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自由/세계 관광명소

아이슬란드[Iceland]

好學 2012. 10. 2. 21:05

아이슬란드[Iceland]

대서양 북부의 북극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섬나라로서 8세기경 아일랜드의 신부()가 처음으로 발견하였다고 전한다. 1262년 이후 노르웨이, 1380년 부터 덴마크의 지배를 받다가 1874년 제한적인 자치권을 얻은 후 1944년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였다.

 

위치 대서양 북부
경위도 서경 18° 00", 북위 65° 00"
면적(㎢) 103000
해안선(km) 4970
시간대 GMT(UTC 0)
수도 레이캬비크
종족구성 아이슬란드인
공용어 아이슬란드어
종교 복음루터교 (85.5%), 레이캬비크 자유교회파 (2.1%), 가톨릭 (2%)
건국일 1918-12-01(덴마크로부터)
국가원수/국무총리 그림손(Olafur Grimsson) 대통령(2008.5 4기 취임, 임기4년)
국제전화 +354
정체 공화제
통화 크로나(Kr)
인터넷도메인 .is
홈페이지 http://government.is
인구(명) 304,367 (2008년 )
평균수명(세) 80.55 (2008년 )
1인당 GDP($) 37,976 (2009년 )
수출규모(억$) 47.93 (2007년 )
수입규모(억$) 61.81 (2007년 )
인구밀도(명/㎢) 3 (2008년 )
아이슬란드 국기
  • 아이슬란드 국장
  • 아이슬란드 화폐
  • 알데이야르포스폭포
  • 데티포스폭포
정식명칭은 아이슬란드공화국(Republic of Iceland)이다. 계란형의 화산섬으로, 그린란드·노르웨이·스코틀랜드·아일랜드와 덴마크령인 페로이(Faroe) 군도 사이에 있다. 가장 가까운 서쪽의 그린란드까지는 278km, 남동쪽의 스코틀랜드까지는 708km, 동쪽의 노르웨이까지는 970km 떨어져 있다. 세계 최초의 의회제도, 1인당 세계 최고의 출판 활동 등 높은 문화 수준을 자랑한다. 국가명은 865년 경 바이킹이었던 프로키가 얼음 밖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명명하였다고 한다. 행정구역은 8개주(region)로 되어 있다. 
   
자연
알데이야르포스폭포
아이슬란드 섬은 북위 63°20"부터 66°33"까지, 서경 13°30"부터 24°32"까지 걸쳐져 있어 남북 길이 340km, 동서길이 530km이며 화산분출에 따라 계란형이다. 가장 가까운 서쪽의 그린란드까지는 거리가 278km, 남동쪽의 스코틀랜드까지는 708km, 동쪽의 노르웨이까지는 970km 떨어져 있다. 동해안과 북해안에는 지질시대의 홍적세() 때 섬 전체를 뒤덮었던 빙하가 만든 피오르드가 많다.

서쪽 지방과 남쪽 지방, 피오르드 안쪽은 해발고도 200m의  평지가 대부분이며 경작한계()이다. 국토의 70%는 400m 이상의 불모지이고, 게다가 12%는 빙하이다. 이들 빙하는 6개 그룹으로 나뉘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바트나이외쿠틀(바트나 빙하)이며 그 넓이가 8,400㎢나 되어 세계적 규모이다.

섬의 북부 중앙에서 남서부 일대에 걸쳐 제4기 현무암, 이른바 파라고나이트 지대가 펼쳐지며 나머지 반에 해당되는 동부와 북서부는 제3기 현무암 지대이다. 동부에는 헤클라·카틀라·아스캬·쉬르트세이·베스트만 등 30여 개의 활화산이 있으며 1,100년 동안 관측되어 왔다. 온천과 간헐천()도 260개 지역에 달하여 온천수와 증기()를 합한 총열량이 매초 11억 kcal나 되어 발전에 도움이 된다.

