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2
제2편 선교사 이전의 개신교와의 접촉
칼 귀츨라프의 선교여행:
한국에 첫발을 디딘 성직자(1832년)
성경,의약품,주기도문 번역
알렉산더 윌리엄슨:
중국에서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한국의 천주교 박해상황을
접한 그는 토마스 목사를 도와 1865년에 한문성경을 가지고
셔먼호를 타게 했으나 화재로 한국에서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성직자가 되었다.
만주에서 입교한 의주 청년들:
고려문에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와 교제하였고
3년후 매캔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스는 의주청년들과 성경변역을 시작하여 1882년 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시작으로
1887년 신약 전체 번역이 완료되었다.
권서, 매서인의 활동: 서상륜은 최초의 권서로 임명되어
전도함으로 최초의 예배를 드렸다.
1884년 로스는 6천권의 복음서를 무사히 반입하여 반포함으로서
많은 신자들이 생겨났다.
이 수정과 성경번역:
신사유람단 일행인 안종수의 친구인 이수정은
진전선박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박았다.
이수정은 전도하여 유학생들의 성경공부반을 형성하기도 했고
미국선교부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수정은 한문성경에 토를 달아 읽기와 이해를 쉽게 했고
1884년<신약성서 마가전>을 시작으로 한글성경을 번역하였다.
제3편 선교사들의 내한
가우처:미국의 사절단을 만난후 일본에 있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하여 한국을 조사한 후 선교할 것을 요청하였다.
매클레이의 방문후 스크랜톤, 메리 스크랜톤,
아펜젤러가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알 렌의 입국(1884년 9월):
이승훈 세례후 100년이 지나 중국선교사로 있던 알렌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공사관의사로 있다가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응급조치하여
살림으로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알리게 되었고
알렌은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이는 개신교 선교 사역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득'이 되었다.
1885년 알렌은 광혜원 개설(세브란스의 전신)
제4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의 료선교:
알렌에 의해 제중원이, 스크랜톤에 의해 시병원이,
여간호사 엘러즈는 신분의 차별없이 모든 부녀들을 맡아 보았으며
홀튼, 하워드에 의해 보구여관이 세워졌다.
성공회에 의해 낙동병원이 세워졌고
1908년에는 7명의 의사를 배출하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의료사역은 평양, 선천, 재령, 대구 등
각지로 확대되어 의료선교는 환자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위생교육과 예방접종에도 치중하여 사망률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교육사업:
의료사역보다 포괄적이고 직접 전도의 계기가 된 교육사업은
영어학교, 육영공원, 언더우드학당, 숭실대학등이 세워졌고
여성교육을 위해 메리스크랜톤이 이화학당을 세웠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1894년에 학생수가 104명에 이르렀다.
스크랜톤의 말대로"병원은 쟁기로 땅을 갈고,
교육은 씨를 뿌리기 위해 써레로 땅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고
할 정도로 한국 초기의 의료와 교육사업은 적절했다 할 수 있다.
최초의 수세자 노춘경 :
노춘경은 기독교를 배척하는 문서를 통해 지식을 얻은 후
알렌의 집에서 몰래 가져 온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읽는 중
기독교를 접하였으며 1886년 언더우드에게 생명을 걸고 세례를 받았다.
최초의 교회(새문안교회) :
언더우드는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서 1887년 9월 14명의 교인을 데리고
두 명의 장로를 세운 뒤 교회를 조직했다.
성 경번역사업 :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성경이 이미 번역되어 있었으나
오류와 문제점이 있으므로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1887년에
<성서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철저한 심의과정을 두어 선교사들이 조사와 번역을 하고
다른 번역자들이 수정하고 의견을 개진한 후, 위원회에서 토의를 하고,
의견이 이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표결을 하여 확정지었다.
1900년에 신약, 1910년에 구약이 완역되었고
1937년에 다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사경회 :
1890년 언더우드 집에서 성경공부반이 시작되었는데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이다.
지교회 지도자들을 일년에 두차례씩 모아
6주에서 한달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1893년부터는 모든 교회가 사경회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주일학교 :
1905년 복음주의선교협의회에서 공과책을 제작하였고
1907년 소아회를 조직하고 아이들만 따로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13년 4월에는 창경궁에서 모인 야외집회에 14,700명이 모였다.
1932년에는 주일학교가 1071개, 교사가 4천,
그리고 7만명의 학생들이 공부하였다.
선교부들의 내한 :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1889년에 데이비스와 메리를 파송했는데
데이비스는 한국에서 순교한 첫 희생자가 되었다.
성공회는 1889년 찰스 코르프를 첫 주교로 임명하였다.
미국남장로교회 선교는 언더우드의 절대적인 공헌에 기인했다.
미국 남감리교회는 윤치호의 요청이 커서 리이드박사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893년 솔내에서 한국인과 동거동락하며
살다 순교한 매캔지의 솔내교회의 요청으로 계속되었다.
일링 딩 선교단에 의해 침례교회가 시작되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1885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을 맺으므로
선교가 시작되었고 아관파천으로 1903년 축성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