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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정치철학의 시대적 배경 | 철학[philosophy]

好學 2010. 10. 25. 20:32

 

 

플라톤정치철학의 시대적 배경 | 철학[philosophy]

 

 

1. 

흔히들 그리스 시대는 자연철학, 인문주의, 민주주의가 꽃을 활짝 핀 인류문명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시대라고 말한다. 또한 당시의 철학등의 여러 가지 사상과 의식은 후대의 유럽정신 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근대 유럽의 시민의식 성장과 근대국가건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 라면 그것이 과연 현시대의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고대의 문명 이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당시 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민주정은 현대정치의 기본모델이었으며 현대정치를 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 속에서 근대의 일부 사상가들은 전체주의적 정치 요소를 찾아내고 이를 악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 죽음으로 몰아갔다. 우리가 현대 민주정의 밑거름이고 첫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그리스의 정치형태 속에서 우리는 민주정과 전체주의정, 파쇼적 정치형태,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두 가지의 정치형태의 모습을 찾아 낸 것이다.

그리스 지역의 폴리스들은 민주정을 실시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폴리스들과 전체주의적 귀족적 정치를 실시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폴리스들로 양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현대의 철학가들이나 역사가들은 플라톤이 전체주의 사상의 시초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칼포퍼는 ?플라톤과 헤겔이  전체주의 의 시조다.라고 말했다. 즉 근대의 전체주의는 플라톤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전체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당시의 정치제도상 플라톤은 스파르타의 영향을 받고 스파르타의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플라톤은 오히려 민주정이 가장 발달한 아테네에서 공부하고 활동한 철학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플라톤철학의 배경은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민주적 폴리스인 아테네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그가 민주정에 대한 부정에 가까운 정치철학을 제시 하였는지 우리는 알아야한다. 그것은 우리 민주정의 문제점을 반추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2.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세계는 각각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한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다. 바로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 이다. 이 두 전쟁은 그리스세계를 완전히 상반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두 전쟁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하나는 이민족과 싸운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 자신들끼리 싸운 내전이다. 그 결과 또한 전혀 달랐다. 하나는 그리스세계의 번영을 약속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세계를 종말로 이끌었다.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내고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민족발전을 약속하지만 민족이 분열하여 싸우는 내전은 반대로 민족을 멸망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그리스 역사도 벗어나지는 못했다.

페르시아전쟁은 페르시아제국의 3회에 걸친 침입에 그리스 세계가 저항한 전쟁이다. 이란고원을 중심으로 발흥한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경에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등을 정복하여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에게해, 동쪽으로는 인더스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페르시아의 소아시아, 특히 이오니아지방에로의 진출은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고, 그 충돌은 결국 동 지중해세계의 주도권을 다투는 대전으로 발전했다. 즉 소아시아 서부 이오니아지상의 그리스계 소도시들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자주 충돌하게 되고 결국은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최초의 동서 세계의 대결로 묘사되기도 하는 페르시아전쟁은 바로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말하자면 그리스의 지중해 제해권에 페르시아가 도전장을 냄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이다. 서양고대의 문화는 지중해에 의지한 해양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은 곧 지중해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번영과 발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지중해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492년의 제1회 침공은 태풍이 페르시아의 함대를 강타하여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기원전 490년에 있었던 2회전과 485년에 치러진 3회전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전 그리스세계를 정복하기로 작정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아테네의 북동쪽 약42km지점인 마라톤에 상륙했다.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반역자가 등장하듯이 이 때에도 히파아스라는 반역자가 나왔다. 그로인해 아테네는 절망적 위기에 처했다. 다른 폴리스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처절한 투쟁으로 마라톤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는 그리스세계의 독립을 지켜냈다.