화산활동과 빙하작용 때문에 호수와 폭포가 매우 많으며 폭포 이름을 따 아이슬란드 국적()의 선박 이름으로 붙였다. 지진은 자주 일어나는데, 1896년의 남부 대지진이 특히 유명하다. 북위 63°15" 부근 남쪽 앞바다에는 1963년 11월 14일부터 분출하기 시작한 쉬르트세이 화산이 있다. 섬의 남쪽과 서쪽에는 멕시코 만류의 분류()가 흐르고, 북쪽과 동쪽 앞바다에는 한류()와 유빙()이 흐르기 때문에 해양성기후를 나타낸다.

레이캬비크의 1월 평균기온은 -0.4℃, 7월 평균기온은 11.2℃로서 연교차()는 적다. 레이캬비크의 연간 강수량은 805mm이며 겨울 반년 동안의 강수량은 여름 반년의 약 2배나 된다. 아이슬란드 부근에서는 1년 내내 저기압이 형성되기 때문에 날씨의 변화가 심하며, 안개가 끼거나 흐린 날이 많고 쾌청한 날씨는 매우 적다. 자작나무숲이 장관인데 사람의 이주가 시작되기 전에는 매우 많았으나 벌채로 크게 줄어들었다. 숲을 복원하기 위하여 20세기부터 식림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식민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자작나무, 버드나무, 가문비나무를 비롯하여 불과 400종의 꽃이 있을 뿐이며, 원산() 포유류는 북극여우뿐이다. 자주 나타나는 순록과 밍크는 다른 곳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조류()는 20종이나 되어 감상과 연구의 대상이 되지만 뱀과 개구리는 없다.

 

역사

8세기 경 아일랜드의 신부()가 최초로 발견할 당시 아이슬란드에는 원주민이나 에스키모의 이주가 없었다고 한다. 865년경 바이킹의 프로키가 북서해안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아이슬란드라고 명명하였다. 870년경에 최초의 이주자인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 상륙하였으며, 930년까지 노르웨이·아일랜드·스코틀랜드에서 이주자들이 들어와 1100년에는 인구가 8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들은 어업·새사냥·가축사육·농경 등에 종사하면서 가부장() 중심의 대가족제도를 이루었다. 또 촌락은 형성되지 않았으나, 100인 회의가 조직되어 있었다. 930년에는 팅그벨리르의 평야에서 세계 최초의 국회인 알팅그를 소집하여 민주정치의 선구가 되었으며, 1000년에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후 1262년의 노르웨이왕()의 치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300년 간 이른바 아이슬란드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사가 문학이 꽃피고 국민들은 신천지의 발전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1380년 덴마크왕의 전제정치가 가혹하고 1402년에 페스트가 유행, 1700∼1900년에는 소빙하기()가 엄습하여 곡물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으며, 유빙이 섬을 가두었다. 또한 1783∼90년에는 라키화산 등의 활동으로 목초와 가축이 큰 타격을 입고 인구가 34,000명으로 격감하였다. 1800년에는 국회가 폐지되고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1843년에 국회가 부활하고, 이어 외국무역의 자유화와 자치(1904년)가 허락되었으며, 1911년의 대학 설립과 1915년의 여성 참정권 획득에 이어 1944년 덴마크로부터 독립을 획득하였다. 1901년 78,470명(수도 레이캬비크는 7,173명)인 인구가 1980년에는 전국에서 약 3배, 수도에서는 12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캐나다와 미국에 이주하였다. 오늘날 인구의 86.5%는 인구 200명 이상의 취락이나 도시에 모여 살고, 13.5%는 농어촌에 살며, 외국인은 1% 이하이다.

 

문화

교육은 모두 무료이며, 7∼15세 사이에는 의무교육을 받는다. 중등교육으로 영어와 덴마크어에 중점을 두는 문과학교와 기술에 중점을 두는 기술학교가 있다. 그 상급학년으로 고등학교·사범학교·농업고교·상업고교·항해학교·무선학교·기계학교 및 기타 특수학교가 있고, 대학이 교육의 정점()이다. 국립·대학·시립·지방 도시설립 도서관이 많고 사설도서관도 있다.

