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시사 칼럼]

3·1절(三一節) [2012년 제93주년]

好學 2012. 3. 1. 21:37

 

3·1절(三一節) [2012년 제93주년]

 

 

3·1절(三一節)은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자 공휴일이다.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2005년 12월 29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날에는 정부가 기념행사를 주최하여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묵념을 올리며, 민족정신을 되새긴다. 3부 요인은 물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며,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따로 파고다 공원에 모여 그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 날에는 전국 관광서 및 각 가정에서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2009년에 90주기를 맞았다.

현대의 3·1절 심야에는 종종 폭주족이 과속 운행을 할 때가 많은데, 이 때는 특히 경찰의 단속이 심해진다. 한편, 전국 초중고생 3천919명을 상대로 `3·1절 관련 학생인식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 40%가 3·1절의 의미를 모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3.1절

 

태극기 변천과정

  1. 가장 오래된 태극기
    연도
    연도 미상
    적용시점
    고종이 하사
    설명
    가장 오래된 태극기

 

  1. 3.1운동 당시 태극기
    연도
    1919년
    적용시점
    숭실학교 게양
    설명
    3.1운동 당시 태극기

 

  1. 임시의정원 태극기
    연도
    1923년
    적용시점
    대한민국
    설명
    임시의정원 태극기

 

  1. 오늘날 태극기
    연도
    1948년
    적용시점
    법으로 제정
    설명
    오늘날 태극기

 

'삼일절 노래'는 1946년에 문교부 장관 안호상의 의뢰로, 위당 정인보 선생의 3·1절 노래에 당시 숙명여대 음악과 강사였던 작곡가 박태현이 곡을 붙인 것이다.

삼일절 노래

정인보 작사 / 박태현 작곡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삼일절의 의미]  3·1절은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정하고,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은 공휴일로 정하였습니다. 이날에는 정부에서 기념식을 베풀어 순국선열들을 추모·애도하는 묵념을 올리며, 민족정신을 앙양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베풀고 있습니다.

 

3·1운동 당시 비밀리에 발행·배포된 〈격고문〉 신문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8월 22일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지의 최고통치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으며, 한국사회를 식민지 지배구조로 재편하기 위하여 1910년대에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했다. 학교에서는 민족교육이 억압받고, 종교계에서는 민족적 신앙이 탄압당했다. 정치·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수탈당했다. 1910년에 '회사령'(會社令)이 실시되어 민족자본가의 성장이 가로막혔다. 1910~18년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의 결과 한말 이래 불법적으로 토지를 침탈해온 일본인의 토지소유가 법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이때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하에 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만 인정했으며 경작권 등 농민의 여러 권리는 완전히 부정했다. 이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몰락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빈민·노동자가 되었다. 당시 노동자가 된 조선인들은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 등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했다. 이처럼 한일합병 후 극소수의 친일파·친일지주·예속자본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계급·계층이 정치·경제·사회 면에서 일제로부터 피해를 당했다. 그결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민족적으로 고조되었다. 이러한 전민족적인 민족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의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국내에서의 비밀결사운동, 교육문화운동 및 생존권수호투쟁 등을 통해 운동역량이 강화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0년대말에 국제정세가 크게 변하게 되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가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다.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해방운동을 고양시켰다.
 
[3.1운동 전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33명 중 4명 ...
 
광화문 기념비각 앞에서의 만세시위에 호응하는 군중들
 
만세시위운동 주동자들을 학살하는 일본군
민족자결주의가 대두하자 이를 민족해방의 기회로 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국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1918년 11월 여운형·김규식·장덕수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중국에 온 미국 특사에게 전하는 한편,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국내외 민족운동가들과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했다. 1918년 12월 미국지역의 대한인국민회 총회는 이승만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했으나, 미국 당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미국 대통령에게 3개항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도쿄[東京]에서는 1919년 2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청원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소집 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8독립선언).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을 알게 된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이승훈 등 평안도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계획했다. 여기에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참여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 3개 교단이 국내 독립선언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이 준비한 운동계획은 독립선언과 일본에 대한 독립청원을 병행하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언서, 파리 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일본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이 작성되었고,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그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운동을 계획·준비한 종교계의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의 취지를 밝힌 다음 바로 일제 경찰에 자수했다. 원래 33인은 독립선언식을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학생들과 합의했었다. 그러나 33인은 공원에 모인 학생·시민 들이 전면적인 시위에 들어가 그들이 세운 비폭력 원칙을 깨뜨릴 경우, 일본·미국 등 열강의 호의를 얻어내지 못할까 우려하여 장소를 바꾸었던 것이다. 결국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시위대열을 이루었다. 독립선언식은 대중의 반일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는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3월 1일 시위운동의 후속조치로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했다. 3월 상순 이후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만세시위는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는 데는 지식인·청년·학생층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서울 등 도시지역에서 유포된 선언서,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하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었다. 경기도 부천의 혈성단, 대구의 혜성단, 조치원청년단 등이 그 예이다. 이들과 함께 광범한 민중이 비타협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서울에서는 3월 22일 노동자대회가 열렸으며 전차종업원, 경성 철도노동자 등은 파업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했다. 서울·평양·선천 등지에서는 상인들이 철시(撤市) 투쟁을 벌였다. 농촌에서는 횃불시위와 산 위에서의 봉화시위가 벌어졌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시위를 확산하는 만세꾼이 등장했다. 3월 1일 이후 전국을 휩 쓸었던 시위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5만 2,770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일본측 발표).
 
국내에서의 시위운동에 호응하여 간도·연해주·미국 등지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의 독립선언식이 최초였으며, 서간도에서는 3월 12일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에서의 독립선언 경축대회로부터 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연해주에서는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독립선언과 시위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지에서 주로 모금활동을 통해 임시정부의 재정이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선전활동을 지원했다.
 
[3.1운동의 의의] 이 운동은 극소수 친일파·친일지주·예속자본가를 제외한 전민족적 항일독립운동이자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운동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결과 일제의 무단통치가 끝나게 되어 민족해방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으며, 운동이념상에서 복벽주의가 청산되었고 민주공화제 이념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다. 그결과 공화제 형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될 수 있었다. 또한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는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의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하여 독립쟁취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 운동을 처음 준비했던 33인이 일본·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가 독립을 선사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타협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이끌어가지 못했던 점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 내적 원인이었다. 운동과정에서 드러난 이러한 한계는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3·1운동의 과정에서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민족이 해방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도 촉진되었다. 나아가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그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점차 공감을 얻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