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사람)인생 이야기

上濁下不淨 上淸下不濁

好學 2012. 6. 15. 23:02

上濁下不淨 上淸下不濁

 

朴 鎭 東

前 光州日報 常任顧問 / 本聯合會 指導委員


세상이 混濁하고 不正非理가 蔓延할수록 맑고 깨끗한 선비와 淸白吏가 그리워진다.
自由黨 末期인 1956년 9월부터 59년 5월까지 2년 8개월간 全南道伯을 歷任한 又窩 李琦世(이기세) 知事는 참으로 淸廉潔白한 原理原則 主義者이며 先覺者요, 愛國愛族者였다. 忠南 名門家 出身으로 京畿第一高普(京畿高)를 졸업한 후 官界에 발을 딛은 李 知事는 全南道伯 當時 많은 逸話를 남긴 분이다.
하루는 官內의 어떤 郡守가 道廳에 올라오면서 知事室을 禮訪하여 두툼한 봉투를 知事에게 바쳤다. 李 知事가 열어보니 요즘 時勢로 100만원이 들어 있었다. 李 知事는 깜짝 놀라면서 “이게 무슨 돈이예유?”하고 물었다. “知事님 용돈에 쓰시라고 올립니다” “용돈은 저도 있어유. 그러나 인사로 가져오신 거라면 이 중에서 2만원쯤 받아도 失禮가 안 될 거예유”하고 2만원을 뺀 다음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또한 李 知事는 초겨울 햇김(海苔)이 나올 무렵이 되어도 김의 名産地인 莞島(완도)郡守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莞島郡守는 인사를 모르는 사람이예유, 햇김이 나왔으면 知事에게 한두 톳 보내는 것이 禮儀가 아니예유.”하고 측근들에게 弄談 半 眞談 半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뇌물과 선물의 限界를 分明히 하는 분이었다. 人情이 넘치는 선물이 오가는 세상이 따뜻한 社會요, 禮儀를 아는 社會가 아닐까.
그는 어느 해 正初에 傘下 公務員들에게 新年 人事狀과 함께 「豈得每人悅之 但求無愧我心」이란 메시지를 보냈다. 道廳을 비롯하여 各 市郡과 邑面에서는 이를 標語처럼 印刷하여 복도 등에 붙여 놓고 암송하는 것이었다. 「어찌 萬人의 비위에 맞추어 모두 기쁘게 할 수 있으리요. 다만 自己 良心에 부끄러움만 없음을 求할 뿐이로다」라는 뜻이다. 요즘같이 포퓰리즘이 蔓延하는 세태에 꼭 맞는 말이다.
60년 3․15 正副統領 선거를 앞둔 59년 5월 어느 날 自由黨 全南道黨 委員長 李甲植 議員(國會 商工委員長)과 國會 自由黨 院內總務 趙淳(조순) 議員이 찾아와 寶城郡守에 鄭 某 氏를 發令하도록 請託을 했다. 李 知事는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더니 “그 사람은 序列이 아직 멀었네유”하고 완곡히 拒絶했다. 그러자 두 議員은 “李 知事는 政治를 모르네요”라고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李 知事는 약간 화가 난 듯 “무슨 政治學 책에 그런 대목이 있어유? 제가 읽어 본 政治學 책에는 그런 말이 없던대유. 그런 政治學 책 있으면 가르쳐 주세유”하고 反擊(?)했다. 그러자 두 與黨巨物들은 흥분하여 “어디 두고 봅시다”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2, 3일 후 崔仁圭 內務長官으로부터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아! 그 문제로구나’ 생각한 李 知事는 郡守 候補 序列一覽表를 가지고 상경했다. 아니나 다를까 崔 長官은 “空席 중인 寶城郡守에 鄭 某를 內申해 달라.”고 指示(?)하는 것이었다. 李 知事는 例의 郡守 候補一覽表를 내놓고 “그 사람은 아직 멀었어유… 저는 못하겠으니 長官님이 하세유”라고 强硬하게 말하고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 庶務課長을 불러 “崔仁圭가 나라 망칠 사람이예유. 