아테네는 결국 천신만고 끝에 승리했다. 일부 사가들은 페르시아가 전제국가였던 데 반해 아테나이는 민주국가였음에 착안하여 역사는 이 때 이미 전제적 체제에 대한 민주적 체제의 영원한 승리를 예언해 주었다고 평가한다. 이 당시 흥미로운 점은 스파르타가 취한 태도 였다. 마라톤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의 목표는 물론 아테네 정복에 한정되지는 않았다, 페르시아는 전체 그리스세계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므로 아테네만이 아니라 스파르타도 포함되는 그리스세계 전체가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스파르타는 진퇴양난에 처했다, 아테나를 지원하지 않는 것은 스파르타 자신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고, 원군을 보내 아테네가 승리케 하는 것은 경쟁국 아테네의 강성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로서는 그 어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군의 파병문제로 국론이 분열된 스파르타가 격론을 벌이던중에 아테네가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여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3회전은 그리스인들로서는 보다 어려운 전쟁이었다. 페르시아의 새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여러 속주에서 징집한 대군을 동원하여 수륙양면으로 공격했다. 함선으로 다리를 만들어 다다넬즈해협을 건넜던 그들은 해협을 건너는데만 7일이 걸렸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병력이 5백여 만 이상이었고 사람과 말을 먹이느라 개천과 호수가 전부 다 말라버렸다고 한다. 물론 너무나 놀란 나머지 과상해서 평가한 것이겠지만 10분의 1로 줄여도 페르시아군의 군세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번에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결속했다. 물론 크세르스크가 아테네만을 노린 것은 아니었으므로 스파르타 등 다른 폴리스의 참전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스파르타는 기원전 480년 8월에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최후의 1인까지 싸워 불후의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결국 또 다른 그리스의 배신자를 통한 페르시아는 아테네 반도를 점령했다. 하지만 해전에서 테미토스클레스가 지휘한 해군에 페르시아는 패하고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그리스세계는 페르시아와의 3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은 폴리스들로 이루어진 그리스세계가 대제국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다. 그것은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세계의 발전을 약속한 전쟁이었다. 그리스세계는 페르시아의 도전을 좌절시킴으로써 지중해 제해권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고, 이것은 바로 그리스세계의 도약을 기약하는 것 이었다.

 

3. 펠로폰네소스전쟁과 그리스세계의 몰락

 

페르시아전쟁이 그리스의 발전을 약속한 영광스런 전쟁이라면 펠로폰네소스전쟁은 그리스의 몰락을 초래한 전쟁이었다. 기원전 431~404년까지 근 30년에 걸쳐 계속된 이 전쟁은 그리스인의 문화 창조력을 질식시킨 그리스세계의 내전이었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에게는 하나의 비극이었다.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에는 페르시아의 재침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항하게 위해 집단 안보동맹을 창설했다. 이 동맹의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었기 때문에 델로스동맹으로 불린 이 동맹은 그러나 아테네의 제국화를 촉진했고, 드디어 그리스가 스파르타주도의 펠로톤네소스동맹과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으로 나누어져 30여 년간의 내전을 벌이게 된다.

델로스동맹에 가입한 폴리스들은 함대와 수병을 제공하고 동맹회비를 내야 했다. 여기에서 폴리스들의 부담금을 공평히 해야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아리스테에데스가 잘 해결했다. 플루타코스에 의하면 살라미스의 영우이었으며 정치적 얌심을 위해 신탁마저 조작한 테미스토클레스와는 달리, 아리스테이데스는 아무리 자기를 위험에 빠뜨릴 일이이라도 그것이 정의면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선동으로 인해 자신의 추방을 결정하는 도편투표장에서 글을 모르는 한 시민이 그가 아리스테이데스인줄도 모르고 ?어디서나 의로운 사람, 의로운 사람 하니 듣기 싫다.?고 투덜대며서 아리스테이데스의 이름을 좀 써 달라고 하나 선뜻 자기의 이름을 써주었다고 한다. 플라톤도 ?아테나이의 수많은 정치인들 중에 경의를 표해야 할 사람은 아리스테이데스 한 사람뿐이다. 그는 정의라는 잣대로 공직 생활을 재면서 살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초기 델로스동맹은 공명정대한 아리스테이데스 등의 노력으로 여러 어려운 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맹은 변질되어 가고 그 맹주 아테나이 또한 제국으로 변해갔다. 아테네는 동맹금고의 돈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등 동맹금고를 아테나이의 금고화하였다. 아테네의 회계관 10염이 동맹회비를 거두고  관리했다. 페리클레스는 동맹금고의 돈으로 페르시아전쟁 때 파괴된 파르테논신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의 위협이 점차 감소하는 데도 부담금은 더욱 늘어나는 상황에서 동맹에 가입한 군소 폴리스들의 불만은 날로 더해져갔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대로 동맹을 탈퇴할 수도 없었다. 아테네는 이들이 탈퇴하려 할 경우, 회원국의 동의없이 폴리스를 무력으로 제압해 버렸다. 또한 동맹에 들기를 원치 않는 폴리스마저도 강제로 가입시켰는데, 에우보이아 지방의 폴리스 카리스토스가 그 예이다. 밀레투스, 에리트라이, 콜로폰 등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테나이는 간섭하는 단계를 넘어  동맹국들의 독립을 빼앗아버렸다. 델로스동맹이 아테네를 위한 군사동맹이 되고 아테네가 제국으로 바뀌어갔음을 입증해 주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