신문은 일간지가 5종이며, 그 밖에 3개의 주간지와 약간의 지방지가 있다. 라디오 방송은 1930년부터 시작되었고, TV 방송은 1966년에 시작되었으며, 출판활동도 매우 활발하다.

국민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문학·회화·조각·건축·음악·연극 등에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문학에는 많은 전승문학이 있으며, 중세의 시인 스노리 스툴루손은 북유럽 신화와 영웅담 등을 모아 《에다》(1,200년경)를 편집하였다. 또 현대의 작가 H.K.락스네스는 1955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AD 1180년부터 1300년까지 쓰여진 대부분의 대하소설 사가(Saga)는 아이슬란드의 가장 잘 알려진 문학 장르이다. 사가는 노르웨이계통의 세계에서 현존하는 작품들 중에서 비교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사가는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의 역사와 혈통을 바탕으로 A.D. 1100년까지의 노르웨이계 생활 모습을 보여준다. 사가 작가들은 영웅들의 성공, 영광, 용기의 미덕, 자부심, 명예 등을 기록하기 위해 전국을 찾아다녔으며 후기 사가 작품들은 초기 아이슬란드 정착민의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미술은 음악과 달리 19세기 이전에는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민의 수가 적었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의 가장 유명한 화가는 아그리머 존슨(Agrimur Jonsson), 존 스테판슨(Jon Stefansson), 요하네스 칼발(Johaness Kjarval)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화가들이다. 가장 잘 알려진 현대 조각가는 아스문더 스베인슨(Asmundur Sveinsson)으로 그의 작품 대부분이 아이슬란드의 전래 민요나 사가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과학기술

아이슬란드는 1905년 통신법을 제정하였고, 1906년 아이슬란드와 스코틀랜드간 해저 전신 케이블을 가설하여 국제 전산 업무가 시작되었다. 1935년 아이슬란드 통신청(P & T)이 설립되었고, 1963년 아이슬란드와 캐나다간 해저 케이블이 개통되어 북대서양 지역의 주요 케이블 중계점이 되었다. 1998년 1월에는 다른 유럽연합 국가와 함께 통신산업을 완전히 개방하였다. 통신부는 통신산업관련 정책을 결정하고, 1997년 4월 설립된 국가규제국(NRA)은 형식승인, 주파수 관리, 면허발급 등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통신 사업자로는 유일하게 포스트 앤 텔레콤 아이슬란드(PTT)가 있으며, 통신 서비스는 국영회사인 아이슬란드 텔레콤사가 제공하고 있다. 1995년 아이슬란드의 기간망은 100% 디지털화되었고, 1996년 15만 5,400회선을 확보하였으며, 회선 보급률은 약 60%이다. 셀룰러 전화 서비스 가입자 수는 2005년  15만명이다. 아이슬란드 텔레콤의 서비스는 1994년 8월부터이고, IMPC의 서비스는 1998년 5월부터 시작되었다. 인터넷 사용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2005년 20개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가 있으며, 가입자수는 69만 명이다. 방송관련 업무는 문화 교육부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1997년 현재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국영방송사인 RUV와 유료 텔레비전방송사인 아이스 TV외 1개사의 민영방송사가 있다.

 

대한관계

한국과 아이슬란드는 1962년 10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주()노르웨이 대사가 아이슬란드 대사직을 겸임하고 있다. 아이슬란드도 중국에 상주하는 대사가  한국대사를 겸임하며, 양국간에 체결된 협정으로는 1970년 4월의 사증면제협정이 있다. 북한은 스웨덴대사가 아이슬란드대사를 겸임하고 있으나 서로 교류가 없는 실정이다. 1996년 Halldor Asgrimsson 외무대외통상장관이 방한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허경만 전남지사가 방문하였다. 2005년 현재 대()대한수입은 7,300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은 2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모피,어류 등이고, 수입품은 철도차량, 차량, 고무 등이다. 교민수는 교민 9명(2007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