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와서 예수께서 떡을 떼어 축사하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셔 예수신줄 보게 되었을 때,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소망의 발걸음을 옮겨 제자들과 합세하며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기 전에 발걸음은 실망의 하향 길이었으나, 부활의 주님을 확신한 저들의 발걸음은 소망의 상향 길이었던 것입니다.
2) 무덤문 앞에서 슬피 울던 막달라 마리아(요20:14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바르려고 이른 새벽 무덤을 찾아 갔으나,예수는 보이지 아니했고 빈무덤이었을 때, 무덤문 앞에 엎드려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다시 사셔서 그곁에 오셔서 말씀하고 계셨으나, 슬픔의 벽이 너무도 두꺼워서 예수신줄 알지못하고 겨우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당신이 우리 주님의 시체를 가져 갔으면 내어 달라고 했을 때 주께서 마리아야 평안하뇨 하시매, 그때서야 주께서 다시 사신줄을 믿고 슬픈 눈물을 거두고 기뻐하며, 분부대로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떠났습니다. 우리는 빈 무덤만 바라보고 엎드려 슬피 울지 말고, 빈무덤을 통하여 영원을 바라 보고 소망의 주님을 붙들고, 잃어버린 기쁨을 다시 찾아야 하겠습니다.
3) 공포 속에서 떨고 있던 제자들(눅24:37 )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만 알고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했던 제자들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두려움 속에서 떨며 비겁하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불의를 누르시고 다시 사신 승리의 주님을 확인햇을 때, 의심의 구름은 사라져 가고 밖으로 뛰쳐나와 죽음을 두려워하지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의 화신이 되어 순교하고 자리에 들어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 영원히 죽지 않음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부활 신앙의 확신적 근거는 그들의 생을 공포와 비겁한데서 탈출시켜서 순교자의 담대한 반열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4) 빈 그물을 거두고 있던 제자들(요21:4 ) 십자가를 외면하고, 버려 두었던 자와 그물을 다시금 챙겨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다시 갔던 어부출신의 몇몇 제자들은, 헛수고 뿐이요 빈 그물만 거두게 되었을 때,예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다시 찾아 갔으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다가 예수신 줄 알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분부대로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떠나가면 빈 그물 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갈때에 우리의 그물에 고기가 찢어지도록 잡힐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버림 받은 자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보혈의 은총을 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은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말씀의 성취입니다. 대속(Atonement) -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물이 되셨읍니다.
따라서 그는 누구든지 믿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시고 또 용서해주십니다.
화목(Reconciliation) -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으로 화목하게 되었으며(롬 3:25), 양자의 자격을 얻게 되었읍니다.(롬 8:15)
의인(Justification) - 인간은 죄의식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의롭게 인정되었읍니다.
부활의 의미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는 생명입니다. (요 11:25-26)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는 신약성경에서 104회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예수님만이 부활을 보증해 주시고 있며,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셨읍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아무도 없읍니다.
죽은자가 어찌 다시살까?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장 / 김해철목사)
○ 혈육의 몸과 부활의 몸은 단절속의 연속성/씨앗이 썩은뒤 새싹이 돋아남과 같은 이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내세와 부활신앙을 믿었으나 사두개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부활신앙 위에 기초한 고린도교회 교인들간에도 「 죽은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올 것이냐」(고전15:35)가 주요 관심사였다.
가령 시체를 화장해 버린 사람은 부활의 날에 어떻게 될 것이며, 선교여행을 하다가 파선을 당해 익사한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이며,굶주린 이리들의 밥이 되어 순교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는 난해하고 궁금한 문제 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와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혹평을 한다(고전 15:36).왜냐하면 밭에 뿌린 씨앗이 새싹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다소라도 관찰한 사람이라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부활하게 될 것인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15:36-37).
씨앗을 뿌리면 씨앗은 썩고 그 대신에 새싹이 난다. 그러나 이 씨앗과 새싹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새싹이 나기 위해서는 먼저 씨앗이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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