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自由/[사진 여행]

陶山書院

好學 2012. 7. 6. 23:52

도산서원 陶山書院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빡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계절이 무르익어 갑니다 붉은 薔微(장미)의 추억을 가슴에 담고 이 여름도 계절의 深淵(심연)을 건너 점점 깊어가고 있습니다. "내 고장 7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李陸史의 시가 생각나는 7月의 문을 열었군요 가만히 있어도 세월은 그렇게 말없이 또 훌쩍 흘러가고 청포도 무르익는 한여름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는 희망의 7月을 맞이하여 幸運이, 幸福이, 健康이, 사랑이 많이 많이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직 절반이라는 세월이 남아있기에 오늘이라는 과거는 벌써 흐르고 미래는 알수 없지만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6월에 못다이룬 꿈을 7月엔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7월의 첫날에,..
陶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陶山書院
지금으로 치면 명문 사립학교. 유성룡도 김성일도 이곳에서 퇴계 이황의 가르침을 받았다. 초창기의 陶山書院 옆의 마루는 안동 부사가 아이들 공부하는 마루가 너무 좁아 보여 마루를 넓혀 주었다 한다. 그래서인지 덧댄 기와의 형태가 어색하지만 재미있다. 퇴계선생은 매화만 사랑한게 아니라 연꽃도 좋아했다 함. 그래서 서원앞에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잔뜩 심었다고.. 그 안에 개구리도 엄청 많던데 그 당시에도 개구리가 많았다면 선생께서는 밤에 잠을 잘 이루셨을래나?
陶山書院은 이후 규모가 커져 저곳에서도 강학. 지금도 선비 복장을 입고 일반인들이 공부및 강학을 한다 함. 현판은 한석봉 선생 글씨 책 보관 하던 곳 굴뚝의 특이한 형태, 담벼락에 굴뚝을 만들어 놓았다. 陶山書院 시사단(試士壇) 도산별과(과거시험) 실시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단(壇) 그냥 도산서원에서 강 건너편에 있는 시사단을 힐긋 보고는 지나치기 쉽다. 짐작컨대, 그 이유는 이러할 것이다. 도산서원 쪽에서 그 전경을 바라볼 수가 있고, 시사단에 대한 설명문까지 도산서원쪽에 있으니 굳이 건너가볼 필요가 없다. 또한 시사단에 가보려면 매표소 있는 곳까지 걸어 나가서, 승용차를 가지고 시사단까지 접근해야 한다. 강을 건너는 시멘트다리는 그 자체로도 운치가 충분히 있지만,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다리의 폭이 좁은 탓에 관광버스로는 접근이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시사단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사단에 올라서서 보면, 사방이 내 발 아래 있고, 도산서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위에 서 있으면 시(詩)가 절로 나올 것 같다. 시사단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서,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에 소재해 있다. 조선 정조(正祖) 16년(1792) 3월에 왕이 관원(官員)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덕과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과거(도산별과)를 실시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만들고 비를 세운 것이 시사단이다. 원래의 석비는 1795년에 세워졌으며, 현재의 비는 순조(純祖) 24년(1824)에 비각의 개축과 아울러 고쳐 세운 것으로, 비문의 찬자는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다. 비각은 사면 1칸의 팔작집이며, 중방 아래는 모두 판벽으로 돌려 막아 비바람의 침해를 예방하였으며, 겹처마의 사면 추녀 아래에는 각기 팔각 활주를 세워 견실한 구성을 보인다. 안동댐 건설로 당초의 위치에서 거북이 형태로 높게 단을 쌓아 물에 잠기지 않게 하였다. 도산 서원 앞에 흐르는 강엔 고고한 곳답게 학도 날더라. =퇴계 이황 님의 생애(년보)= 1501 (연산군 7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1502 (연산군 8년) 생후 일곱 달 만에 부친(贊成公)상을 당하다. 1506 (중종 원년-6세) 글 읽기 시작하다. 1512 (중종 7년) 숙부 송재공(松齋公)으로부터 <論語>를 배우다. 1515 (중종 10년) 숙부를 모시고 청량산에 가서 독서. 1516 (중종 11년) 봉정사에서 독서. 1517 (중종 12년) 8월 경상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안동부를 순찰할 때 형과 함께 찾아가 강의를 듣다.정신적 지주였던 숙부 별세. 1520 (중종 15년-20세) 침식을 잊고 열심히 주역을 탐독. 이 때 병을 얻어 평생 동안 고생함. 1521 (중종 16년) 부인 許氏(김해)를 맞아들이다. 1523 (중종 18년) 6월 장자 준(寯)이 출생. 상경하여 태학(성균관)에서 수학. 1527 (중종 22년) 경상도 향시 진사시(進士初試)장원,생원시(生員初試)2등합격 10월 차남 채(寀) 출생. 11월 부인 허씨 별세. 1528 (중종 23년) 진사시(進士會試-사마시) 2등으로 급제. 1530 (중종 25년) 부인 權氏(안동)를 맞아들이다. 1532 (중종 27년) 문과 초시 2등 합격. 1534 (중종 29년-34세) 3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다.