나는 數日 內로 解任發令될테니 官舍에 가서 移徙짐을 쌓도록 하세유”라고 일렀다. 오후에 退廳한 李 知事는 官舍에 돌아와 깜짝 놀랐다. 이삿짐 속에 官舍備品인 응접세트와 그림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은 公과 私를 구별할 줄 모르세유? 이건 官舍備品아니가배.” 호통을 치면서 일일이 골라냈다. 李 知事는 과연 수일 후에 해임발령이 되어 道廳幹部들과 市場 郡守 그리고 많은 道단위 機關長들의 惜別 속에 故鄕인 大田으로 떠났다. 그리고 곧바로 후임에는 國會副議長을 歷任한 黃聖秀 씨가 발령되었으며 그 후 바로 寶城郡守에 鄭 某 氏도 발령되어 3․15 不正선거를 치르게 됐던 것이다.
李 知事의 逸話는 계속된다.
하루는 道廳出入記者들과 懇談會 끝에 記者들이 “요즘 용돈이 말라서 죽겠습니다”라고 하소연(?)하자 李 知事는 “記者들은 가난해야 해유….”라고 말하였다. 記者들이 “왜유?”라고 되묻자 “가난해야 正義로운 사나운 글이 나오지 않겠시유?”라고 微笑를 지으면서 용돈을 준 분이었다. 李 知事는 出場 갔다 돌아오면 반드시 復命書를 쓰고 出張費 남은 돈은 꼭 返還한 것이었다. 이렇게 分明한 분도 없을 것이다.
上淸下不濁. 윗물이 맑으면 따라서 아랫물도 맑은 법. 傘下 모든 公務員들이 李 知事를 본받아 出場復命書와 함께 남은 돈은 반드시 반환하였으며 公金을 한 푼이라도 아껴 쓰려고 노력들을 하였다.
李 知事는 高普在學 中에 美國 링컨 大統領이 奴隸를 解放시킨 歷史的인 史實에 큰 感銘을 받아 자기 집에서 부리고 있던 奴婢들을 모아 놓고 奴婢文書를 燒却한 다음 “당신들은 오늘부터 自由의 몸이니 各自 돌아가세유”라고 하면서 곡식과 용돈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數名은 돌아갔으나 한 名은 “저는 갈 데도 없고 또 여기에 情이 들어서 떠나지 않고 살겠어유”하고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는 것이다. 李 知事의 父親이 외출에서 돌아와 깜짝 놀라면서 “왜 그런 큰일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李 知事는 美國 링컨 大統領 얘기를 하면서 “아버님께서 저를 高普에 보낸 것은 新學問을 배워서 실천하라는 것 아니예유”라고 대답하자 그 이상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李 知事는 奴婢나 手下者들에게도 꼭 尊待말을 썼다. 하루는 一家 분들이 知事室에 찾아와 인사를 하면서 “저희들은 行列(항렬)로 조카뻘되고 또 孫子뻘 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낮추십시오”라고 말하자 “지금은 民主主義 社會가 아니예유. 民主社會에서는 모두가 人權이 同等한 것이예유”라고 하면서 말을 내리지 않았다. 이렇게 일찍이 開化한 분도 없을 것이다. 그 時節에 自己 집에서 부리던 奴婢들을 과감히 解放시키고 人權문제까지 考慮하면서 行政을 편 분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나는 일생 동안 세 분을 尊敬하였거니와 그중의 한 분이 李 知事이다. 그래서 每年 新正이 되면 大田으로 가서 賀禮를 드렸으며 他界했을 때는 弔問 가서 極樂往生하시도록 冥福을 빌었다. 나뿐 아니라 李 知事를 존경하던 道幹部와 市長 郡守 들도 매년 新年賀禮次 大田私宅을 찾았으며 別世했을 때도 많은 분들이 問喪을 하였다. 이는 歷代 道伯 때 없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