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한국文化)

화백[ 和白 ]

好學 2012. 9. 7. 18:17

화백[ 和白 ]

 

 

신라시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귀족들의 회의. 우리 나라의 역사책에는 보이지 않으나,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당서 新唐書≫ 신라전에는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여러 사람과 의논해 결정한다. 이를 화백이라 했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이의(異議)가 있으면 그만 두었다.”고 하였다.

또 ≪수서 隋書≫ 신라전에는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여러 관리를 모아 상세히 의논한 다음에 결정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화백회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기록을 볼 때 화백회의는 나라의 큰 일을 의논하는 중신회의로, 만장일치로 의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화백’이란 말의 본래의 뜻은 확실하지 않다.

≪만주원류고 滿州源流考≫ 권18에는 이를 해석해 만주어 ‘혁백(赫伯, hebe)’이 상의한다는 뜻이므로, 화백과는 음과 뜻이 모두 들어맞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화백·혁백의 음과 비슷한 말을 후세에 전혀 찾을 수 없어 이는 따르기 어려운 실정이다. 역시 이를 신라고유의 이두(吏讀)식 표기로 생각해, “여러 사람이 화합(和合)해 왕에게 아뢴다(建白)”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화백회의의 기원은 멀리 선사시대 촌락을 단위로 하던 공동체생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씨족원들은 마을의 중요한 일을 공동으로 처리하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19세기 말까지 남아있던 도청(都廳)·공청(公廳)·모정(茅亭) 등 각 지역의 촌락민 공동집회소는 바로 그 전통을 이어 내려온 유제(遺制)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경주의 여섯 마을이 결합해 사로국(斯盧國)을 형성하고, 주변의 진한(辰韓) 소국들을 병합해 갔다. 이 소국들의 지배층은 경주로 옮겨져서 부(部)를 구성, 조정에 참여하였다. 이에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귀족들이 정치를 의논하는 회의체가 발생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건국 직후 수도에 성(城)을 쌓고 궁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이곳에서 국사를 의논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138년(일성이사금 5)에는 정사당(政事堂)을, 249년(점해이사금 3)에는 궁궐 남쪽에 남당(南堂)을 만들어 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의논하였다.

당시 신라는 주위의 성읍국가들을 병합해 가던 때였으므로, 정치·군사·재정에 관한 업무가 복잡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다만 정사당 혹은 남당이 제도적 완성을 본 것은 신라가 진한 지역의 10여 개 소국들을 완전히 정복한 내물마립간(356∼402) 때쯤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신라는 6세기에 들어와 종전의 연맹왕국체제를 청산하고 왕족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다. 516년(법흥왕 3)에 군사문제를 전담하는 병부(兵部)의 설치라든지, 520년(법흥왕 7)에 중국의 법전체계인 율령(律令)을 반포한 것은 이 시기의 집권화·법제화 경향을 나타내 주는 유력한 지표로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여러 중앙 관청이 설치되어 업무별로 전문화되는 한편 관료들도 서열에 따라 조직화되어 갔다. 다만 신라에서 율령을 수용할 당시의 군주권은 아직 미약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은 왕경 6부를 구성하는 족장세력과의 협의를 거쳐 주요 정무를 수행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형식은 비록 군주제였으나, 실제 귀족제적 구성을 면할 수 없었다. 법흥왕 때 불교 공인문제를 둘러싸고 이를 공인하려는 왕과 반대하는 신하들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을 때, 왕의 측근인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왕과 신하들 사이에 타협이 성립되어 불교를 공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정치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 시기 화백회의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가 최근에 경상북도지방에서 발견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1988년 울진군 죽변면에서 발견된 〈봉평비 鳳坪碑〉와 1989년에 영일군 신광면에서 발견된 〈냉수리비 冷水里碑〉가 바로 그것이다.

503년에 건립된 〈냉수리비〉에는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 ≪삼국사기≫에 500∼514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 지증왕과 같은 사람임)이 수도인 경주 6부의 대표자들과 함께 분쟁 중인 어떤 사람의 재산 소유에 대한 사항을 함께 의논, 확인해준 사실이 보인다.

