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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셸[Seychelles]

好學 2012. 9. 30. 21:27

세이셸[Seychelles]

 

아프리카 인도양 서부 마다가스카르 북동쪽에 있는 섬나라이다. 18세기 중엽 프랑스령이 되었고 1814년 파리회의를 거쳐 영국령이 된 뒤 1903년 모리셔스와 분리하여 영국 직할식민지로 지내다 1976년 6월 독립하였다.

 

 

위치 인도양 서부
경위도 동경 55° 40", 남위 4° 35"
면적(㎢) 455
해안선(km) 491
수도 빅토리아
종족구성 크레올인, 아프리카인, 인도인, 중국인, 아랍인
공용어 크레올어
종교 로마가톨릭 (82.3%), 성공회 (6.4%)
건국일 1976년 06월 29일
국가원수/국무총리 미첼(James Michel)대통령 (2006.8 재선, 임기 5년)
정체 공화제
통화 세이셸 루피(Seychelles Rupee, SR)
인구(명) 81,541 (2006년 )
평균수명(세) 72.08 (2006년 )
1인당 GDP($) 8,973 (2009년 )
수출규모(억$) 3.1 (2005년 )
수입규모(억$) 4.5 (2005년 )
세이셸 국기
  • Port Launay Marine Park
  • 마에섬의 해변
  • 마에섬의 해변
  • 라디게섬
정식명칭은 세이셸공화국(Republic of Seychelles)이다.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동쪽으로 1,700km, 마다가스카르섬으로부터 북동쪽에 멀리 떨어져 있다. 인도양 상에 41개 화강암질의 섬과 약 75개의 산호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섬은 마에섬(Mahe Island)이다. 진기한 동물과 식물이 풍부하여 "인도양 최후의 낙원"이라고도 부른다. 행정구역은 23개 행정구(administrative districts)로 이루어져 있다. 
 

 

1. 자연

세이셸 해안 풍경
세이셸 제도는 마스카렌 해령()의 북단에 위치하는 고기() 화강암질의 군도이다. 섬은 곤드와나 대륙이 분리했을 때 아프리카 대륙과 남부아시아 대륙 사이에 고립되어 남은 부분으로 추정된다. 지질적으로는 거의가 화산섬으로 구성된 마다가스카르 부근의 섬들과는 다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최대의 섬인 마에섬은 산이 많으며 최고점은 928m에 달하여 전 제도 중에서 가장 높다.

 

 

2. 주민

인구성장률은 0.428% (2008년 추산)이며,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은 15.6명, 사망률은 6.21명, 유아사망률은 14.36명이다. 기대수명은 72.6세(2008년 추산)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프랑스계()의 크레올(백인과 흑인의 혼혈)이며 그밖에 유럽인·흑인·인도인·아랍인·마다가스카르인·중국인 등이 살고 있다. 백인으로는 약간의 프랑스인과 영국인이 있다. 또 주민의 90%가 마에섬에 모여 살며, 그밖에는 프레슬린섬을 비롯한 작은 섬에 조금씩 살고 있다.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프랑스어()와 크레올어도 사용한다. 종교는 가톨릭 82.3%, 영국성공회 6.4%, 안식교 1.1%, 기타 크리스트교 3.4%, 힌두교 2.1%, 이슬람교1.1%, 비크리스트교 1.5%, 기타 무종교 2.1% 등이다. 

 

 

3. 역사

세이셸의 섬은 12세기경부터 아라비아인·페르시아인, 16세기 초에는 포르투갈인의 왕래가 있었으나 그 후 18세기경까지는 무인도였다. 1741년과 1744년에 프랑스인이 탐험하여 마에섬을 프랑스령()으로 하였다. 프랑스인이 정주하게 된 것은 1770년대로 그들은 노예를 이끌고 특산물인 바다거북을 남획하고 목재를 벌채하여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 프랑스 당국은 천연자원이 고갈된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하여 이후 이주자들은 쌀·목화·옥수수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19세기 초의 나폴레옹전쟁 때 인도양의 세이셸 제도 부근도 영불해전()의 무대가 되어 세이셸은 모리셔스 제도와 함께 영국에 점령된 결과 1814년의 파리회의를 거쳐 정식으로 영국령이 되었다. 이후 1세기 동안 영국은 이들 제도를 통치하였다. 1903년 세이셸은 모리셔스와 분리하여 영국 직할식민지가 되고, 1970년에는 대폭적인 자치권을 획득하여 1976년 6월 세이셸공화국으로서 독립하였다.

세이셸의 초대 대통령 만캄은 구()종주국 영국과의 우호친선관계 유지를 바탕으로 온건한 중립정책을 취하고 내정면에서도 산업의 개발, 특히 관광사업의 촉진이라는 시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정()은 불과 1년으로 그쳤다. 1977년 6월 대통령 만캄이 영국연방 회의에 출석하기 위해서 런던 체재 중 수도 빅토리아에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총리인 프랑스 알베르 르네(France Albert Rene)가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 르네는 1979년에도 재선되었으며, 공산정권을 내세워 1977년에는 소련과 국교를 수립하고 이듬해에는 중국·북한을 방문하는 등 좌경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르네 공산정권에 대한 반발로 1978~1979년에는 반정부 쿠데타 계획이 있었고, 1981년 11월에는 외국인 무장그룹이라고 부르는 일단의 세력이 세이셸 공항()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1982년 1월 UN의 조사단이 세이셸에 도착하여 진상규명에 나서기도 하였다.

 

5. 경제

세이셸의 1인당 GDP는 16,600달러, 경제성장율은 5.3%(2007)이다. 산업별 GDP 구성은 농업 2.1%, 공업 28.3%, 서비스업 69.9%(2007)이다. 관광업을 중심으로 서비스업이 발달하였으며 농업은 코코야자, 시너먼, 바닐라의 재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섬의 경제진흥에 필요한 영국의 재정적·기술적 원조는 독립 후에도 계속되었다. 마에섬에 국제공항이 건설되어 관광이 편리해졌고, 특히 조직적인 선전의 효과로 관광객이 증가하여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산부문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어 거의 모든 식료품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실정이다. 주요 수출품은 참치통조림, 생선, 시나몬, 코프라, 석유재생품 등, 수입품은 일용잡화, 기계, 자동차, 식료품, 석유제품 등이다. 빅토리아항을 중심으로 해상 운수업이 발달하였다.

 

6. 문화

세이셸은 작은 나라지만 유명한 화가가 몇 명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화가는 마이클 애덤스로서 《데일리텔레그래프》에 의하면 섬 정신을 잘 나타내며 다양한 색채의 실크스크린은 삶, 활력, 흥미로 가득하다고 한다. 그외에 유명한 예술가들은 레옹 레데곤데, 게나르드 데보우드, 막 덕이 있다. 토착문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빅토리아의 인디펜던스 애비뉴에는 국립 박물관이 있고 스테이트 하우스 애비뉴에는 역사 박물관이 있다. 국립 박물관은 난파선, 산호초, 박제된 거북이, 고대 음악악기, 가재도구, 해적들의 다양한 소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7. 대한관계

한국과는 1976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80년 5월에 10·26사건 및 광주민주화운동을 이유로 단교하였다가 1995년 다시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케냐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2005년 대한() 수입은 532만 달러, 수출은 11만 8000달러이고, 주요 수입품은 생활용품, 수출품은 플라스틱, 수산물 등이다. 1976년 이후 한국이 10만달러 상당의 무상원조를 하였으며 연수생 초청 등 기술, 어업 협력이 부분적으로 이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