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子)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 경연시독관 등의 요직을 겸임. 1535 (중종 30년) 호송관이 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호송. 1536 (중종 31년) 선무랑(宣務郞)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9월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 1537 (중종 32년) 모친(朴氏)상을 당하고 향리에서 3년간 복상. 1542 (중종 37년-42세)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으로 어사가 되어 충청도 감찰 재상어사(災傷御史)로 강원도 감찰. 1543 (중종 38년)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 여러 관직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1544 (중종 39년) 10월 상경 후 중종(中宗) 승하 후 고명을 지음. 1546 (명종 원년-46세) 7월 부인 권씨 별세. 1547 (명종 2년) 7월 안동부사로 제수(除授)되었으나 사임. 다시 홍문관 응교로 제수(除授)되어 마지못해 상경하여 사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548 (명종 3년-48세)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취임(9개월). 10월 풍기군수로 전임(1년 2개월). 단양팔경은 퇴계 선생이 이때 선정한 것이다. 1549 (명종 4년)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었음. 1549 (명종 4년) 9월 9월, 신병으로 사퇴하고 귀향. 1550 (명종 5년) 2월 계상에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 1550 (명종 5년) 4월 광영당(光影塘-현재의 종택 자리) 조성. 1553 (명종 8년-53세) 4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사퇴. 1553 (명종 8년-53세) 10월 추만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개정. 1554 (명종 9년)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씀. 중수경복궁기(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림. 1555 (명종 10년-55세) 수많은 관직을 제수(除授) 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하였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하고 향리로 내려옴. 1556 (명종 11년)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가려 뽑아 <朱子書節要>를 편차. 1556 (명종 11년) 12월 ‘향약(鄕約)’을 초. <주자서절요>의 서문을 짓다. 1557 (명종 12년-57세) 도산서당 터를 마련. 1557 (명종 12년-57세) 7월 <계몽전의(啓蒙傳疑)> 저술. 1558 (명종 13년-58세) 23세의 율곡 이이(李珥)가 계상서당을 찾아와 도학을 논함. 1559 (명종 14년) <송계원명리학통록(理學通錄)>을 편찬함. 1560 (명종 15년-60세)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에게 답하는 편지 형식으로 철학적 대명제인 4단7정론(四端七情論)을 논변함. 1561 (명종 16년) 3월 절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경치를 돌아보고 도산기(陶山記) 등 명문을 남김. 도산서당, 농운정사 완공. 1564 (명종 19년) 4월 제자들과 청량산을 돌아봄.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음. 1566 (명종 21년)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음. 1566 (명종 21년) 10월 이언적(李彦迪) 선생 행장(行狀)을 지음. 1567 (명종 22년) 임금의 교지를 받고 상경 명종이 승하하자 대행왕(大行王)의 행장(行狀)을 지음. 1568 (선조 원년) 의정부 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除授)되자 6월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하여 양관 대제학을 겸임함.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지어 왕에게 올림. 12월 제왕학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리자 왕은 정원(政院)에 병풍과 장첩을 만들 것을 명함. 1570 (선조 3년-70세) 제자들에게 심경과 <역하계몽>을 강의. 고봉 기대승과 심경정도(心經情圖)를 의논하고, 11월 그의 격물치지설(致知格物說)을 개정함. 12월 장사준비를 갖추게 하여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과 자명까지 몸소 써놓고, 8일 한서암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책. 영의정으로 추증(追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領經筵弘文館藝文 館春秋館觀象監事 追贈. 1572 (선조 5년)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위패 봉안 결정 1573 (선조 6년) 11월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 1574 (선조 7년)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짓고 서원 설립 1575 (선조 8년) 서원 낙성,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사액됨 1576 (선조 9년) 도산서원 완공, 위패 봉안. 여강서원(廬江書院) 위패 봉안. 1576 (선조 9년) 12월 시호 문순공(文純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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