한편 율령을 수용한 뒤인 524년(법흥왕 11)에 건립된 〈봉평비〉에는 국왕이 사부지(徙夫智) 갈문왕 등 13명의 신하들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조정에 항거한 거벌모라(居伐牟羅)지역 주민에 대한 처벌조치를 의논, 결정하게 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 두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역사학계에서는 조금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어쨌든 비문들에 등장하는 의결기관이 화백회의였음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뒤 531년(법흥왕 18)에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을 설치하였다. 상대등은 관청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귀족회의의 의장이었으며, 이 회의가 다름아닌 화백회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대등이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화백회의의 의장이 국왕 또는 갈문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던 것이 6세기 초에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가 형성되자, 여러 귀족들을 통솔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대등이 설치된 것으로 짐작된다.

상대등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6세기 경 화백회의는 대등으로써 구성되었다. 1978년 충청북도 단양지방에서 발견된 이른바 〈적성비 赤城碑〉(540년대 말에 세워짐)에는 ○대중등(大衆等)○이란 이름이 보이며, 560년대에 건립된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에는 ○대등○이란 용어가 보인다.

골품에 따르는 복식에 대한 규정을 기록한 ≪삼국사기≫ 권33 색복지(色服志)에도 ‘진골대등’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는 ‘진골과 그리고 대등의 관직을 가진 사람’이라기 보다는 ‘진골로서 대등의 관직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대등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진골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자기들의 대표로 상대등을 뽑았다. 상대등은 왕위의 교체와 때를 같이함으로써 국왕과의 관계에 있어서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실제로 상대등은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첫번째가는 후보자로 여겨졌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당시 상대등 직에 있던 알천(閼川)이 귀족들로부터 섭정의 지위에 추대를 받은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처럼 대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문제를 비롯해 외국과의 전쟁, 법률제정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사항을 심의 결정하였다. 요컨대 화백회의는 대체로 삼국통일 무렵까지 행해진 진골귀족들에 의한 연합정치를 잘 상징하고 있다. 실제로 이 회의에서 귀족들은 579년 진지왕이 품행이 나쁘다는 구실로 왕위에서 몰아냈으며, 647년에는 선덕여왕이 국가 비상시에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폐위를 결정하는 등 크게 왕권을 견제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진덕여왕(647∼654) 때 상대등 알천을 비롯해 임종(林宗)·술종(述宗)·호림(虎林)·염장(廉長)·김유신(金庾信) 등 6명의 대신(大臣)이 경주 남쪽의 오지산 바위에서 국가의 중대한 사항을 의논한 사실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대신들은 오지산 이외에도 경주 동쪽의 청송산(靑松山), 서쪽의 피전(皮田),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에 있는 신령한 곳을 택해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647년 선덕여왕을 몰아내려고 한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부터 화백회의는 종전의 권위를 상실하였다.

이에 뒤이어 681년(신문왕 1)에 바로 며칠전까지도 상대등이었던 김군관(金軍官)이 김흠돌 일파의 모반사건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처형된 것은 새로운 시대의 귀족세력 및 그 대표자인 상대등의 운명을 결정지어준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삼국을 통일한 뒤 왕권이 전제화되고, 관료제도가 발전되면서 화백회의는 그 정치적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화백회의는 국왕 직속의 최고 행정기관인 집사부에 정치적 실권을 넘겨주고, 다만 행정의 잘못을 지적하는 비판자의 역할에 그치고 말았다.

756년(경덕왕 15) 2월에 상대등 김사인(金思仁)이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나 것을 계기로 시정의 득실(得失)을 강경한 어조로 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정월에 병을 이유로 상대등 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왕권이 몰락한 780년 이후 화백회의, 특히 그 의장인 상대등의 정치적 지위가 강화되어 정치의 일선에 다시금 등장하였다.

실제 9세기경의 상대등은 왕의 가까운 친척들이 되는 예가 많았고, 이런 경우에 대개는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지만, 귀족회의의 주재자라는 그 고유의 임무만은 변하지 않았다.

이처럼 화백회의는 신라의 연맹왕국 형성과정에서 발생해, 특히 진골귀족 연합시대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삼국통일 후 전제왕권시대에 크게 위축되었다가 왕권이 약화된 780년을 계기로 다시금 그 중요성이 커지는 등 왕권을 중핵으로 한 정치적 세력의 변동에 따라 그 위상이 자주 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