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무정-이광수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無情)’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이 소설은 식민지시대에 신소설이 빠져들었던 통속화 경향을 극복하고 근대소설의 서사적 속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 무정의 시대는 무엇보다도 개인에 대한 발견과 자아에 대한 각성이 요청된 시기이다. 민족적 자기인식과 그 주체적 확립이 가능하지 않은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문학이 자아에 대한 각성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자각과 각성에서 출발할 때에 민족 전체의 주체적인 자기 확립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소설 무정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개인적 운명의 양상이다. 이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이형식과 박영채라는 두 인물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형식은 경성학교 영어 교사로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해 나아가는 선각자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고아의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처지에 굴하지 않고 신교육을 통해 문명개화의 길을 열어간다. 박영채는 가계의 몰락과 함께 기생 신분으로 전락하지만, 이형식을 다시 만나기를 오랫동안 기다린다. 그러나 이형식이 이미 다른 여성과 혼약의 단계에 이른 데다 자신의 순결마저 잃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자 한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박영채가 자살을 포기하게 된 것은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동경 유학생 김병욱 때문이다. 박영채는 김병욱의 충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알아차린 후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 소설에서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박영채의 변모과정은 가족의 붕괴와 신분적 몰락이라는 개화 공간의 사회적 격변과 맞물려 있다. 그녀는 사회적 변화와 가치의 혼란 속에서 빚어지는 개인의 운명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구시대의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 속에서 운명적으로 강요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게 된다. 그러나 문명개화의 이상을 따라 새로운 교육의 길을 택함으로써 재생의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소설 무정에서 볼 수 있는 자아의 각성과 개인의 발견은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개인의 존재와 그 인식을 중시하는 근대소설의 요건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근대소설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관계를 개인의 운명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보여준다. 근대소설은 경험적인 세계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포착해 내는 것이므로, 자아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통해 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서 성립된다. 개인의 행동과 그 행동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조건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근대소설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소설 무정에서 그려내고 있는 개인의 자기 발견 과정이 반성적인 자기 각성의 단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정이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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