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영 전도사 순국추모비, 순국기념비 (이천중앙교회, 창전동공원)
구연영 전도사 , 구정서 전도사 부자 순국 추모비
감리교회 순교자 구연영 전도사
1895년 10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무력 항쟁이 일어났다. 이 때 구연영은 이천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의병을 소집하여 이천 의병대의 중군장으로 활약 하였다. 그 후 1897년 2월 구연영은 서울 상동교회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 구국운동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상동교회에서 전덕기와 함께 엡? 청년회를 조직하고 교회 조직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다. 1899년 3월 덕들교회에서 세례받은 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매서인이 되어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1902년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지난 1년 동안 1천 5백 마일을 여행하며 성경만 6백 권 팔았고 이러한 그의 전도활동으로 이천, 광주 지역에 복음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곳곳에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1902년 권사 직분을 받고 매년 2회 개최되는 신학회에 참석하여 신학교육을 받았다. 신학회를 통해 목회자 자격을 갖춘 그는 1905년부터는 정식 전도사로 임명되어 이천읍교회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순회하며 돌보았다. 구연영은 복음 사역뿐 아니라 민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도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하고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을사조약 철폐를 주장하였다. 동시에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정체를 폭로하는 강연을 하였으며 일제의 경제 침략에 대항하는 국체보상운동도 추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집회가 이천 장터에서 2천여명이 모인 예수교인 대회였다. 예수교인 대회를 마치고 며칠 후 일본군은 구연영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그는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16일) 오후 1시경 이천 장터에서 미루나무에 묶인 채 눈을 감고 기도하던 중 총탄에 맞아 순교하였다. 이렇게 "천성이 관후인자하고 활발용감하며 정의감이 강하여 옳은 일이면 백절불굴하고 실행"한 구연영은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 1963년 3월1일 "건국골로훈장 단장" 을 추서하였으며 1978년 8월6일에는 이천중앙교회 뜰에 그의 순국 추모비를 세웠다.
(글 출처- 제1회 순교자기념주일 예배자료집, 기독교대한감리회, 2007년 6월)
구연영 전도사 , 구정서 전도사 부자 순국 추모비
구연영 전도사 , 구정서 전도사 부자 순국 추모비
추모비 뒷면
추모비와 현재의 이천중앙교회
2006년도에 새로 봉헌한 이천중앙감리교회 전경
봉헌기념비 문구
1902년 8월 13일에 창립된 이천중앙교회는 제3대 구연영, 구정서 전도사 부자가 1907년 일제에 의해 순교하여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교회이다.
민족 운동가 구연영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추모예배 및 기념비 제막식 행사 (2007.8.28)
(출처- http://www.2000news.co.kr)
구연영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 추진위원회(위원장-기독교 대한감리회 중앙연회 감독 박영준 목사)는 2007년 8월 28일(화) 오전 10시30분 창전동 어린이공원에서 기독교 대한감리회 중앙연회, 이천문화원, 이원회, 이천YMCA 공동주관과 이천시, 이천시의회의 후원으로 구연영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예배 및 순국 기념비 제막식 등 추모행사를 가졌다. 2007년은 이천의 의병장이며 기독교전도사이자 애국계몽운동가인 구연영 의사가 순국하신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의사께서 남기신 애국 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기독교 대한감리회중앙연회와 이천문화원, 이원회, 이천YMCA가 힘을 합쳐 기념비 건립을 비롯한 순국 100주년 추모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날이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 16일)로 그 때 구연영의 나이 44세였으며 아들 정서의 나이는 25세였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아들 정서에게는 1991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구연영은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감리교의 자랑스런 순교자이며 이천의 의기를 드높인 순국지사였다. 구연영, 그 이름은 순국의 높은 뜻과 함께 이 땅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 고귀한 순국의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피흘렸던 자리에 기념비를 세운다.
구연영 순국기념비, 이천세무소 인근 창전동 아파트 내 어린이공원 한편에 있다
순국 기념비는 이천시, 이천시의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연회, 이천문화원, 이원회, 이천YMCA, 이천중앙교회, 신갈교회, 도지교회, 현방교회, 노곡교회, 궁평교회, 이포교회가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 순국기념비 뒷면
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 순국기념비
민족운동가 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 의사 순교 장면 포퍼먼스, 출처- http://www.2000news.co.kr)
<민족 운동가 구연영 의사>
이천 의병전적비 (출처- http://cafe.daum.net/kchistory)
구연영은 1864년 8월 20일 구철조씨의 3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춘경, 본관은 능성이며 18세 때 변미례와 결혼하여 슬하에 정서, 성서, 완서, 종서 네 아들을 두었다. 구연영은 누구의 전도도 받지 않고 1897년 2월 자진하여 상동교회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3년 후 세례를 받았다. 구연영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이끄는 엡윗청년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민중계몽, 강연, 선교, 구국 활동과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구연영은 이천중앙감리교회 3대 담임전도사로 부임하여 경기도 광주 이천 지방을 돌며 전도하였고 궁평, 노곡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자, 구연영은 김하락, 김태원 조성학, 신용희와 함께 이천으로 내려와 1,000명의 의병으로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여 전국 최초로 의병항쟁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천수창의소의 중군장이 된 구연영은 1896년 1월 넓고개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첫 전투를 벌려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후 이현전투와 남한산성 전투를 비롯한 의병투쟁을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구연영은 1905년 정식 전도사 칭호를 받고 이천읍 교회를 비롯한 9교회 교인을 이끌게 되었는데 그는 칼 대신 성경을 들고 십자가의 구원을 외치며 이천, 광주, 장호원, 여주지방을 순회하였고, 자신의 집 앞에다 장대 끝에 십자가를 매달아 세워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의병활동과 선교활동, 애국계몽활동을 병행하였으며 밤에는 구국회원들과 기도회를 열고 항일계획을 논의하였다. 구연영의 설교 주제는 늘 항일과 일진회의 정체 폭로였으며 일본의 죄상 폭로였다. 이러한 규탄 강연으로 일본 측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오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아들 정서와 함께 체포되었다. 구연영 부자는 이천 관아(전 이천경찰서 자리)로 끌려가 가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과 애국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고, 일본경찰로부터 애국동지 명단 공개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함구하고 굴하지 않았다. 일본경찰들은 비분하는 부자의 팔다리를 칼로 찌르고 갖은 고문을 자행했으며 결국 이천 장터 홰나무 아래 묶인 채 부자가 함께 당시의 관아 서편 작은 언덕(창전동 365번지)에서 총살당하였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자, 구연영은 김하락, 김태원 조성학, 신용희와 함께 이천으로 내려와 1,000명의 의병으로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여 전국 최초로 의병항쟁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천수창의소의 중군장이 된 구연영은 1896년 1월 넓고개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첫 전투를 벌려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후 이현전투와 남한산성 전투를 비롯한 의병투쟁을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글- http://cc2000.or.kr, 이천문화원)
이천 의병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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