아테네가 델로스동맹을 결성하자 이를 우려하며 주시해 오던 스파르타는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결국 그것을 통해 제국주의적 세력확장을 기도하자 아연 긴장했다. 그리스세계의 패권을 놓고 아테네와 계속된 대립을 해왔으며, 이미 자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주변의 폴리스들을 모아 펠로포네소스동맹을 결성하여 그 맹주노릇을 하면서 페르시아전쟁 후의 아테네의 강성을 경계하던 스파르타로서는 아테네가 델로스동맹을 이용하여 그리스 세계를 장악하려는 기도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테베가 아테네의 동맹국인 플라타이아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약 28년간 지속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은 6년의 중간휴전기를 경계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어진다. 아테네의 적국들이 이 비극적 내전을 끝내고 상처뿐인 승리를 얻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해군국인 아테네와 육군국인 스파르타는 서로 공격하기도 어려웠지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10년 동안 지속된 전반기 전쟁에서 스파르타의 포위작전을 해군력으로 잘 응수하던 아테네는 개전 초인 기원전 430년 인구의 4분의 1정도를 앗아간 무서운 전염병에 시달려야 했다. 페르시아전쟁 후 아테네를 번영으로 이끈 페리클레스도 결국 이 병으로 죽었다. 페리클레스가 타계한 이후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양측은 아테네 니키아스의 노력으로 기원전 421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6년 동안 불안하게나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안한 평화는 기원전 415년에 아테네가 시칠리아를 공격함으로써 깨지고 말았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평화를 주장한 귀족파와 전쟁의 지속을 원한 민주파 사이의 당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결국 권력은 민주파의 알키비아데스에게 넘어가게 외었고, 그의 주도하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동맹할 가능성이 있는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 시라쿠사를 공격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원정군은 전멸했고, 아테인들은 그들이 그토록 신임했던 주전파 알키비아데스가 조국을 배신하는 것을 목격해야 앴다. 그는 신성모독혐의로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몰리자 스파르타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아테네는 시칠리아에서 연이어 패했고 이후 정치적 혼란에 빠진 아테네해군은 결국 기원전 405년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은 스파르타해군에게 참패하게 됨으로써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시칠리아에서 패한 뒤 식량의 해상수송로가 끊겨 굶주리던 아테네는 404년에 결국 항복하였던 것이다. 크세노폰이 전해 주는 패자 아테네의 모습은 실로 처절할 뿐이다.

?전령이 파멸의 소식을 가지고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페이라이에우스항에서 시내에 이르기까지 소식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슬픈 울음소리가 퍼졌다, 그날 밤은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도와줄 동맹국도 없었다. 일찍이 델로스섬이나 스키오네 같은 정복지에서 잔학한 학살행위를 자행했던 아테네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그런 참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몸을 떨었다.

 

4. 플라톤의 시대적 관점과 정치철학

 

