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조직신학組織神學]

유태인이나 유대인이나 같습니다. 1

好學 2011. 6. 26. 19:20

유태인이나 유대인이나 같습니다. 1

 

 

유태인이나 유대인이나 같습니다.

그들은 12 지파 중에 남 유대왕국에살던 유다파와 베냐민파들입니다. 통칭 히브리인입니다.

북 이스라엘왕국의 열개 지파는 흩어지고 잡동상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역사는 솔로문 왕국 이후 국가가 조각난 상황의 역사입니다.

솔로몬의 우상숭배와 그의 백성들의 세상적 삶이 이렇게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야곱이 아들을 열둘을 두어서 열두지파가 형성된것입니다. 베냐민은 둘째부인 라헬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다윗왕 이전의 왕인 사울왕,사도 바울<본명:사울>이 베냐민파입니다. 그 후손들입니다. 두 조각난 나라가 그나마 바벨로니아의 포로가 되어 서러운 삶을 살았습니다.그후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에 그들은 해방되어 다시 돌아와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생활을 하게 됩니다.이 종교가 바로 유대교입니다.모세 오경을 읽고 외우고 율법과 규례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야훼,즉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때부터 이삭 야곱으로 시작해서 모세,다윗,그뒤에 여러 선지자에게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만이 선민이고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알고 섬긴것입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성경이 72명에의해 그리스어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문화는 헬라문화로 이어져 갑니다. 이후 그리스를 로마가 정복합니다. 이때에 그들은 로마 식민지로 살아갑니다.그들은 다윗의 혈통에서 자기들을 통치할 막강한 왕이 나올것으로 기대하고 이를 메시아로 생각한것입니다. 철갑 로마를 무너트리고 막강한 왕,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왕을 기다렸습니다.

예수가 그들의 왕이 아니다, 메시아가 아니다,이들은 그렇게 단정합니다.

민족 배반자요,종교 배신자로 여기고 맙니다.십자가에 못박으라, 죽이라 외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 농장의 농장주인과 하인들, 아들까지 죽이는 그들은 바로 유대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 죽이고 진멸하고 다른 소작인에게 맡기시는그 말씀의 의미는 곧 예수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도록 인도하심,그대로 진행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유대교는 그 이후 신비주의로 메시아니즘으로 계속 별볼일 없이 이어져 갔습니다. 야훼하나님을 야훼라고 한번도 못하고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를 그렇게 심하게 비난하지 않고 그저 이슬람교도들처럼 하나의 예언자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니 유대교인들은 과거에 예수를 종교배신자니 민족 배반자니 하는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사마리아인을 칭찬하는 대목을 가지고 적대감정을 가진것입니다.예수님은 후대 많은 전인류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로마의 국교로 로마교회에 맡기셨던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경외하던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로 육신을 입고 올줄은 꿈에도 몰랐고 지금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약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새로운 이름이신 예수로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오신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부르지도 그의 말씀도 무시하고 찬송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오직 예수의 말씀을 상고하고 예수께 기도하며 예수께 찬송합니다. 오직 예수를 부르며 찾을뿐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유대인과 같은 믿음생활하는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신것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꽂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Holocaust revisionism의 선구자 뽈 라시니에; 그 자신이 전쟁 중 독일 강제수용소 수감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