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 훈련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 하는 법
(1) 예수님과 기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초연한 통치자로 간주하였다.
지성소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면서도 여전히 높고 멀리 떨어져 계신 그런 존재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공로를 얻기 위한 순종의 행위로 기도를 행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외식으로 기도를 수행하였다(마6:5-8;23:5).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도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들보다 더 길게 기도하셨다. (막 6:46; 눅11:1; 18:1-14).
예수님은 여러 시간 동안 홀로 온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셨다
(막 1:35; 6:46; 눅 6:12).
누가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3:21; 5:16); 6:12); 9:18).
둘째로 예수님의 기도 모범은 새로운 인격적 차원을 지니고 있었다.
"아바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직접적인 호칭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친밀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예레미아스의 말은 적합하다: "새로운 기도 방식이 탕생하였다.
예수님은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하듯 자연스럽게, 친밀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야기하셨다.
감사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이것이 새로운 기도 방식의 특징이었다."
(2) 기도에 관한 교훈들
마7: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것이요")과 눅11장의 불의한 재판관 비유 등에서 그렇다. 예레미아스는 이를 "거지의 지혜"라 부른다.
즉 상대가 자신을 가르침을 들어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에 있어서 끈기의 개념은 거지의 지혜를 능가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으며 또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고 친히 약속하셨다.
시간을 정해 놓고 주님과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기도할 시간을 떼어놓았느냐는 것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
이 개념은 주기도문에서도 나타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전개된다.
기도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맞기 위한 주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도 같은 이유로 기도를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신약시대 그리스도의 체험 속에서 공동 합심 기도에 대한 강조점을 엿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로부터 고립된 상태로 주 안에서 성장한다는 개념이 없다.
기도에서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도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실천하셨는데 초대 교회도 아마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이어 받았을 것이다.
눅 24:53, 행 1:14에 의하면 제자들을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이에 매일 모여 합심 기도를 드렸다.
행 2:42에서 "기도"는 확실히 교회의 일정한 합심 기도를 가리킨다.
이는 교회 내 교제의 큰 기둥들 가운데 하나였다(행 4:24; 5:12도 참조)
초대 교회는 공적 기도를 선택 사항이 아닌 대단히 중요한 필수 요소로 생각하였다.
손을 들어 기도하지 않고는 교회가 단일성이나 영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딤전 2:8: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3) 기도의 권능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일치시키기 위해, 하나님과 친교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의 듯은 물론 하나님께 있어 우선적인 일, 즉 하나님의 시각을 찾는 것이다.
기도는 친교이며 대화이다.
하나님으 위대한 사람들, 기도의 용사들은 자기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전,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였다.
이것이 기도의 최우선적 측면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가 흘러 들어오는 통로이다.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성도의 주위로부터 대부분 떠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증가시킨다.
그리하여 기도하는 사람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요7:38).
요한복음에서 "생수"는 성령을 의미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성령의 임재이다.
(4) 기도의 방법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내 앞에 있는 길을 나는 보지 못합니다.
그길이 어디에서 끝날 것인지도 확실히 모릅니다.
사실 나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욕구는 실제로 주님을 기쁘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그러한 욕구가 있기를 원하나이다.
그 욕구를 떠나서는 결코 어떤 일도 하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내가 이와 같이 행한다면 주께서 나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비록 내가 그 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므로 내가 상실해
사망의 그늘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제나 주님만을 신뢰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고,
홀로 위험에 직면하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머튼의 유명한 기도문)
리처드 포스터 기도 방법
첫째로 깊은 기도는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습득되어야 한다.
기도 대가들에 대해 비결을 배워야 한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하며 기도 생활에 유의함으로써 무엇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법을 배워야 하며 기도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할 때 하나님에 대해 묵상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도 노트를 만든다. 성경의 기도를 배우라.
이때는 묵상과 기도를 혼합시키는 것이 좋다.
시편이 맨 먼저 마음에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중보기도와 구약시대 성도들의 위대한 기도들도(단 9:3-19)
생명력 있는 기도에 큰 도움이 된다. 귀납적으로 연구하여 기도 내용들을 자기 말로 적어 자신의 기도 제목으로 삼아도 좋다.
결론
바울은 잘 인식하고 있다. 에베소서3:17-19의 놀라운 기도가 그렇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주의하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둘다 마음의 작용임).
경건 생활은 하나의 신비한 체험일 뿐만 아니라 그 안의 깊은 내면에는 이성적 사고가 내포되어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주어지는 이러한 마음가짐, 오직 이것만이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속적 공격들을 상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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