우선 플라톤은 어떻게 국가 또는 조직화된 사회가 등장하게 되었는가, 라고 묻는다. 그리고 국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국가라는 것이 우리 가자가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겨난 듯이 보이네. 그 외의 다른 어떤 원리에 기초하여 국가가 생겨난다고 생각하는가?(국가, 369p). 각각의 개인은 자신만의 특징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동시에 각자의 개인적인 약점과 한계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것들을, 특히 음식과 옷, 집 그리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 등의 많은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방식으로 노동의 분화가 이루어져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 중 몇몇은 예를 들어 적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일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노동의 분화가 다양한 개인들 각자가 타고난 자연적 재능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면 모든 사람들은 훨씬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구성원 각자의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조직화된 국가는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개인의 집단보다 구성원 전체의 기본적인 요구들을 충족시키는데 더욱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욕망으로 인해 다툼과 전쟁들을 조정하고 결정하기위해 사회의 지도자를 선출하나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점차 시민들은 세 계층으로 나주어지게 되는데 플라톤은 이들 각각을 수호자, 보조자, 생산자계층으로 부른다. 수호자들은 장차 지도자 또는 통치자가 될 사람들인데 이들은 법률을 제정하고 전시에 국가를 지휘하게 된다. 보조자들은 국내에서 법률을 실행하는 역할과 더불어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투에 참가한다. 생산자 도는 경제 담당자계층의 구성원들은 대중들이 필요로 하는 음식물, 옷 주거 그리고 사치품들 제공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는 점차 발전된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최소한 이런 방식이 이성적인 국가가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며 이를 통하여 국가는 자신의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하고 시민 전체, 즉 시민들의 집합 전체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이 성적인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타고난 본성의 차이를 적적히 이용하여 그러한 차이에 알맞게 각자에게 서로 다른 책임과 사회적 역할을 배분하고 요구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계층간의 구별은 타고난 본성과 성향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사회조직 전체가 원활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각 계층의 구성원들에게 각각 어떤 특별한 정신적인 특성이 요구된다.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은 가능한 한 폭넓은 지성을 소유할 필요가 있다. 수호자 계층을 제외한 구성원들은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선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 전체의 선을 파악하는 것은 따라서 수호자 계층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의 타고난 지성은 보다 완전해져야 하며 이를 통하여 국가의 선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감정적인 부분들도 선을 바라고 추구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지혜라는 덕을 필요로 하며 이 억은 그들이 자신의 임무에 가장 적합한 바를 행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지혜는 그들이 국가의 차원에서 진정으로 선한 것, 즉 모든 시민들에게 진정으로 선하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따라 행위 하는 정치가, 입법자, 중재자가 될 수 있도록 해준다.  보조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도 어떤 타고난 재능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 또한 더욱 단련되고 성숙하여 덕이 있는 성향에 이르게 된다. 보조자들은 당연히 강건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시민적 긍지로 가득 찬 고도의 정신적 무장도 갖추어야 하며, 플라톤이 혼이라고 표현한 것을 소유하여만 한다. 혼은 교육이나 훈련을 통하여 통치자들의 명령에 따르고 통치자들의 보다 높은 지혜를 통해서 규정된 결속력과 충성심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며 유혹이나 갈등에 지견해서도 이러한 약속을 충실히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성향을 발전시키는 것은 곧 용기라는 덕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용기는 전사들의 특징적인 덕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이 자기 자신의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성향이기도 하다. 생산자 또는 경제 담당자 계층에 속하는 구성원들 또한 나름대로의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성향은 욕망에 의해 지배된다. 플라톤은 이러한 욕망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의 것들을 생산하게 만드는 자극제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욕망이 그들이 자신의 맡은 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방해물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따라서 생산자 계층의 구성원들에게 요구되는 덕은 인내 또는 절제하고 할 수 있다. 결국 노동자들은 그들이 항상 정신적으로 절제할 수 있도록 교육되어야 한다.

국가는 인간의 본성에 기초하여 구성된 국가이며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시실들을 인정하고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부터 생겨난 이성적 원리들을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구성한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는 정의의 덕을 구체화한 것이며 이러한 국가에서는 시민들 각각이 자신의 몫을 행함으로써 또한 자신의 몫을 얻게 될 것인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인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다소간 모호하기는 하지만, 정의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러한 정의의 개념을 보다 분명하고 상세하게 규정하려 하였다. 그에게 있어 정의는 여러 계층의 시민들과 이러한 시민들의 활동 사이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문제로 변화한다. 각자가 자신의 몫을 행하고 더욱이 이를 잘 행할 때 우리는 조화와 균형을 얻게 된다. 또한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몫을 받는, 즉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국가에 도달하게 되며 결국 정의로운 국가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정의란 국가 전체의 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가를 구성하는 각 부분이 자신들의 특별한 역할에 알맞은 덕을 드러낼 경우에 정의는 실현된다.

