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주일예배]

헌신(Devotion)

好學 2011. 7. 29. 20:56

헌신(Devotion)

 

 

 

1. 다같이 서로 인사를 나눕시다.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매슬로우 란 심리학자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계층적으로 배열하였습니다.
1) 가장 기초적인 욕구는 생리적 욕구입니다.-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을 말합니다.
2) 두 번째 단계는 안전에 대한 욕구입니다.-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나, 경제적 여유와 같이, 정신적`육체적으로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욕구입니다.
3) 세 번째 단계는 소속과 사랑의 욕구입니다.
-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나 타인과의 친밀에 대한 욕구 즉, 우정과 사랑의 갈망입니다.
4) 네 번째 단계는 존경의 욕구입니다.
- 자존심, 명예, 지위, 위신,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 할 수 있습니다.
5) 이 네 가지 욕구들이 모두 충족되면 최상위층에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목표성취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려는 욕구입니다.

매슬로우는 사람들은 이 다섯가지 욕구를 단계적으로 이뤄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면, 안전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경제적 육체적으로 안전이 보장되면, 어딘가 소속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소속과 사랑의 욕구가 충족되면 명예, 지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이 모든 것이 충족되면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매슬로우가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부분입니다. 결코 단계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다섯가지 욕구가 한꺼번에 생길 수도 있고, 두 세 가지 욕구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기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도, 최상위의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아파트나 한 채 사놓고, 자식 대학교 입학시켜놓고, 회사에서 어느 정도 승진하고 나서, 주님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하는 단계적인 사고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성경의 전도서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집에 가셔서 구약성경 전도서를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12장 밖에 안되니 30분만 하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구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전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아무리 채워도 안전의 욕구조차 온전히 채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일평생 이것 고민하다 주님을 위해 제대로 헌신해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치는 성도가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인생의 모든 일이 왜 헛되다고 했겠습니까?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일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 내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항상 최선을 다하며, 최상의 것, 최고의 삶, 가장 아름다운 삶,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삶을 추구하며 살게 됩니다.

2.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인류 역사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4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 구절의 주동사는 “전혀 힘쓰니라” 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헌신하다” 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네 가지에 헌신하였습니다.
첫째,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데 헌신했습니다.
둘째, 서로 교제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어느 정도 교제했느냐 하면, 44-45절을 보세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유재산을 서로 나눠줄 정도로 교제하였습니다. 진정한 교제는 이렇게 자신의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아낌없이 공동체 식구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을 위한 헌신입니다.
셋째, 떡을 떼는 일 즉 예배에 헌신하였습니다.
예배에 어느 정도 열심이었느냐 하면,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매일 성전에 모일 정도로 예배에 열심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집에서도 함께 모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구역모임 혹은 소그룹 모임에 열심히 모였습니다. 성전에서도 모이고, 가정에서도 구역모임으로 모일 정도로 예배에 헌신하였습니다.
넷째, 기도에 헌신하였습니다.

말씀과 교제와 예배와 기도에 헌신한 초대교회, 세상 모든 교회의 영원한 모델인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본을 따라 우리교회도 말씀과 교제와 예배와 기도에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말씀과 교제와 예배와 기도에 우선적으로 가장 귀한 것을 투자할 수 있는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미국의 빌 헐 목사님이 쓰신 책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헌신>이란 책을 보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헌신하지 못하도록 막는 가장 큰 적 삼총사가 있다고 합니다. 세상, 육신, 마귀입니다.
세상의 물질지상주의 가치관이 말씀을 배우고, 성도끼리 삶을 나누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데 헌신하지 못하게 합니다. 청년들이 ‘알바’(아르바이트) 한다고 주일예배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의 패스트 푸드문화, 속도의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힘들고 고된 일을 회피하게 만듭니다. 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진득하게 봉사하고 섬기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이런 세상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마귀를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문화를 다스리는 자란 뜻입니다.
여러분, 물질중심문화, 속도의 문화 속에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부흥가 디엘 무디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아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나 자신 때문에 더 힘들다.”
좀 더 편안하게 살고 싶고, 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은 육체의 욕구가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3. 이런 적대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말씀 배우는 일, 삶을 나누는 일, 예배와 기도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났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그들의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고 영혼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그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 그 결과 우리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과 더러움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영광스런 존재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질병과 가난, 고통과 외로움, 원망과 분노의 쓰레기를 다 받아주시고, 강건과 풍요, 평안과 행복을 안겨주셨습니다.

“너의 저주를 내가 다 받았다. 너는 나의 축복을 받으라.
너의 수치를 내가 대신 담당했다. 너는 이제 나의 영광을 받으라.
너의 가난을 내가 다 짊어졌으니, 너는 이제 내가 주는 풍요를 누려라.
너의 고민과 염려를 내가 다 맡았으니, 너는 이제 내가 주는 참 평안을 누려라.
너의 외로움과 한을 내 어깨에 다 짊어졌으니, 너는 이제부터 행복하여라.”

이것을 종교개혁가 루터의 말로 표현하면, 십자가를 통한 ‘즐거운 교환’ 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죄를 가지고 나아가 용서를 안고 돌아갑니다.
*상처를 가지고 나아가 치유받아 돌아갑니다.
*가난을 가지고 나아가 부요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죄책감을 가지고 나아가 자유함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염려를 가지고 나아가 평강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열등감을 갖고 나아가 자존감을 갖고 돌아갑니다.
*영원한 저주를 갖고 나아갔다가 영원한 축복을 받아 돌아갑니다.

이런 즐거운 교환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H.A.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한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을 하고 궁에 들어갔다가 실패하여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왕이 친히 재판을 합니다. 심문을 받는 그녀는 담담하게 말합니다. “제가 나쁜 사람에게 고용되어 이런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여왕님,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왕은 “그래, 내가 너를 살려준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하겠느냐?” 고 물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중요한 순간에 그 죄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조건이 있는 은총은 은총이 아닙니다.”
여왕은 그녀를 무조건 석방해주었습니다. 그 후, 역사는 이런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여왕에게 그녀만큼 신실하고 헌신적인 종은 없었다.”
평생 여왕의 명예를 높이는 일을 위해 생명을 바쳐 일했다고 합니다.
(류영모, 십자가를 통한 즐거운 교환, p.32)

4. 죽음에서 부활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위기에서 기회로, 약함에서 강함으로, 가난에서 풍요로움으로 우리 인생을 바꾸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이 무조건적 은총을 입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십자가 은총을 입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의 이름을 위해, 그분의 기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손발이 되어 봉사하고, 그분의 입이 되어 어린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성가대가 되어 찬양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