 

5. 플라톤의 정치철학등장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고찰

 

플라톤은(기원전 428-348) 중용한 도덕 철학자이며 형이상학, 인식론 등의 많은 분야에서 각 분야의 기초를 제공하는 커다란 기여를 하였는데 이들 분야는 그의 윤리학, 정치 철학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20세기의 영미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플라톤 이후의 나머지 서양 철학사는 단지 플라톤에 대한 계속되는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이 그 이후의 사상적 전개에 미친 거대한 영향력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있다. 플라톤의 견해는 서양 고대와 중세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간접적으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플라톤은 페르시아전쟁후의 영광스러운 번영을 누리고 있던 아테네에서 철학을 배우고 시작했으며 동시에 그런 아테네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그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이후 분노와 절망에 빠져 이성을 잃은 아테네인들에 의해 죽어가는 것을 또한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파의 배신을 지켜보았다. 이런 속에서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한 것 같다.  선한 민주주의 보다는 대중의 중의적인 민주주에 대한 불만 속 에서 그는 새로운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곧 왕이 되고 왕이 곧 철학자가 되는 국가를 이상국가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와 함께 선천적 신분에 따른 역할분담과 신분에 따른 이성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플라톤은 윤리학과 정치 철학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인간의 삶의 영역 중 사적인 부분과 공적이 부분 사이에는 어떤 의미 있는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일관된 주장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플라톤은 자신의 정치 철학적 분석을 개인의 덕을 결정하는 기초로서 사용하고 있다. 그의 기본적 주장은 개인의 영혼 또한 그 구성과 구조의 측면에 있어 국가의 복잡성에 상응하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그는 이상 국가에서 각 계층에 부여되는 덕들이 개인의 영혼의 서로 다른 측면들 또는 부분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영혼에 있어서의 정의도 국가에 있어서의 정의와 유사한 것으로 결론짓는다. 이상 국가에서 각 계층이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한 바를 잘 행하고 그 결과로서 사회 전체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사회적 정의에 도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영혼도 그것을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들이 자신의 역학을 탁월하게 잘 수행하고 그 결과로서 영혼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정의의 덕에 이르게 된다. 이제 플라톤의 궁극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면 개인의 영혼에 있어서의 정의는 가능한 최대한의 개인적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할말 수 있는데 이는 국가에 있어서의 정의가 국가 전체의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개인의 인격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일련의 물리적 욕망, 즉 육체적인 욕구와 갈망, 충동과 자극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을 만족시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들을 만족시키는데 어떤 제한도 가해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매우 쉽게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을 밖으로 몰아내고 말 것이다. 욕망은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안의 야수성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에 있어서 거의 동일한 정도로, 어쩌면 몇몇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강력하게 우리의 감정은 큰 힘을 발휘한다. 이런 감정들은 우리가 적절하게 기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잘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기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도록 추진하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신에 찬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개가 풍부한 삶은 대체로 우리에게 득이 되는 반면 기개가 없는, 감정적으로 거의 황폐한 삶은 커다란 불만과 공허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플라톤이 이성이라고 부른 것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사고하는 존재들이다. 때로 우리 대부분이 극히 일부의 경우에만 사고 행위를 하는 듯이 보이고 따라서 우리의 사고 행위가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우리는 분명히 사고하는 존재들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조차도 수많은 정신적인 기술과 행동을 필요로 한다. 이성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이며 이성 또한 자신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실패하는 것은 이성의 좌절로 이어질 것이며 따라서 삶의 질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 중 이러한 지성적인 측면이 조재한다는 점과 그것의 중요성을 인정하여야만 한다.그렇다면 우리들 모두는 우리의 내부에 욕망과 기개와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각각은 다소간 서로 다른 비율로 이 세 가지를 혼합하여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플라톤이 정치적으로 세 계층이 존재함을 확인하고 또 각 개인을 이 세 계층 중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근거가 된다. 플라톤은 사람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한 사회가 구성원들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각 개인이 어떤 본성을 타고나기 때문에 그가 사회 안에서 어떤 정해진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 그러한 역할을 바꾸는 것, 즉 사회 계층 간에 이동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플라톤이 이러한 생각 현대의 입장에서 다소 부정 적 일수 있으나 당시 아테네의 중우적 민주정의 대안으로서는 최대의 대안으로 가치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